렘브란트의 유령
폴 크리스토퍼 지음, 하현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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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프롤로그는 이 소설의 스케일이 (공간배경) 엄~~청 나며 명화 속 미스테리를 응용해서 전개해 나가는 스토리가 독자에게 무한대의 흥미를 유발한다고 소개했으며 난 여기에 낚여 이 책을 읽어버렸다... 읽고야 말았다.


책을 다 읽었을 때 드는 느낌은 작가가 초반에 명품적인 추리 소설을 쓰려했으나 후반에 약을먹고 갑자기 액션물로 장르를 바꿔버리는 뭐 그런 느낌이었다.


한가지 더 든 느낌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백인 여자 주인공의 쓸데없는 호기심은 결국 모두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민폐로 이어진다는 점과

그럴바에는 집 구석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연예대상을 보는것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뭐 아무튼 흥미진진한 렘브란트의 그림을 소재로 시작했으나 끝은 어이없게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으로 끝이 좀 나나했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짝퉁 패러디느낌으로 급하게 마무리를 해버리는 (마치 더파이팅이 완간되기를 바랬으나 주인공의 적수가 또 등장하여 만화방에 300원을 더 내고 신간을 읽어야 할 것 같은 망할놈의 느낌) 그런 아류작쯤으로 보인다.


사실 이 평도 길게 말한거다. 걍 이 소설은 정말 표지대로 다빈치코드(쪼끔) + 인디애나 존스(뜬금없음)의 조합이었다.




인간의 영원하고 무한한 욕망, 보물찾기 소재



보물은 욕심에서는 찾을 수 없답니다.

 

    결국 이 소설의 망할놈의 결말은 욕심을 가지면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원하는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런것..?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결국 서양 소설을 가장한 동양철학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딱 스님들이 불경 읽으며 좋아 할 듯한.... 그런 정말 불교의 공(空, 빌 공)사상 같은 느낌이다. 공수레 공수거 빌공 등등 이 소설의 수식어로는 이런 것들이 딱일것 같다. 그래서 인지 스토리도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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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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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츠비로 대변되는 1920년대 미국의 거품 낀 자화상



F.스콧이 냉철하게 바라본 미국의 1920년대

 

    1920년대, 미국은 사회-문화적 호황으로 일전의 세계의 전성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부흥을 이끌어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경제적인 부흥이었으며, 그 누구도 앞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미국에 경제력으로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판단될 정도였다. 하지만 한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때의 미국의 경제호황이 대공황 전의 허황된, 속이 빈 화려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당시 그 때의 경제호황은 미국인의 지나친 착각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던 것이다. 흥청망청 사치의 문화는 그당시 '사치적' 합리성에 맞지 않는 소소한 것들을 철저히 짓밟았으며, 오히려 경제라는 합리성 이외에는 다른 분야의 합리성은 전혀 확보되지 못하는데도, 부분적인 합리성이 마치 전체의 합리성을 충족시키는냥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를 착각하기 시작했다. 

 

    개츠비의 이야기를 앞 두고 왜 이러한 이야기를 시작하느냐? 개츠비도 그 시기를 피해갈 수 없는 경제적 문화의 허상을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 데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개츠비가 그의 첫 사랑인 데이지에게 버림을 받은이유는, 다름아닌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주변의 호황적 분위기 속에 빨리 동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데이지는 빠르게 불어나는 미국의 버블 속도처럼 누군가를 기다려줄 여유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사랑했고, 그녀는 그것이 또다른 사랑일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탐과의 결혼은 데이지 그녀가 '경제적 안정성'을 무궁한 풍요라고 생각하게 했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게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이는 놀랍도록 미국의 경제성장기를 잘 포착해낸 그림이다. 돈이 그 어느것도 이기지 못하는 채로 성장하는, 그리고 그 성장이 무궁한 번영이라고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실패에서 '경제적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은 개츠비는 악착같이 미국의 분위기에 적응하려 애쓰기 시작한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물질주의적 태도를 온 몸에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신 또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투기를 권유하는, 윤리적이지 못한 주류사업을 통해 팽창하는 개츠비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물질주의 호황에 적응하고 싶어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치스러운 파티를 통해 그녀의 이목을 끌고 싶어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물질은 모든것을 풍요롭게 할 수 있나요?

