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도시, 서울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미궁에 대한 탐색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이라는 건 결국 '이 선은 넘어오지 마'라는 그런 상징이잖아요.”

 

착취도시, 서울은 영화 <기생충>의 현장보고서라 부르기 충분하다. 이 책에선 주거를 바탕으로 착취받는 주거빈곤층이 처한 구조의 문제를 고발한 한국일보 이혜미 기자의 <지옥고 아래 쪽방>, <대학가 신쪽방촌> 보도에 대한 뒷이야기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전제조건은 '의식주'이다. 이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삼각형은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주거빈곤에 처한 이들은 ''를 잃은 위태로운 상태이기에 나머지 '의식'마저 잃게 되었다.

 

1부인 지옥고 아래 쪽방에선 쪽방에서 거주하는 주거빈민층이 겪는 문제와 쪽방의 실소유주가 행하는 부조리함을 다룬다.

 

쪽방은 서울 아파트 평당 월세의 4배나 되는 월세를 내야하면서도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지 못하며, 제대로 된 집으로써의 구실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쪽방에 사는 이들이 존재한다. 어째서 이들은 쪽방에서 살게 되었으며, 늪과 같은 쪽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쪽방은 보증금 없이도 입주할 수 있으며, 번거로운 계약 절차 없이 월세만 내면 거주할 수 있다.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이들을 품어줄 유일한 공간인 셈이다. 쪽방에 사는 이들은 노숙을 면하기 위해 쪽방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꿈꿀 틈도 없이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데에도 빠듯하다.

이와 같은 쪽방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과연 맞는 생각이다. 자연스레 쪽방을 없애면 주거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명쾌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허나, 쪽방이 없어진다고 주거빈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쪽방은 주거 난민을 노숙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쪽방을 비롯한 취약주거공간에 거주하는 이들은 노숙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쪽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 쪽방이 사라진다면 거주민들은 길거리에 내몰리게 된다. 쪽방을 없애기 전에, 쪽방 거주민들이 노숙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한다. 이는 기사나 보도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허나, 언론에서 쪽방과 같은 주거빈곤문제를 다루어 사회적 담론으로 이끌어낸다면 쪽방이 노숙으로부터의 방파제 역할을 도맡고 있는 고장난 현실을 고발하여, 이를 고치기 위한 진단이나마 가능할 것이다.

쪽방의 순기능으론 유연한 계약, 보증금 없음과 이후, 더 나은 월세방 혹은 임대주택 신청자격획득과 같은 주거상향의 여지가 있다. 허나, 주거상향은 그저 이..상 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임대주택 보증금을 낼 여력이 없기에 쪽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쪽방에서 산다는 것은 주거상향은 커녕, 현재의 삶 유지조차 어려우며, 탈출은 꿈과 같은 것이다. 쪽방에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어려운데, 임대주택 보증금 마련이 말이나 될까. 결국 쪽방에의 삶은 주거상향이 아닌,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쪽방에 사는 대부분의 거주민은 사회적취약계층에 속한다. 허나, 이 중에서도 더 심각한 위험에 내몰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과 여성이다. 쪽방에 사는 이들이 월세와 생활비 걱정을 한다면 장애인은 거동 자체에 불편을 겪고 경제활동의 경계로부터 차단된다. 또한, 여성은 삶 자체를 위협받는다.

쪽방 관리인/실소요주는 장애인의 기초생활수급비, 장애인연금, 주거급여를 약탈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의 입주를 선호한다. 또한, 눈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며 진단서가 있는 장애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오랜 거리생활로 인해 진단서 조차 없는 경우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저 이웃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쪽방으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사각지대에 내몰리는 것이다.

쪽방 거주민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남성과 여성의 거주지가 구별되지 않는 공간에서 홀로 지내게 되는 여성에게 쪽방은 집으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며, 화장실 마저 남성과 함께 쓰는 처지에 놓인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며 쪽방 생활을 이어간다.

필자는 '빈곤비즈니스'라는 말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허나, 이 합성어만큼 착취를 잘 드러내는 단어는 없다.

쪽방의 실소유주들은 대를 이어가며 빈곤비즈니스를 이어간다. 이들이 대대로 빈곤비즈니스를 이어나가는 이유는 안정적인 수입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와 다르게 쪽방투기는 수입이 보장된다. 시설을 따로 보수 점검할 필요가 없기에 추가 지출이 없으며, 민원이 들어오면 지자체에서 직접 소화기를 설치해주고 시설 점검을 해주기 때문에 무상으로 자산가치증식도 가능하다. 쪽방 입주는 별다른 계약이 없으며 보증금 마저 받지 않기에 실소유주가 건물 이용 수단을 바꾸기로 결정하면 언제든지 세입자들을 내쫓아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월세를 현금으로 받기에 실소유자는 임대수익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탈세도 가능하며 안정적인 수입원인 쪽방사업은 최고의 노후대비수단이 것이다.

