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 - 파리, 그 극적인 거리에서 마주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크리스티앙 파쥬 지음, 지연리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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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밝히자면 나는 에세이 혐오증이 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이 덕지덕지 붙여져 있고 억지로 감성을 쥐어짜내며 "힘내!", "네 잘못이 아니야!" 라며 위로하는 에세이. 서점 베스트셀러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이러한 에세이를 보면 미간이 찌푸려진다.

근데,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은 좋았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지만, 크리스티앙의 유쾌함과 인간미는 오히려 읽는 이에게 위로를 주었다.

 

인생의 위기는 "나 곧 온다~꽉 잡아~"라고 소문내며 오지 않는다. 게임 퀘스트를 깨듯이 차례대로 오지도 않는다. 해일처럼 한 번에 몰려와 인간을 휩쓴다.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가정, 직장, 정신 문제가 한 번에 몰려오고 끝으로, 또 끝으로 인간을 내몬다.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은 크리스티앙 파쥬의 거리생활 비망록이다. 소믈리에라는 번듯한 직업, 행복한 결혼 생활과 귀여운 아들이 있었던 크리스티앙은 아내의 이별 통보로 한순간에 거리로 내몰린다. 그럼에도 그는 트위터를 통해 사회에 자신을 끊임없이 알린다.

거리생활이란 곧 사회와의 단절이다. 잊힐 수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방치할 수 있었지만 크리스티앙은 몇 년째 보지 못한 아들을 생각하며 트위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끝내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결국 크리스티앙은 집을 구하게 되고,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를 출간하게 된다. 노숙인이 쓴 에세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거리생활로 내밀려 삶의 나락을 경험한 크리스티앙은 노숙인에 대한 도시의 비정함과 그러면서도 마주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도시의 밝은 면과 비정한 면을 노숙인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거리생활은 갖가지 위험으로 노숙인을 내몬다. 그중 가장 위험한 요소가 바로 사람이다. 경멸의 시선으로 훑고 지나가는 사람들, 어떻게든 노숙인을 도시에서 내쫓고 싶어 하는 사람들, 노숙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유희로 삼는 사람들. 그래서일까, 크리스티앙과 그의 노숙인 동료들은 노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알아보는 훈련이라고 말한다. 노숙인에게 가장 큰 위협은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위로를 주는 대상 역시 사람이다. 가끔이라도 노숙인에게 다가오는 사소한 배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한다.

지하철역에서 잠을 자고 구걸을 해도, 거리생활의 연차가 아무리 늘어나도, 노숙인 역시 사람이기에 수치심을 느낀다. 유쾌함으로 일관하고 좌절하지 않던 크리스티앙이 의사의 깨끗한 가운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져서 병원에 가길 꺼려 한다는 언급은 잠시 먹먹함을 선사했다.

크리스티앙을 무기력함으로 내모는 가장 큰 요소는 과거의 기억이다. 행복했던 가정과 즐거움 가득했던 직장. 이러한 기억들은 크리스티앙을 괴롭히지만 잠시 과거에 젖어드는 감상은 오히려 그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는 건, 참 괴롭고도 아련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집이 다른 이에겐 간절한 꿈이 되기도 한다. 3년 반의 거리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얻은 크리스티앙은 어렵게 얻은 행복을 즐기면서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거리생활을 했던 크리스티앙에게 음식을 저장하고, 내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냉장고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한다. 상징적이지만 현실적이다.

 

남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건 참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불행과 행복, 나의 삶과 너의 삶을 저울질하며 가치를 매기는 행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을 읽는 행위는 전혀 그런 비겁한 짓이 아니다. 상대적 우월감 혹은 반면교사를 삼기 위해 이 책을 읽은 이들은 되려 크리스티앙을 통해 위로받을 것이다.

위로는 생각보다 대단한 게 아니다. 사소한 관심과 따뜻한 말 한마디, 진한 포옹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이 보증이 될 것이다. 또한,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은 에세이에 대한 내 편견을 부숴준 기념비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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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 - 10년 후 한국은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미래전략연구센터 지음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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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 낯설기만 했던 인공지능이 어느덧 스마트폰마다 장착되어 있고(시리야!) 알고리즘으로 유튜브와 넷플릭스 채널을 추천받는다. (필자는 킹덤을 추천한다.) 지도 어플은 내가 위치한 곳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추천해 준다. 이처럼 우린 이미 4차 산업혁명의 산물을 누리고 있다. 개인 정보가 침해받는 기분이 들곤 하지만 개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누리지 못하는 즐거움들이다. (약관 사용에 동의도 했을 것이다.) 이 정도 편리함을 누리다 보면 "한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구나!" 하고 나라사랑이 벅차오를 수도 있다. 하나, 그렇지마는 않다.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에선 한국이 지금 같은 상황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처하다간 몰락할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또한,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은 몰락을 중심으로 한 미래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 전략을 제시한다. (여기서 몰락이란 부정적 의미만이 아닌, 붕괴가 있어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함을 아우른다.)