정말 행복을 보증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해서 다시 만나게 된 데이지. 두 번째 사랑에서 그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개츠비의 생각대로라면 1920년대 아메리칸드림의 문화가 철저히 배어있는 자신의 모습은 다시는 사랑에 실패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사랑에 또 다시 실패했다. 물론 데이지에게 자신을 배반한 과거가 실수였음을 경각시키는데에는 적어도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고있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마치 미국에 기름처럼 둥둥 껴있는 자본주의는 속 빈 강정임을 가르쳐주는데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데이지에게 주었음에도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시 데이지에게 온 자신의 모습도 자신이 부정한 물질주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데이지에게 그렇게 알려주고 싶어한 그 허상의 모습을 자신이 하고있음을 그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랬기에 데이지는 또다시 배신하기에 적절한 핑계를 가질 수 있었고, 위기의 순간에 데이지는 그를 철저히 배반했던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결국, 개츠비는 사치스럽게 스스로를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통한의 최후를 맞는다.

 

 

노스트라다무스 뺨치는 예언가, 스콧

    재밌는 것은, 개츠비라는 인물이 아메리칸드림의 실체를 폭로한다고 보았을 때,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인 그 시기에, 작가인 F스콧은 이미 '물질주의 미국'의 허와 실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개츠비가 무너지는 모습은 월스트릿의, 세계 경제의 붕괴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물질적으로 성장한 모습이 마치 성공의 전부인냥 착각했으나, 그 실체가 모두 드러난 후 무너져버린 월가의 증권가를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암초를 앞두고 순풍을 기뻐하는 바보같은 돛단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콧은 이를 사회에 폭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두들 이 책을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위대할 뻔한 개츠비"가 훨씬 더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바라던 개츠비, 아니 미국의 모습. 행복이라는 목적 때문에 물질주의라는 맹독의 바이러스가 스멀스멀 들어오고 있는것도 모른 채 자본주의라는 수단을 두손들어 환영한 그 때의 바보같은 미국의 얼굴을 스콧은 실컷 욕하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아마 반어법으로 "위대한 개츠비"라고 하지 않았을까?

 

 

 

 

 

P.S. 하지만..... 개인적으로 개츠비의 순정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습니다. ㅠㅜ

 

 

 

 

 

 

 * 내가 뽑은 명문구 *



-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 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또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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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신화
하워드 슐츠 외 지음, 홍순명 옮김 / 김영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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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악마의 커피브랜드 스타벅스가 보여주는 자신의 성장기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스타벅스

 

    오늘아침 인터넷 검색어 1위를 달리는 것은, 스타벅스 럭키백 패키지이다. 스타벅스에서 설을 맞아 야심차게 출시해낸 커피 외의 또다른 MD 기획상품인 이 패키지 구성은 날개를 단 마냥 스타벅스의 판매고를 높여줄 것으로 예상되고있는 가운데, 판매 실시일인 오늘 아침부터 개장시간을 기다렸다가 달려나가 구입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현상은 최근에 스타벅스에서 판매되던 2013 스타벅스 플래너에서도 볼 수 있었다. 22,000원이나 하는 고가에도 (혹은 그 이상의 값을 내고 음료 쿠폰을 모아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플래너를 구입했고, 여전히 불티나게 판매되는 중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커피가 아닌" 스타벅스 상품에 열광하는것일까? 그 이유는 모두가 알고있다. 스타벅스는 이미 커피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커피 향에서만 공유되는 음료품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미 스타벅스는 하나의 브랜드 가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스타벅스는 커피 이상의 브랜드가치가 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고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그것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스타벅스는 단순한 브랜드가치만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힘든것 같다. 우리 일상속에 당연하게 생각된다는 면에서 오히려 하나의 '문화'가치에 가깝게 느껴진다. 즉, 한국사람에게 한국 문화가 무엇인지 말해보라면 막상 추상적이고 말 하기 힘들다는 것과 비슷한 비유이다. '스타벅스'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있고, 우리는 쉽게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스타벅스의 성장기를 통해 보는 '진짜' 스타벅스 