 

또 남자들이다보니 가난해도 청량리에 가끔 여자랑 '몸을 풀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p.91

해당 문장을 보고 든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연민? 분노? 역겨움? 아마 이 셋 중 하나이거나 모두일 거라 생각한다. 쪽방 거주민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와 주거급여를 받는다. 돈을 쪼개고쪼개서 써도 생활비가 모자를 판국에 성매매를 할 돈은 있다니, 참 어이가 없다. 물론 돈이 많든, 적든 성매매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몸을 풀러'가는 행위엔 더 큰 적대감이 든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몇 명의 몰상식한 이들이 쪽방 거주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부정적으로 물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쪽방의 주거빈곤문제가 기사화된 후, 이에 대한 정책이 나왔지만, '아동 등~'의 등에 머물렀다. 명칭이 이렇게 된 이유가 국민반대최소화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아직 한국은 빈자에 대한 시선이 달갑지 않으며, 빈자에 대한 정책에 쓰이는 세금을 아깝게 여기는 형국이다.

 

앞서 말했듯이 쪽방을 강제로 철거/폐쇄하는 방안은 쪽방주거민들을 노숙이란 벼랑으로 내몰 위험이 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에선 쪽방을 입에 올리지만 근본적 문제에 대해선 알지 못하거나 모른 쇠로 일관한다. 또한, 지자체는 집주인이 해야할 각종 안전시설물 설치를 대신 수행한다. 이는 모두 국민의 세금이기에 결과적으로 세금이 집주인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쪽방 주거민의 주거급여 -> 실소유주에게 흘러가는 형국)

이처럼 정부에서 쪽방을 보수 점검해주는 정책은 일시적인 봉합에 불과하다. 쪽방 거주민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정부에서 공공쪽방을 공급해야할 것이다.

 

2대학가 신쪽방촌에서 저자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쪽방에 내몰린 청년들의 주거빈곤을 고발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청년은 사회에 던져지는 순간 사회적 약자가 된다.

 

"공공이 나서서 5평 임대주택을 만듦으로써, 임대업자들에게도 점점 더 작은 원룸을 공급해도 된다는 빌미를 줬다" p.130

이처럼 정부의 5평 임대주택 사업은 임대업자들에게도 원룸의 규모를 줄여도 된다는 합리성을 줄 염려가 있다. 이와 동시에 가난의 경계로 인해 진입조차 불가능했던 역세권을 청년들에게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허나, 이미 주택 소유주들은 34평 규모의 원룸을 불법으로 짓고, 공급하고, 버젓이 월세를 받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5평 임대주택 사업을 실시하여 청년들에게 저렴한 보증금과 월세의 원룸을 제공한다면, 청년들은 기존 임대업자가 제공하던 보잘 것 없는 원룸이 아닌, 보다 넓고 저렴한, 사람이 살만한 원룸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학가가 쪽방촌으로 변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임대업자들과 결탁한 정치인, 기숙사와 행복주택을 반대하는 이들이 존재함에 있다. 정치권, 대학, 기성세대, 법과 정책 중 어느 하나도 청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생계유지의 목적이 아닌, 사업형식으로 임대사업을 하는 이들은 비어있는 방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청년을 착취하여 얻는 얄팍한 수익을 위해 데모를 일으키면서까지 대학 기숙사를 반대한다. 이들의 기숙사신축이 지역생태계를 망친다는 논리는, 의사의 정당한 치료를 거부하는 보호자와 다름없다. 환자도 아닌 보호자 말이다.

대학정원은 점차 줄고, 기숙사의 수용인원은 한계가 있기에 대학은 외국인 유학생을 늘림으로써 구멍을 메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학이 기숙사를 신축하려 하면 임대업자들은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에 기숙사 신축을 반대하고 자신의 임대업이 사업이 아닌, 생계를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대학생과의 갈등을 심화한다.

또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불법쪼개기를 주택 실소유주에게 추천하며 컨설팅까지 해준다. 불법쪼개기로 완성된 원룸을 비싼 월세 받고 임대해주는 실소유자들, 이를 중개하며 수수료를 받아 먹는 부동산 중개업자 모두 청년들을 주거빈곤으로 내모는 장본인이다.

원룸 불법쪼개기로 보다 많은 임대수익을 올리게 된 실소유주들은 해당 주택이 불법임이 적발 되었음에도 이행강제금보다 임대수익이 많기에 시정하지 않는다. 최근에야 부과 횟수가 5회에서 무제한으로 바뀌었다지만, 과연 불법쪼개기 영업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이러한 청년주거 문제는 '세대 갈등'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서울로의 쏠림'현상을 가속화하여 서울/비서울 출신의 구분짓기를 심화한다.