 

우선, 한국의 혁신을 가로막는 요소는 크게 6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정치-> '빨갱이 담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치 양극화

2. 경제-> 소득과 자산, 노동시장의 양극화,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3. 사회 -> 젠더 갈등, 세대갈등

4. 규제-> 포지티브 규제(허용된 것 이외에 전부 규제)로 이익 취하는 집단의 지위 유지를 위한 네거티브 규제 반대

5. 행정-> 수직적, 억압적 중앙집권체제와 행정 지역 구분을 통한 '선극기'식 공급자 중심행정

6. 교육-> 공교육을 앞서는 사교육, 시험 만능주의에 빠진 청년,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 못하는 국가

 

위의 6가지 요소를 가로지르는 문제는 바로 양극화다. 혁신을 위해선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동 목적을 설정해야 한다.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에선 공동 목적을 공동선과 공동부로 세분화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동선과 공동부가 도출되지 않는다면 한국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낙오자가 될 것이라 예측한다.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에서 거듭 강조하는 부분은 바로 규제 개혁,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 형성, 공유경제를 위한 블록체인 활성화다.

 

한국은 4차 산업혁명의 원유인 데이터와 클라우드에 대한 규제 강도가 높다. 허용된 것 이외에 전부 규제하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은 기업의 혁신적 시도를 옭아매고 결정적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진입을 막는 장벽이다. 따라서 법률상 금지된 것 외에 전부 허락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규제 완화에서 그치면 안 된다. 이를 오남용하는 사례가 쉽게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제를 완화하되, 오남용에 대한 엄벌주의를 장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책적 역량이 필요하다.

 

다음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구조다. 한국에서 실패는 곧 낙오자가 됨을 의미한다. 또한, 연구자에게 단기적인 성과를 강조한다. 자연스레 연구자는 성공에 집착하게 된다. 점차 안정적인 연구만을 추구하고 이익집단으로 몰락한다. 한국이 연구 투자 대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코리아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 것도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의 몫이 두둑하다. 기업가 역시 혁신적인 시도를 두려워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의 양적 평가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양적 평가 방식은 연구자의 장기 프로젝트 진행을 막는 원인이다. 또한, 혁신적 기술 개발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하여 동기부여를 하고 제재가 아닌 보상 위주의 성과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어서 연구자에게 예산 운용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불법적 사용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위의 개혁을 바탕으로 연구자와 기업가가 실패를 무릅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은 퍼스트 펭귄이 되고자 하는 기업가들이 혁신을 주저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로 포용적 제도를 제시한다. 포용적 제도란 사유재산권과 공평한 경쟁을 위한 법 체제가 확립되고 새로운 기술을 위한 투자와 기업 활동이 보장되는 제도를 뜻한다. 이 역시 정부가 맡아야 하는 역할이다.

 

4차 산업혁명은 필연적으로 공유경제로 이어진다. 제품 종류 다양화, 제품 수명 단축, 온라인을 통한 실시간 거래. 위와 같은 현상을 통해 소유보다 공유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따라서, 공유경제로 진입하지 못함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누리지 못함으로 이어진다. 물론 공유경제에도 부정적 효과가 있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만, 생산을 감소시키며 독점적 사업의 폐해가 존재한다.

이러한 공유경제의 허점을 블록체인이 보완해 줄 수 있다. 블록체인은 중앙 집중형 권위 체계 없이도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신뢰의 기술인 블록체인과 공유경제를 결합한다면, 신뢰를 통한 사회적 합의의 바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국에선 국회가 이 역할을 맡는다. 하나, 현재 한국의 국회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상태다. 각자의 정당과 지역의 이익만을 대변할 뿐이다. 현재의 정부는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었으며 수직적 구조를 갖췄다. 따라서 협치의 개념인 거버넌스를 통해 권력 이동을 수평적으로 배분할 필요가 있다. 거버넌스를 위해선 신뢰의 기술인 블록체인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대두된다. 블록체인과 거버넌스는 수평적, 분배적 성격을 띤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만큼 둘의 공존은 신뢰를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중앙 집중적 지배 구조를 분산적 신뢰로 재구성하고 권력의 계층 구조를 분산 구조로 바꾸어 거버넌스 구조를 갖춰야 한다.

