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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잠시도 일탈을 꿈꾸지 않는 바른 생활이 어른들이 견지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면, 차라리 나는 철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책임진다는 것을 말한다. 혹은 자신의 삶을 결정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를 말한다. 이 소설은 40대가 되도록 여전히 삶의 방향성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가 자신보다 사랑했던 여성 ‘가오리’라를 만나 느꼈던 감정들과 그 후에 만났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붙여 얼개를 맞춰나간다.
앞서 이야기했듯 주인공은 본인의 삶에 대한 어떠한 생각이나 계획이 없다. 새로운 삶을 욕망하고 벗어나고자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박차고 나설 용기는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인구직 시가지를 통해 알게 된 ‘에끌레어 공장’에 우연찮게 들어가, 쉬는 시간 짬짬이 펜팔코너를 뒤지다 알게 된 ‘가오리’를 통해 그의 삶은 변화한다. 삶의 질에 대한 방향성이 틀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해도 다들 잘 살아가니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옆에 있어준다면 비록 꿈을 이루거나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녀에게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적어 보낼 수는 없었다. 봄날 언덕의 아지랑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꿈일지라도 사람은 등에 맨 배낭이 텅 비어있는 경우 앞만 보고 걸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배낭에 든 짐이 가벼워야 하지만 맨손은 불안하니까. 가망 없는 꿈일지라도 인생길의 동반자로 삼아서 안 될 일은 없으니까.
그는 에끌레어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나나세가 매일같이 말하던 철창 없는 교도소를 먼저 출소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인권 보장에 대한 관심이 없던 시대였던 만큼 그가 새로 들어간 방송국 식자업체에서 그는 무진 고생한다. 언제 업체로부터 연락이 올지 몰라, 기울어가는 경영난 속에서 매일 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며 일을 하다가, 일의 완성을 앞두고 금액을 후려치는 갑질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을병정이 되어서도 그는 열심히 살아간다. ‘가오리’라는 휴게 공간 덕분이었다.
내게 달라진 환경은 그리 의미가 크지 않았다. 인간은 현재보다 환경이 악화될 경우 공포감을 느끼듯 좋아질 경우에도 역시 겁을 집어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일하던 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커나간다. 하지만 주인공에게는 그러한 변화마저 무섭다. 평범한 일상이 깨어지는 순간들은, 새로운 도전이라는 과제가 주어지기에 주인공은 무엇인가 새로 시작되는 상황들이 불편하고 어리숙하기만 하다.
남녀 사이에서 내가 볼록이면 상대는 오목인 단순조합은 사실상 없다. 오히려 내가 세모면 상대는 별 모양인 경우가 더 흔하다. 어떤 커플이든 매사 마음이 척척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색한 상황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면 가오리와 난 지금도 이 자리에 함께 있을지 모른다.
와중 그의 삶의 휴식처였던 ‘가오리’는 ‘다음 만남에는 CD를 가지고 올게’라는 다소 엉뚱한 말을 하며 그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이 다가왔음을. 초등학교 시절 환락가에서 도시락 배달을 하던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며 찢어진 교과서를 셀로판테이프로 말끔하게 붙여주었던 스트립걸 나오미 누나나 눈길에 바이크를 타고 달리다 넘어졌을 때 손수건으로 다친 상처를 감싸주었던 야쿠자 형님,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들이비치는 방에서 비록 몸을 팔며 살아가지만 당당하고 밝았던 수와의 만남에서와 같이,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헤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안녕이라는 말을 전하기 어렵더. 어딘가 굵은 글씨로 헤어질 때 써먹시 위해 근사한 말을 준비해둔다고 하더라도 막상 이별해야 할 상대가 눈 앞에 있으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별의 순간을 오래도록 추억할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별은 그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는 문과 같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만남이 SNS라는 공간을 통해 새롭게 이어짐을,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기억이 마주하는 공간에서 다시 시작 됨을 알리며 마무리 된다. 하지만 그 역시도 피상적인 관계의 일련성임을, 우리 모두는 외롭고 고독하고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러한 피상적인 관계에 목을 멜 수밖에 없는 ‘여전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 임을 이야기하며 끝을 맺는다.
이따금 나는 사이버 공간이 숨 막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을 옥죄는 규칙의 존재가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과 SNS로 매일이다시피 인사를 나누지만 정작 그들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상에 놓인 존재들로 보이기도 했더. 모두들 '나, 여기에 있어.'하며 캐릭터를 깜빡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저마다 고독한 존재일 뿐이었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바뀌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직 고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등성부터 6등성까지, 빛의 강도와 크기는 각각 달라도 좀 더 빨리, 좀 더 깊이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다들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워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야기는 참 잘 읽힌다. 공감할 여지도 충분해보이며 일본에서 왜 이렇게 인기가 있었을지 납득이 가기도 한다.
다만 소설의 번역이 다소 부드럽지 못한 부분이 있어 아쉽다. 더불어 부잣집에 다니는 학교에 배정되어 3년 내내 유령처럼 다녔다는 이야기와 학기 시작 전 지금은 한 반에 많은 이들로 꽉꽉 차있지만 6개월이 지나면 학생들이 다 나가버려 괜찮을 거라는 선생의 인사가 당연시되는 학교의 특성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보인다.
일주일에 한번 씩 트위터에 먼저 연재되어 140자씩 글을 써서 올리다보니 ‘140자 문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이 소설은 이후 웹사이트 등에 내용이 보완되어 연재 끝에 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도 아닌 평범한 셀러리맨이 적어내려간다는 건 녹록치 않았을 걸 알기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이 소설을 쓴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