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놀랍도록 무서운 사회의 익명성



Inhibition : 자신이 치는 사회적 장벽, 남 또한 넘으려 하지 않는 하찮은 방벽

 

    "Inhibition"이라는 교육학적 개념이 있다. 자신의 자존감과 본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사회를 향해 진입장벽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개념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사회에 적응한 또 다른 대외적인 나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일반적인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우리는 아무리 내면을 드러내고 싶어한들, '대외용 나'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고, 받아들이는 사람 또한 상대방의 '진짜 내면'을 파악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개인이 이렇듯 자신의 진면모를 감춘 채 '대외용 나'를 만드는 한, 우리는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우리가 그 참모습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사람의 참모습을 파악하는데 참으로 소극적이다. 설사 우연히 그 사람의 진짜 내면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직간접적인 이해관계의 밖에 있는한 쉽사리 그 진짜 자아가 처한 상황내지는 문제에 대한 평가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익명의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습은 보이되, 진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그런 익명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듯 익명의 사회는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마구 드러내는'식으로 운영된다기 보다는 '익명일수록 더 과장되고 부풀려진 대외용 모습을 여기저기 내보이게하는'식으로 운영된다. 즉 자신의 본모습보다는 꾸며진 모습을 익명 속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의 사회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자발적 노력으로 이 거짓된 익명의 사회를 깰 수는 없을까? 서로의 진모습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조언해줄 수 는 없는 것일까? 요시다 슈이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익명의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내면 속에는 결국 "우리는 남남"일 수박에 없다는, 내 이해관계 밖의 일이면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소설 곳곳에서 폭로하고 있다. 선배를 배신하지 않을것이라고 믿어왔던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선배의 애인을 탐하는 자기의 참모습에 자조적 울음을 터뜨리는 요스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배경 때문에 그 용기를 잃어버리고는 위화감을 느끼는 고토미. 어린시절 폭압적 아버지에 대한 잔상으로 남자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지만, 이를 터뜨리지 못하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무의식속에 억누르며 살아가는 미라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냉소적인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고 믿어왔으나 실은 불안한 자신을 고요히 덮어줄 안식처를, 방황을 끝낼 정착지를 찾고 있는 사토루. 자신에게 짊어진 불필요한 일들에 염증을 내고 자신의 겉 껍데기 모습에 탈피하고 싶어하는 나오키. 이 모든 주인공들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자각을 하고있지만, 애써 대외적인 자신의 모습을 겉으로 꺼내보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대외적인 모습과 진짜 자신의 모습이 충돌하는 것에서 환멸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한다. 아니, 어찌보면 '대외적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진짜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고 있다. 익명의 사회에서 남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내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은 채 대외적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어버린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에 따라 여러 개의 '대외적인 나'를 만들어가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면 그만이다.


    대외적 가면 속에 숨은 얼굴을 누군가가 본다한들, 이 사회에는 진정한 이해나 충고보다는 회피와 무시만이 가득할 뿐이다. 상대방의 진짜 얼굴이 어떠하던간에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익명성'이라는 룰을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다시말해 볼수있는데도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고토미가 말한 '계산된 교제'일 것이다. 나오키의 진짜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동거를 지속하려했던 주인공들의 모습은 알고도 모른척하는 현대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을 작가가 꼬집어 내기 위해 꺼냈던 소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방아쇠 속에, 왠지모르게 착잡해진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소설 후반부에 충격적 결말을 설정했던것 같다. 독자가 받았을 충격 속에 굵직한 메시지를 담가놓는 그의 필력은 이런점에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집자마자 "읽고 싶어진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가 깔아놓은 충격적 결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오키가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가 아는 건 진짜 내가 아니야"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한 것은 다른 주인공들에게 소름이 끼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괜찮아, 나랑 상관 없잖아."




    나 또한, 그리고 내 주변관계들도 나오키와 그의 관계들과 다르지 않음에, 새삼 씁쓸한 기분이 든다. 아마 나도 익명성의 사회에 너무 익숙해 져 있기 때문이겠지.



 

* 내가 뽑은 명문구 *



- 34p)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거북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는 모습ㅇ르 토끼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 50p) "초밥을 만드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래도 말이지, 아버지는 네가 이 초밥 가게를 물려받는 것보다 우리 집에 오시는 훌륭한 손님들처럼 되길 바라셔."


- 106p) "컨디션이 좋을 때는 우리 어머니가 세계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멋진 어머니는 아마 없을거야. 그런데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면... 글쎄 뭐랄까, 내가 세계 제일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돼."


- 132p) 고토는 "난 여기 생활이 인터넷에서 채팅하는 것처럼 느껴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없진 않다.... 단지 채팅방에는 기본적 권리로 익명이 부여되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게 오픈돼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익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내가 익명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절대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과장에 과장을 덧붙인 위선적인 자신을 연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살고 있는 나는 틀림없이 이집 전용의 나이다....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여기가 '무인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 곳이 무인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집 전용의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 비어있기 때문에 가능찬 '꽉 찬 상태.'


- 183p) "유니버스는 하나의 우주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멀티버스란 다수의 우주란 뜻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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