완벽해 보이는 거버넌스지만, 역시 비판점이 존재한다. 거버넌스 구조는 대화가 문제 해결로 귀결되지 못하는 측면이 크다. 이를 위해선 기존 제도적/조직적 처방과 결합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블록체인을 통해 일부를 위한 대의민주주의 체계를 다수가 직접 참여하는 거버넌스 체계로 바꿀 수 있을 것이며 가까운 미래엔 시민 다수의 생각이 의사결정에 직접 반영될 것이라 예측한다. 또한, 공공서비스의 목표가 성과주의가 아닌 책임 주의로 개편되어 공무원과 정부가 공익실현에 진정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의문점이 들었다.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는 거버넌스 체계는 수평적이며 분산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구조는 시민 모두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하나, 의견이 있음에도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여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계층의 의견은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신기술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인계층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시스템으로 이익을 얻는 집단이 권력 이동을 받아들일까? (책에선 혁명을 제시하긴 한다.)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동선을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 경제, 사회 등이 혁신을 이뤄야 하며, 혁신을 위해선 역시 공동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동선이 부재한다면 산업의 전환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 간의 입장 차이로 목표가 지연되거나 좌절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산업의 미래''미래의 산업'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각각에 따른 정부의 지원 역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공동선이 세대 간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또한, 결론적으로 공동선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저 모두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 있는 공동선이 필요하단 말의 반복이다.

 

그럼에도 2030 카이스트 미래경고대한민국의 암담한 미래 시나리오를 그려 진단하며 희망 시나리오로의 진입을 위한 전략과 대안을 도출했기에 낙관적으로 시도되는 통상적 전략과 위기 극복 제안이 아니란 점에서 차별화가 되어있다. 또한,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의 문제를 진단했으며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선두자가 되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한국은 여전히 골든 타임 중에 있다. 한 번에 모든 개혁이 이뤄질 순 없겠지만 차근차근 사회적 합의를 맞추어간다면 양극화를 해결하여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작은 분명 415일 총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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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특별한 관문 - 아이비리그의 치열한 입시 전쟁과 미국사회의 교육 불평등 걸작 논픽션 20
폴 터프 지음, 강이수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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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엔 사이좋게 미국과 한국 모두 입시비리가 터졌다. 이 사건들은 입시생을 태생적 한계와 허무감에 빠뜨렸다. 동시에 대학과 입시 제도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을 대중들에게 던졌다.

 

이러한 사회적 담론이 오가는 가운데, 인생의 특별한 관문은 미국의 입시와 교육 불평등에 대한 현장보고서이자 대학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대중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를 담아낸 것이다.

 

대학은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자, 사회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다. 가난한 이가 부유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은 부의 대물림과 가난의 대물림 현상을 더욱더 공고하게 다진다. 어째서 사회이동을 원활하게 형성하던 대학이 경직된 사회 구조를 공고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 것일까? 이러한 현상엔 SAT/ACT(미국의 수능)와 같이 표준화된 입학시험이 한몫했다. 한국에서 사교육이 성행하듯이, 미국 역시 SAT를 대비한 사교육 바람이 엄청나다.

 

"그렇다면 SAT가 아닌, 사교육 시장이 잘못된 것 아닌가?" 라는 날카로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나, 사교육의 수요가 없다면 공급 역시 없을 것이다. 왜 사교육의 수요가 생기는지에 대해 짚을 필요가 있다. 공교육만으로는 SAT를 잘 치를 수 없으며, SAT를 잘 치르지 못한다면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사교육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되는 부유층 부모의 자녀가 SAT에 유리해지고 자연스레 부유층 자녀가 빈곤층 자녀보다 명문대에 갈 확률이 월등히 높아진다. 그렇다고 모든 빈곤층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빈곤층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입시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며 SAT성적이 우수한 학생(대박!) 우선, 입시에 대한 정보가 있고, SAT성적도 받쳐주는 학생은 빈곤층임에도 명문대에 당당하게 입학한다.(멋있다!) 두 번째, 내신 성적이 높아 입학시험선택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학생(입학시험선택제란 간단하게 말해서 SAT성적을 아예 보지 않고, 내신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뽑는 제도다.)

그러나, 이들을 심사하는 입학사정관들은

 

1. 대학의 등록금 수입이란 요구

2. SAT/ACT 입학시험의 영향력, 가계소득과 입학시험의 분명한 상관관계(SAT성적이 높으면 가계소득이 높을 확률이 높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저소득/상위권 보다 고소득/중하위권 학생을 선호한다.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아마도) 밑에 순환을 봐보자.