요즘 것들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 불효막심한 것들이라고 평하는 몇몇의 기성세대가 존재한다. 이럴 때 청년은 말한다. 집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할 것이며, 어디서 아이를 키워야하는가? 청년에게 결혼과 출산, 재생산을 요구하려면 청년의 주거빈곤 문제부터 해결해야할 것이다.

아무리 대학생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집에 잘 있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주거권은 지켜져야 한다. 위에 나온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을 과연 본인의 자식, 손자에게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문제는 잘못된 집을 지은 임대업자와 이를 팔기 위해 양심까지 팔아버린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있는데, 왜 도망가고 손해보는 이는 세입자가 되는 것일까. 경험의 우위를 바탕으로 청년을 착취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을까. 정작 원룸에서 사는 세입자가 갖게 되는 계획과 이상은 소박하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집, 평균적인 집으로의 회귀였다.

책에서 신쪽방에 사는 대학생은 자신의 가능성을 이유로 현재 주변에 적나라하게 있는 불공정함을 외면한다. 자신이 여기에 머무는 이유는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함이며, 가난하기에 원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청년은 단지 대학생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와 같이 명문대생은 원룸에서의 생활을 대학졸업장이란 밝은 미래로 버티기도 한다. , 탈출할 수 있는 희망과 여지가 존재한다. 허나, 지방에서 올라온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을 하는 청년이 쪽방 탈출을 꿈꾸기란 어렵다.

 

청년에게 젊음은 마냥 좋은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젊기에 고생해도 되고, 젊기에 견뎌야한다는 인식은 청년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가둔다. 어째서 빛나기에도 모자른 청춘이 가난해도 되는 전제가 된 것이며, 청년들을 구속하는 명제가 된 것일까.

청년의 주거빈곤 정책은 홈리스 노인, 쪽방촌의 노인들보다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젊음과 노동가능이란 점에 있다. 기성세대는 끊임없이 청년에게 미래는 나아질 것이란 환상과 희망을 심어준다. 이는 청년 스스로도 현재의 가난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청년은 나아질 것이란 환상에 갇혀 본인에게 가해지는 불공정함을 못본 체한다. 사회는 청년이 지닌 '서울에서의 상승 욕망'을 인질로 그들을 착취한다.

 

오늘날 청년은 평균을 꿈꾼다. 어쩌면 '소확행' 의식 구조가 성행했던 이유는 청년의 기본욕구기준을 낮춘 구조 덕분이 아닐까싶다. 작은 것이 아니면 행복을 취할 수 없게 되어버린 구조 덕분인 것이다.

 

* 의문점

 

필자는착취도시, 서울과 한국일보의 <지옥고 아래 쪽방>, <대학가 신쪽방촌> 기획 기사를 읽고난 후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다.

 

1. 쪽방촌에 사는 취약노인층과 원룸에 사는 청년들 모두 '표가 되지 않는' 계층이기에 주거빈곤층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고, 정치권에서 이슈되지 않으며 사회적담론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2. 기숙사형 공공쪽방을 제공하려면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분류와 대책 역시 필요하다. 공공쪽방 부지선정은 정부 혹은 민간사업자를 통해 진행할텐데 매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장애인과 여성에게 각각 다른 방을 제공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되는가?

 

3. 주거급여를 올려 기존의 쪽방을 도태하는 방법이 현실적인지, 또한 주거급여상승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2, 3번째에서 비용에 대한 물음을 가진 것은 빈자들에 대한 정책에 쓰이는 비용을 사회가 흔쾌히 허락할지에 대한 불확신으로부터 나왔다.

 

* 마무리

 

필자는 2년간 원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으며, 착취도시, 서울에서 말하는 청년에 포함된다. 처음 집을 알아보러 갔을 때, 부동산 중개업자가 소개해준 몇몇의 집은 신축에 풀옵션이었기에 그럴듯했다. 건물 외관도 깔끔하고, cctv도 설치되어있었다. 허나, 절대 사람이 살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개업자는 신축이니, 풀옵션이니하며 좁은 원룸을 포장하려했다. 당시 나는 중개업자에게 '그쪽은 여기서 살 수 있어요? 이거 팔면 양심에 안 찔려요?'라고 묻고 싶었다. 이처럼 주거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이며, 사회에 놓인 청년이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라 여기게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가능성이라는 예측불허한 미래를 담보로 청년을 착취하는 행위는 규탄받아야 하며, 착취도시, 서울은 이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또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거빈곤에 처한 청년의 궁함을 알리고 쪽방에서 지내는 이들의 인터뷰는 공감에 탄력을 불어넣었다.

당장 필자의 주변에서 작은 원룸에 갇힌 채로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이 체화된다. 주거빈곤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며,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넘어서서 사회의 문제란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주거빈곤문제는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문제이자, 해당 집단에 속해 착취의 근저에 자리한 세대로서 필히 가져야할 문제의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