 

    하월드 슐츠의 이 책은, 이런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스타벅스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스타벅스에 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스타벅스 문화의 근본은 무엇인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의 스타벅스는 근본이념으로는 '명품 커피'에서 시작하고 있으나, 스타벅스의 성장기에는 커피 외의 문화적 트렌드가 섞여나갔다. 즉 지금의 스타벅스는 복합적 문화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월드 슐츠가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경험했던 그 소중한 기억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밝히기를,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바는 고혹적인 분위기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닌 "여유로운 일상"을 마실 수 있게 하는것 같다고 한다. 즉 '여유로움' 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유로움'의 가치는 스타벅스의 가치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타벅스는 누구나 커피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곳으로서 자신을 만들어가는것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스타벅스는 역시 '커피'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타벅스가 어떤 문화가치를 가지고 있든지간에, '커피'의 향과 맛이 지금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글로벌 브랜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는 안된다는 것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던 하월드 슐츠는 때문에 커피맛에 늘 신경을 썼다. 원두 배전방식부터 테이크아웃 컵에 대한 고심까지, 그의 경영진과 그의 커피에 대한 고심은 끊이지 않았다. 아직도 모든 매장의 시애틀 본사 직영을 주장하는 그의 경영철학을 보면 이는 그가 얼마나 커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고급 원두를 수입하고, 스타벅스의 전통적 로스팅 기법 (원래 스타벅스 커피의 음료기술은 하월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인수 하기 전의 스타벅스의 기술이었다.)을 철저하게 지키며,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사명감까지 강조하는 그의 태도들은 스타벅스가 지금의 문화적 가치의 뿌리에 기본적으로 '커피'에 대한 자부심을 심고 있음을 훌륭히 대변한다.

 

커피와 여유로움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고자했던 스타벅스 경영

 

    스타벅스의 문화적가치는 위에서 언급한 여유로움의 가치와 커피의 맛과는 별도로 내부의 '경영철학'에 의해 형성되기도 했다. 스타벅스는커피맛과 여유로움의 가치를 어떻게 고객들에게 전파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 커피맛은 한결같이, 판촉활동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이뤄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다시말해 스타벅스의 근본가치였던 '변하지 않는, 명품 가치'로서의 커피는 그대로 유지하고, 고객들에게 커피의 여유로움을 전달하는데에는 다각도로 접근하며 변화를 거듭해왔다는 말이다. 지금의 스타벅스 MD상품들을 예로들자면, 그 상품들은 스타벅스의 명품 커피의 이미지 (변하지 않는 커피맛)와 함께, 편안한 스타벅스의 문화가치가 하나의 DNA처럼 얽혀 탄생해 낸 제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스타벅스 플래너를 쓸 때에도, 스타벅스의 명품 커피를 생각하며 그 속에서 진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방침은 슐츠가 스타벅스를 운영한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변화 속에서도 본질이 추구하는 명품 커피의 안정성을 보장하며 균형을 위해 원년 회사 멤버들의 말을 경청했고, 마켓 유통 커피라는 혁신적인 사업을 진행할 때에도 커피맛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사 커피 추출 기술을 극대화하는 연구소를 만들어 운영했다. 또한 모든이들과 '같이' 경영하는 스타벅스를 강조했고, 매장 직원과 바리스타, 사무직 노동자, 이사진 모두가 사명감을 가지고 이끌어 나가는 스타벅스 경영문화를 창조했다. 이직률이 적은 스타벅스의 상황을 보면 '같이'경영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가 잘 증명되는 바이다. 그러면서도 주가 안정을 늘 고민하며 지금까지도 변화와 안정속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그의 모습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스타벅스의 상승세가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책을 다 읽고나면 이제 초장에서 했던 질문에 어느정도 대답을 할 수 있게된다. 스타벅스 플래너를 쓰는 행위는, 결국 스타벅스의 커피를, 커피속 여유로움을 마시는 일이며, 스타벅스의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모든 복합적 가치가 설명하기 힘들었던 스타벅스 문화였다. 이렇게 스타벅스를 이해하고 나니, 수박 겉핡기 식으로 낯설게 이해했던 스타벅스와 이제는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든다. 