 

대학이 학생에게 많은 비용 투자(하기 위해선)-> 등록금 수입 증가(해야함) -> (이를 위해선)부유층 학생 증가(해야함) -> US뉴스 대학순위 오름

 

, US 뉴스 대학 순위를 올리기 위해선 부유층 학생을 입학시켜야하며, 이들이 입학하면 등록금 수입이 증가한다. 그렇게 되면 대학이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비용을 투자할 수 있다. 높은 입결과, 대학이 학생에게 투자하는 비용이 US 뉴스 대학 순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의 수지타산과 US 뉴스 대학 순위로 인해, 입학시험선택제에 합격할 수준의 내신이 되어도 모든 빈곤층 학생을 입학 시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차저차해서, 입학시험선택제로 빈곤층 학생이 명문대에 입학했다고 치자. 자 이제, "빈곤층 자녀가 명문대에 힘겹게 입학하고 졸업까지 성공적으로 하여 사회이동을 이뤘답니다~" 하는 성공신화이자 아름다운 동화같은 결말을 바란다면, 이는 크나큰 오해다. 명문대에 입학하는 대부분의 학생은 부유층에 속하거나, 중산층 이상이며, 백인 혹은 아시아계 학생이다. 빈곤층, 흑인 혹은 라틴계 학생은 극소수에 이른다. 명문대에서 주를 이루는 백인 문화와 부유층의 소비 습관은 흑인/라틴계, 빈곤층 학생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또한, 생계가 불안정한 빈곤층 학생은 학업에만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한다. 이는 졸업률을 통해 증명된다. 부모의 소득 수준이 졸업률에도 인구통계학적 집단 별로 영향을 미친다. 학교 생활에서 소속감을 얻지 못하는 빈곤층 학생은 휴학하는 경우가 잦다. 그에 반해 열심히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방학마다 별장으로 쉬러 가는 부유층 학생에게 휴학? 글쎄, 목적이 다를 것이다.

 

우린 이제 빈곤층 학생은 입학 후에도 관리가 필요하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몇몇 미국 대학은 개인적으로 학생을 관리하고, 수업에 따라올 수 있도록 보충수업을 펼치는 등 다양한 이론적/심리적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대학은 신입생 중 빈곤층의 비율을 늘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졸업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의무가 있다. 사실상 빈곤층의 신입생 비율보단, 빈곤층의 졸업률이 해당 대학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판가름하는 지표다.

 

이제 다른 논의로 넘어가보자. 대중과 사회는 대학을 어떤 기관으로 인식할까? 몇몇 대중은 대학이란 그저 학문을 배우는 곳이며 나약한 밀레니엄이 의지하는 곳이라고 인식한다. 이들은 대학에 입학하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이 많다고 생각한다.(물론 맞긴하다.) 예를 들어 용접과 같은 기술을 한 번 배우면 평생 고액의 연봉으로 살 수 있으니 굳이 대학을 가려고 아둥대지 말고, 기술을 배워봐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은 대학과 기술을 대척점에 놓고 이야기한다. 용접과 같은 기술 역시 이론이 있어야하며, 대학에서도 이와 같은 기술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제 반대로 가보자. "대학은 학문을 배우러 가는 곳이지 돈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라는 의견. 어떤가? 필자는 이는 꽉 막힌 의견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모두가 대학에 갈 필요는 없으며, 본인이 원하는 직업이 대학졸업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 가는 게 맞다.)대학졸업장의 가치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대학졸업자와 고등학교 졸업자의 연봉 차이는 실재한다. 이를 '대졸 임금 프리미엄'이라 칭한다. 고학력자가 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단순히 경제 논리에 입각한 사실일뿐이다. 또한, 단순히 경제논리에 입각한 사실이기에, 청년들이 대학교에 들어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대학이 협력할 필요가 있다.

대학 입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맞다. 이는 인생의 특별한 관문을 읽기 전에도 알았을 것이며, 읽고 나선 더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저 "대학 입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래!"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가치는 미국 대학 입시의 사례를 통해 한국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9 청소년 통계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2018년 고등학교 졸업자의 대학 진학률은 69.7%이다. 또한, 10년째 대학 진학률 OECD 1위를 달리고 있다. 한 반에 30명이 있다고 치면, 그중 21명이 졸업 후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너무 많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인생의 특별한 관문에서 미국은 대학생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한국과는 상반되는 입장이다. 한국과 미국의 입시는 비슷하지만, 기본적으로 국가가 다르다. 두 나라 모두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떨어졌지만, 한국은 미국보다 더하다. 한국은 대학 졸업자 공급이 수요에 비해 너무나도 많다. 따라서 한국은 인생의 특별한 관문에서 제시한, "보다 많은 이들이 대학교를 가야 한다"라는 처방전이 안 맞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청년층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드는 만큼, "공교육이 활성화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회구성원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해당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것이다."라는 전제는 가지되, 해당 전제를 초등~고등학교 과정에서 해결 지어야할 것이다. 적어도, 대학 진학을 독려하는 건 현명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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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도시, 서울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미궁에 대한 탐색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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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는 건 결국 '이 선은 넘어오지 마'라는 그런 상징이잖아요.”

