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것 같다.
먼저, 한국에서 '변증'이라고 하면 토론이라는 생각보다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머릿말에서 '변증학은 소통(engagement)을 독려한다'라고 말하면서 '변증학은 믿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소통'을 위해 '변증'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우고 승리하기 위해서 '변증학'이라는 학문을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변증학에는 '신존재증명'이라든지 '반틸의 변증학'에서 보듯이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과정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다보니 변증학은 어려운 학문이고, 그 내용마저도 딱딱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성공회 신부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변증학'은 평신도들도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내용이긴 하지만, 대부분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이 변증학의 서론 정도로 볼만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머릿글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6년간 옥스퍼드 기독교 변증학 연구소에서 '기독교 변증학 입문'이란 제목으로 그가 가르쳤던 기초강의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을 '독자들이 변증적으로 생각하도록 격려하고 도우며, 복음을 우리 문화에 어떻게 설명하고 권해야 하는지 자세히 탐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20세가 가장 위대한 변증가로 C.S 루이스(C.S.Lewis, 1898-1963)을 꼽는데, 이 책도 그의 변증방식을 따른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많은 부분에서 C.S 루이스의 글들을 인용하고 있다.
총 9장으로 나뉘어져있으며, 1~3장까지는 변증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 져야 하는지, 그리고, 신학적 시각은 어떠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4장에서는 왜 청중을 이해해야하는지를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바울의 아테네 설교, 바울의 법정연설등을 통해 분석한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 청중에게 접근한 방식을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리스 청중에게 사용했다면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아테네에서 사용한 방식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 청중에게 사용했더라도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지역 상황에 맞게 수사학을 수정하고 지역의 권위자(시인 아라토스)를 인용하며, 지역의 상징물(익명의 제단)이 갖는 변증학적 잠재력을 활용하여, 자연질서 속에 존재하는 신에 관한 아테네 사람들의 생각에 부합하는 사고체계를 전개한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쉽게 받아들이고 수정해 적용할 수 있다"(p.110)
5~7장까지는 기독교신앙의 합리성, 변증적 소통의 방식, 기독교 변증의 진입로(설명, 논증, 이야기, 이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8장에서는 두가지 사례연구를 통해 믿음에 관한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방식을 살펴보고, 9장에서는 결론저긍로 자신만의 변증방식을 개발하라고 권하고 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변증'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있다면 '대화'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와 변증을 비교하며 그는 전도는 '초대'라면, 변증은 '대화'라고 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러가지 질문들을 본의아니게 받게 된다. 짧은 지식으로 답변을 하지만 속시원하지 않은것은 서로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당신만의 변증방식을 개발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공개적인 말하기, 책쓰기, 개인적인 대화, 삶과 태도를 통해 본을 보이기"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변증할 수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가장 좋은 변증은 역시 '삶과 태도를 통해 본을 보이기'라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 답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변증'이 될 것이라 믿는다.
"변증학은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이미 아는 세계에서 찾아내야 하는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것이다. 변증학이란 사람들이 지금껏 전혀 모르던 문을 찾아내도록 돕고, 지금껏 상상도 못했던 세계를 보고 그 세게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다. 변증학은 눈을 열고 문을 열어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세운다"(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