 

    앞으로도 스타벅스 문화는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나가는 스타벅스와 함께 해 나갈 것이다. 만약 그 균형이 깨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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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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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도록 무서운 사회의 익명성



Inhibition : 자신이 치는 사회적 장벽, 남 또한 넘으려 하지 않는 하찮은 방벽

 

    "Inhibition"이라는 교육학적 개념이 있다. 자신의 자존감과 본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사회를 향해 진입장벽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개념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사회에 적응한 또 다른 대외적인 나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일반적인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우리는 아무리 내면을 드러내고 싶어한들, '대외용 나'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고, 받아들이는 사람 또한 상대방의 '진짜 내면'을 파악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개인이 이렇듯 자신의 진면모를 감춘 채 '대외용 나'를 만드는 한, 우리는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우리가 그 참모습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사람의 참모습을 파악하는데 참으로 소극적이다. 설사 우연히 그 사람의 진짜 내면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직간접적인 이해관계의 밖에 있는한 쉽사리 그 진짜 자아가 처한 상황내지는 문제에 대한 평가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익명의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습은 보이되, 진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그런 익명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듯 익명의 사회는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마구 드러내는'식으로 운영된다기 보다는 '익명일수록 더 과장되고 부풀려진 대외용 모습을 여기저기 내보이게하는'식으로 운영된다. 즉 자신의 본모습보다는 꾸며진 모습을 익명 속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의 사회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자발적 노력으로 이 거짓된 익명의 사회를 깰 수는 없을까? 서로의 진모습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조언해줄 수 는 없는 것일까? 요시다 슈이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익명의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내면 속에는 결국 "우리는 남남"일 수박에 없다는, 내 이해관계 밖의 일이면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소설 곳곳에서 폭로하고 있다. 선배를 배신하지 않을것이라고 믿어왔던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선배의 애인을 탐하는 자기의 참모습에 자조적 울음을 터뜨리는 요스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배경 때문에 그 용기를 잃어버리고는 위화감을 느끼는 고토미. 어린시절 폭압적 아버지에 대한 잔상으로 남자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지만, 이를 터뜨리지 못하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무의식속에 억누르며 살아가는 미라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냉소적인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고 믿어왔으나 실은 불안한 자신을 고요히 덮어줄 안식처를, 방황을 끝낼 정착지를 찾고 있는 사토루. 자신에게 짊어진 불필요한 일들에 염증을 내고 자신의 겉 껍데기 모습에 탈피하고 싶어하는 나오키. 이 모든 주인공들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자각을 하고있지만, 애써 대외적인 자신의 모습을 겉으로 꺼내보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대외적인 모습과 진짜 자신의 모습이 충돌하는 것에서 환멸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한다. 아니, 어찌보면 '대외적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진짜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고 있다. 익명의 사회에서 남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내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은 채 대외적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어버린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에 따라 여러 개의 '대외적인 나'를 만들어가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면 그만이다.


    대외적 가면 속에 숨은 얼굴을 누군가가 본다한들, 이 사회에는 진정한 이해나 충고보다는 회피와 무시만이 가득할 뿐이다. 상대방의 진짜 얼굴이 어떠하던간에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익명성'이라는 룰을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다시말해 볼수있는데도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고토미가 말한 '계산된 교제'일 것이다. 나오키의 진짜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동거를 지속하려했던 주인공들의 모습은 알고도 모른척하는 현대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을 작가가 꼬집어 내기 위해 꺼냈던 소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방아쇠 속에, 왠지모르게 착잡해진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소설 후반부에 충격적 결말을 설정했던것 같다. 독자가 받았을 충격 속에 굵직한 메시지를 담가놓는 그의 필력은 이런점에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집자마자 "읽고 싶어진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가 깔아놓은 충격적 결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오키가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가 아는 건 진짜 내가 아니야"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한 것은 다른 주인공들에게 소름이 끼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괜찮아, 나랑 상관 없잖아."




    나 또한, 그리고 내 주변관계들도 나오키와 그의 관계들과 다르지 않음에, 새삼 씁쓸한 기분이 든다. 아마 나도 익명성의 사회에 너무 익숙해 져 있기 때문이겠지.