 

착취도시, 서울은 영화 <기생충>의 현장보고서라 부르기 충분하다. 이 책에선 주거를 바탕으로 착취받는 주거빈곤층이 처한 구조의 문제를 고발한 한국일보 이혜미 기자의 <지옥고 아래 쪽방>, <대학가 신쪽방촌> 보도에 대한 뒷이야기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전제조건은 '의식주'이다. 이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삼각형은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주거빈곤에 처한 이들은 ''를 잃은 위태로운 상태이기에 나머지 '의식'마저 잃게 되었다.

 

1부인 지옥고 아래 쪽방에선 쪽방에서 거주하는 주거빈민층이 겪는 문제와 쪽방의 실소유주가 행하는 부조리함을 다룬다.

 

쪽방은 서울 아파트 평당 월세의 4배나 되는 월세를 내야하면서도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지 못하며, 제대로 된 집으로써의 구실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쪽방에 사는 이들이 존재한다. 어째서 이들은 쪽방에서 살게 되었으며, 늪과 같은 쪽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쪽방은 보증금 없이도 입주할 수 있으며, 번거로운 계약 절차 없이 월세만 내면 거주할 수 있다.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이들을 품어줄 유일한 공간인 셈이다. 쪽방에 사는 이들은 노숙을 면하기 위해 쪽방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꿈꿀 틈도 없이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데에도 빠듯하다.

이와 같은 쪽방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과연 맞는 생각이다. 자연스레 쪽방을 없애면 주거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명쾌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허나, 쪽방이 없어진다고 주거빈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쪽방은 주거 난민을 노숙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쪽방을 비롯한 취약주거공간에 거주하는 이들은 노숙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쪽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 쪽방이 사라진다면 거주민들은 길거리에 내몰리게 된다. 쪽방을 없애기 전에, 쪽방 거주민들이 노숙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한다. 이는 기사나 보도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허나, 언론에서 쪽방과 같은 주거빈곤문제를 다루어 사회적 담론으로 이끌어낸다면 쪽방이 노숙으로부터의 방파제 역할을 도맡고 있는 고장난 현실을 고발하여, 이를 고치기 위한 진단이나마 가능할 것이다.

쪽방의 순기능으론 유연한 계약, 보증금 없음과 이후, 더 나은 월세방 혹은 임대주택 신청자격획득과 같은 주거상향의 여지가 있다. 허나, 주거상향은 그저 이..상 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임대주택 보증금을 낼 여력이 없기에 쪽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쪽방에서 산다는 것은 주거상향은 커녕, 현재의 삶 유지조차 어려우며, 탈출은 꿈과 같은 것이다. 쪽방에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어려운데, 임대주택 보증금 마련이 말이나 될까. 결국 쪽방에의 삶은 주거상향이 아닌,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쪽방에 사는 대부분의 거주민은 사회적취약계층에 속한다. 허나, 이 중에서도 더 심각한 위험에 내몰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과 여성이다. 쪽방에 사는 이들이 월세와 생활비 걱정을 한다면 장애인은 거동 자체에 불편을 겪고 경제활동의 경계로부터 차단된다. 또한, 여성은 삶 자체를 위협받는다.

쪽방 관리인/실소요주는 장애인의 기초생활수급비, 장애인연금, 주거급여를 약탈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의 입주를 선호한다. 또한, 눈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며 진단서가 있는 장애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오랜 거리생활로 인해 진단서 조차 없는 경우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저 이웃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쪽방으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사각지대에 내몰리는 것이다.

쪽방 거주민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남성과 여성의 거주지가 구별되지 않는 공간에서 홀로 지내게 되는 여성에게 쪽방은 집으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며, 화장실 마저 남성과 함께 쓰는 처지에 놓인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며 쪽방 생활을 이어간다.

필자는 '빈곤비즈니스'라는 말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허나, 이 합성어만큼 착취를 잘 드러내는 단어는 없다.

쪽방의 실소유주들은 대를 이어가며 빈곤비즈니스를 이어간다. 이들이 대대로 빈곤비즈니스를 이어나가는 이유는 안정적인 수입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와 다르게 쪽방투기는 수입이 보장된다. 시설을 따로 보수 점검할 필요가 없기에 추가 지출이 없으며, 민원이 들어오면 지자체에서 직접 소화기를 설치해주고 시설 점검을 해주기 때문에 무상으로 자산가치증식도 가능하다. 쪽방 입주는 별다른 계약이 없으며 보증금 마저 받지 않기에 실소유주가 건물 이용 수단을 바꾸기로 결정하면 언제든지 세입자들을 내쫓아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월세를 현금으로 받기에 실소유자는 임대수익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탈세도 가능하며 안정적인 수입원인 쪽방사업은 최고의 노후대비수단이 것이다.

 

또 남자들이다보니 가난해도 청량리에 가끔 여자랑 '몸을 풀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p.91

해당 문장을 보고 든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연민? 분노? 역겨움? 아마 이 셋 중 하나이거나 모두일 거라 생각한다. 쪽방 거주민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와 주거급여를 받는다. 돈을 쪼개고쪼개서 써도 생활비가 모자를 판국에 성매매를 할 돈은 있다니, 참 어이가 없다. 물론 돈이 많든, 적든 성매매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몸을 풀러'가는 행위엔 더 큰 적대감이 든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몇 명의 몰상식한 이들이 쪽방 거주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부정적으로 물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쪽방의 주거빈곤문제가 기사화된 후, 이에 대한 정책이 나왔지만, '아동 등~'의 등에 머물렀다. 명칭이 이렇게 된 이유가 국민반대최소화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아직 한국은 빈자에 대한 시선이 달갑지 않으며, 빈자에 대한 정책에 쓰이는 세금을 아깝게 여기는 형국이다.

 

앞서 말했듯이 쪽방을 강제로 철거/폐쇄하는 방안은 쪽방주거민들을 노숙이란 벼랑으로 내몰 위험이 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에선 쪽방을 입에 올리지만 근본적 문제에 대해선 알지 못하거나 모른 쇠로 일관한다. 또한, 지자체는 집주인이 해야할 각종 안전시설물 설치를 대신 수행한다. 이는 모두 국민의 세금이기에 결과적으로 세금이 집주인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쪽방 주거민의 주거급여 -> 실소유주에게 흘러가는 형국)

이처럼 정부에서 쪽방을 보수 점검해주는 정책은 일시적인 봉합에 불과하다. 쪽방 거주민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정부에서 공공쪽방을 공급해야할 것이다.

 

2대학가 신쪽방촌에서 저자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쪽방에 내몰린 청년들의 주거빈곤을 고발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청년은 사회에 던져지는 순간 사회적 약자가 된다.

 

"공공이 나서서 5평 임대주택을 만듦으로써, 임대업자들에게도 점점 더 작은 원룸을 공급해도 된다는 빌미를 줬다" p.130

이처럼 정부의 5평 임대주택 사업은 임대업자들에게도 원룸의 규모를 줄여도 된다는 합리성을 줄 염려가 있다. 이와 동시에 가난의 경계로 인해 진입조차 불가능했던 역세권을 청년들에게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허나, 이미 주택 소유주들은 34평 규모의 원룸을 불법으로 짓고, 공급하고, 버젓이 월세를 받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5평 임대주택 사업을 실시하여 청년들에게 저렴한 보증금과 월세의 원룸을 제공한다면, 청년들은 기존 임대업자가 제공하던 보잘 것 없는 원룸이 아닌, 보다 넓고 저렴한, 사람이 살만한 원룸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학가가 쪽방촌으로 변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임대업자들과 결탁한 정치인, 기숙사와 행복주택을 반대하는 이들이 존재함에 있다. 정치권, 대학, 기성세대, 법과 정책 중 어느 하나도 청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생계유지의 목적이 아닌, 사업형식으로 임대사업을 하는 이들은 비어있는 방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청년을 착취하여 얻는 얄팍한 수익을 위해 데모를 일으키면서까지 대학 기숙사를 반대한다. 이들의 기숙사신축이 지역생태계를 망친다는 논리는, 의사의 정당한 치료를 거부하는 보호자와 다름없다. 환자도 아닌 보호자 말이다.

대학정원은 점차 줄고, 기숙사의 수용인원은 한계가 있기에 대학은 외국인 유학생을 늘림으로써 구멍을 메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학이 기숙사를 신축하려 하면 임대업자들은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에 기숙사 신축을 반대하고 자신의 임대업이 사업이 아닌, 생계를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대학생과의 갈등을 심화한다.

또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불법쪼개기를 주택 실소유주에게 추천하며 컨설팅까지 해준다. 불법쪼개기로 완성된 원룸을 비싼 월세 받고 임대해주는 실소유자들, 이를 중개하며 수수료를 받아 먹는 부동산 중개업자 모두 청년들을 주거빈곤으로 내모는 장본인이다.

원룸 불법쪼개기로 보다 많은 임대수익을 올리게 된 실소유주들은 해당 주택이 불법임이 적발 되었음에도 이행강제금보다 임대수익이 많기에 시정하지 않는다. 최근에야 부과 횟수가 5회에서 무제한으로 바뀌었다지만, 과연 불법쪼개기 영업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이러한 청년주거 문제는 '세대 갈등'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서울로의 쏠림'현상을 가속화하여 서울/비서울 출신의 구분짓기를 심화한다.