 

* 내가 뽑은 명문구 *



- 34p)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거북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는 모습ㅇ르 토끼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 50p) "초밥을 만드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래도 말이지, 아버지는 네가 이 초밥 가게를 물려받는 것보다 우리 집에 오시는 훌륭한 손님들처럼 되길 바라셔."


- 106p) "컨디션이 좋을 때는 우리 어머니가 세계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멋진 어머니는 아마 없을거야. 그런데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면... 글쎄 뭐랄까, 내가 세계 제일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돼."


- 132p) 고토는 "난 여기 생활이 인터넷에서 채팅하는 것처럼 느껴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없진 않다.... 단지 채팅방에는 기본적 권리로 익명이 부여되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게 오픈돼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익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내가 익명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절대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과장에 과장을 덧붙인 위선적인 자신을 연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살고 있는 나는 틀림없이 이집 전용의 나이다....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여기가 '무인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 곳이 무인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집 전용의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 비어있기 때문에 가능찬 '꽉 찬 상태.'


- 183p) "유니버스는 하나의 우주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멀티버스란 다수의 우주란 뜻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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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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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주하기 싫은 진실 속에 숨은 자기 찾기



마주 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다. 이는 특정 사건이나 사실, 물건 등에 환멸감을 느끼고 그 환멸감을 피하고자 그것들에게서 도피하려 하는 현상이나 행위를 통칭한다. 트라우마를 겪는 누구나 그것들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잊고싶어한다. "잊으면 그만"이지 왜 "잊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 트라우마가 우리의 치부와 연관되는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필로 살짝 긁혀서 입은 상처는 잊으면 그만이지만, 연펼심에 깊게 박힌 상처는 다시 연필 집기를 꺼려하게 되는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상처이기에, 그냥 덮어두고 외면하려 하는 것이다. "잊고 싶어서"


    그러나, 트라우마를 외면한채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진짜 자기 모습마저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면하며 산다고 마냥 평안할 수 없으며, 무엇인지 모를 불안 속에 자신을 오히려 끝없이 가두며 살아간다.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제 각기 특별한 트라우마로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자기방어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세상에 등을지고 있는것도 모른 체 세상이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단절 속에서 맹목적인 탈출의 희망을 느끼고, 자유를 만끽하려한다. 하지만 막상 정신병원을 나간다고는 해도 그들에게 자유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자기 스스로 세운 트라우마  때문에 세상을 거꾸로 보려하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으로 스스로가 트라우마 너머의 진실을 보려하지 않는 이상, 정신병원 안팎 모두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를 보면 알 수 있듯, 폐쇄병동으로 나가는 것은 의외로 쉽다. 문제는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이다. 다시말해,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는지의 문제와 연관된다. 승민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누리려했기 때문에 눈이 안보이는 트라우마 따위보다 더 크게보이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수명은 트라우마가 자신의 꿈보다 클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자신의 모습마저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수명에게 마냥 두려운 것인냥 인식되었고 수명은 늘 세상과 등지며 살아갔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도 모른채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수명이 트라우마를 마주하며 진실을 고백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세상은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큰 꿈과 마주할 수 있다. 단지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자신의 치부와 마주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잊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잊으면 그만"인 것으로 치부할 때 원대한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정신병으로 가장한, 용기없는 자들에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어야지. 우울한 수험생과 승민이 그랬듯, 자신의 꿈을 트라우마 넘어로 볼 수 있도록, 세상을 향해 서도록 팔을 잡고 방향을 돌려주어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 내가 뽑은 명문구 *



- 53p) 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 141p) 우리에게 이유가 있듯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다. 타인과 교신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게 비극일뿐이지. 사람들은 스스로 그걸 '영화'라고 칭했다. 병동은 각자의 영화가 동시 상영되는 극장이었다. 그러니 시끄러울밖에.


- 264p) 승민은 보호사나 진압 2인조에게 소리치는게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 284p) "너라면 어떻겠냐? 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날아다녔던 세상이 어느날 갑자기 비행 금지구역으로 변해 있다면."


- 291p)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구요."....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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