요즘 것들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 불효막심한 것들이라고 평하는 몇몇의 기성세대가 존재한다. 이럴 때 청년은 말한다. 집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할 것이며, 어디서 아이를 키워야하는가? 청년에게 결혼과 출산, 재생산을 요구하려면 청년의 주거빈곤 문제부터 해결해야할 것이다.

아무리 대학생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집에 잘 있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주거권은 지켜져야 한다. 위에 나온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을 과연 본인의 자식, 손자에게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문제는 잘못된 집을 지은 임대업자와 이를 팔기 위해 양심까지 팔아버린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있는데, 왜 도망가고 손해보는 이는 세입자가 되는 것일까. 경험의 우위를 바탕으로 청년을 착취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을까. 정작 원룸에서 사는 세입자가 갖게 되는 계획과 이상은 소박하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집, 평균적인 집으로의 회귀였다.

책에서 신쪽방에 사는 대학생은 자신의 가능성을 이유로 현재 주변에 적나라하게 있는 불공정함을 외면한다. 자신이 여기에 머무는 이유는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함이며, 가난하기에 원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청년은 단지 대학생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와 같이 명문대생은 원룸에서의 생활을 대학졸업장이란 밝은 미래로 버티기도 한다. , 탈출할 수 있는 희망과 여지가 존재한다. 허나, 지방에서 올라온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을 하는 청년이 쪽방 탈출을 꿈꾸기란 어렵다.

 

청년에게 젊음은 마냥 좋은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젊기에 고생해도 되고, 젊기에 견뎌야한다는 인식은 청년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가둔다. 어째서 빛나기에도 모자른 청춘이 가난해도 되는 전제가 된 것이며, 청년들을 구속하는 명제가 된 것일까.

청년의 주거빈곤 정책은 홈리스 노인, 쪽방촌의 노인들보다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젊음과 노동가능이란 점에 있다. 기성세대는 끊임없이 청년에게 미래는 나아질 것이란 환상과 희망을 심어준다. 이는 청년 스스로도 현재의 가난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청년은 나아질 것이란 환상에 갇혀 본인에게 가해지는 불공정함을 못본 체한다. 사회는 청년이 지닌 '서울에서의 상승 욕망'을 인질로 그들을 착취한다.

 

오늘날 청년은 평균을 꿈꾼다. 어쩌면 '소확행' 의식 구조가 성행했던 이유는 청년의 기본욕구기준을 낮춘 구조 덕분이 아닐까싶다. 작은 것이 아니면 행복을 취할 수 없게 되어버린 구조 덕분인 것이다.

 

* 의문점

 

필자는착취도시, 서울과 한국일보의 <지옥고 아래 쪽방>, <대학가 신쪽방촌> 기획 기사를 읽고난 후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다.

 

1. 쪽방촌에 사는 취약노인층과 원룸에 사는 청년들 모두 '표가 되지 않는' 계층이기에 주거빈곤층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고, 정치권에서 이슈되지 않으며 사회적담론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2. 기숙사형 공공쪽방을 제공하려면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분류와 대책 역시 필요하다. 공공쪽방 부지선정은 정부 혹은 민간사업자를 통해 진행할텐데 매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장애인과 여성에게 각각 다른 방을 제공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되는가?

 

3. 주거급여를 올려 기존의 쪽방을 도태하는 방법이 현실적인지, 또한 주거급여상승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2, 3번째에서 비용에 대한 물음을 가진 것은 빈자들에 대한 정책에 쓰이는 비용을 사회가 흔쾌히 허락할지에 대한 불확신으로부터 나왔다.

 

* 마무리

 

필자는 2년간 원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으며, 착취도시, 서울에서 말하는 청년에 포함된다. 처음 집을 알아보러 갔을 때, 부동산 중개업자가 소개해준 몇몇의 집은 신축에 풀옵션이었기에 그럴듯했다. 건물 외관도 깔끔하고, cctv도 설치되어있었다. 허나, 절대 사람이 살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개업자는 신축이니, 풀옵션이니하며 좁은 원룸을 포장하려했다. 당시 나는 중개업자에게 '그쪽은 여기서 살 수 있어요? 이거 팔면 양심에 안 찔려요?'라고 묻고 싶었다. 이처럼 주거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이며, 사회에 놓인 청년이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라 여기게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가능성이라는 예측불허한 미래를 담보로 청년을 착취하는 행위는 규탄받아야 하며, 착취도시, 서울은 이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또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거빈곤에 처한 청년의 궁함을 알리고 쪽방에서 지내는 이들의 인터뷰는 공감에 탄력을 불어넣었다.

당장 필자의 주변에서 작은 원룸에 갇힌 채로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이 체화된다. 주거빈곤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며,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넘어서서 사회의 문제란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주거빈곤문제는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문제이자, 해당 집단에 속해 착취의 근저에 자리한 세대로서 필히 가져야할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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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먹어라 - 미친 듯이 웃긴 인도 요리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현수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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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먹는 행위는 인간다운 삶에 기둥이 되는 의..주에 당당히 속해 있다. 그만큼 먹는 행위는 일상 자체가 되며 행복과도 직결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현실의 고민이 사라지기도 하며 음식 본연의 맛을 초월하여,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해주기도 한다!그리고 여기, 근사한 음식을 먹을 때 인생의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바로먹고 기도하고 먹어라의 저자 마이클 부스다.

 

필자는 인도하면 단 두 가지가 떠오른다.코를 찌르는 향신료가 가미된 요리, 그리고 장소에 개의치 않고 요가하는 이들.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엔 음식과 요가, 모두가 아우러져 있다! ,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인도 음식기행이자 요가예찬서다!

 

저자는 아내와 두 아이로 된 가정을 이루고 있는, 39세의 아저씨다. 갱년기에 가까워지는 것인지, 신체의 노화를 부정하고 싶은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아무튼, 저자는 갈수록 아내 리센에게 히스테리를 부린다. 술을 갈 때(?)까지 마시고 잘나가는 작가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하염없이 우울해한다.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내 리센은 그에게 인도 여행을 제안한다. 가족 모두가 함께 가는!!! 낭만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인도란 말을 듣고 갖가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떠올린다. 그리곤 출판사에게 인도 음식에 대한 글을 써오겠다고 다짐하고 여행을 떠난다. 필자는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을 읽으며 영국인이 인도로 여행을 간다는 점, 저자가 음식에 광적으로 열광한다는 점. 이 두 가지가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또한, 저자의 자조적인 말투와 찰진 비유는 읽는 이로 하여금, 독서 내내 유쾌하게 만들었다!!!

인도는 BRICS에 속해있으며, 인구와 국토 면적을 바탕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는 국가다. 하나, 실제 인도를 이방인으로서 가게 된다면, 빈곤과 위생의 실체를 맞닥뜨리고 경악한다고들 말한다. 저자 역시 인도를 처음 갔을 당시, 손소독제를 12병이나 챙겨가며, 연줄 없는 현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어쩌면 당연한 경계심이겠지만 저자는 유독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러한 저자가 여행을 통해 변해간다. 어쩌면,먹고 기도하고 먹어라을 저자의 성장스토리(?)라고 칭하는 것도 문제없을 정도다!

읽는 내내 인도 음식에 대한 먹음직스러운 평가가 함께한다. 향이 강한 음식을 못 먹는 필자조차 기꺼이 먹고 싶을 정도이다.이성주의자, 무신론자, 알코올 의존증, 과도한 걱정 등등, 저자의 이러한 면면들은 읽는 이의 속을 들끓고 주먹이 꼬옥~쥐어지게끔 한다.그럼에도 현명한 아내 리센의 언행과 요가를 통해 점차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저자의 인도에 대한 인식은괜스레 뿌듯한 미소를 짓게 한다.

 

'죽음은 삶에 열정을 더해주는 양념일 뿐이다.' p.352

힌두교와 요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연상케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자가 강렬한 삶을 산다." ...문득 철학 수업 때 배운 얕은 지식이 생각났다!

 

나이 든 사람들은 더 이상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종교로 회귀하죠.. ”p.416

이 부분은 살짝 공감되는 말이었다. 필자의 할머니께선 교회를 열심히 다니신다. TMI. 새벽 기도도 매일 가시고...찬송가도 집에서 부르시고...아무튼.

 

행복은 의지가 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포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로 불러낼 수도 없다. p.435

저자는 인도에서 배운 요가를 통해 알코올과 타협을 보고, 정상 범주의 가정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또한, 책의 막바지에 와서, 저자가 행복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의 행복에 대한 철학은 필자의 행복 철학과 똑같았다. 행복이란 것은 내가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다. 행복을 맹목적으로 좇는다면, 행복이 곁들여지지 않게 되는 순간 무너지게 될 것이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사소한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자는, 아마도 곰돌이 푸가 했던 말일 것이다.

 

인도란 나라는 참 매력적이다.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가지가 공존하며, 강렬하고 특색 있는 음식이 즐비하다. 저자의 인도 여행의 첫 목적은 음식이었겠지만, 종교의 다양성과 요가를 통한 내면의 가꿈을 경험하며 인생의 새로운 가도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책을 통한 간접경험만으로도 체화되는 평온함이 존재했다. 한편의 거대 서사와 같은 39세 아저씨의 인도 여행기이자 성장 스토리인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덕분에 왠지 모르는 훈훈함이 낭랑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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