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의 마왕 1 - J Novel Next
마지마 분키치 지음, 토요타 사오리 일러스트, 김경훈 옮김 / 서울문화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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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르: 침략전쟁, 수탈, 지배에서 오는 인간의 존엄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물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힘이 없는 애국자, 난세의 시대에 사람들은 영웅을 갈망한다, 그래서 등장한 마왕, 정통 판타지, 이세계물 아님.


표지 설명: 뭔가 북두의 권처럼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작중 세계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스토리: '스노바'라는 나라가 있고, '코핀'이라는 나라가 있다. 둘의 조상은 같다. 근데 스노바는 옆 나라 코핀을 침공한다. 코핀은 매국노들 때문에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왕족과 군대는 몰살 당한다. 스노바의 장군은 코핀을 야만인이라 정의하며 가혹한 통치를 시작한다. 일명 선민사상이다(모르면 검색해보자). 침략전쟁에 있어서 선민사상만큼 골 아픈 것도 없다는 걸 보여준다. 그 예로 스노바 장군은 마지막으로 남은 코핀의 왕족 루키나 왕녀로 하여금 굴욕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이 난세를 극복해줄 영웅은 나타날 것인가. 왕녀를 구하고 나라를 구할 영웅, 대초원 어느 귀퉁이에 머리가 하얀 청년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청년의 집 근처로 이상한 투구를 쓴 여자애가 쫓겨온다. 여기서 마왕의 전설이 시작된다. 마왕? 영웅은?


특징: 힘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기면 장땡이다. 알량한 자존심을 세울 시간이 있으면 망명정부라도 세워라. 입만 산 위정자는 꼴불견이다. 내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죽는다? <- 이게 이 작품의 최대 포인트.


장점: 거대종(거인?)이 있고, 용이 나오는 고대 시절을 바탕으로 하는 대서사시. 밝은 파스텔톤식 판타지가 아니라 고대 시절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지를 배경으로 하는, 하늘이 언제 푸르렀는지도 모를 우중충한 잿빛 세계를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어서 어딘가 몽환적이면서도 세기말적 분위기가 특징이다. 적어도 하렘은 아닌 거 같다. 근데 가능성은 있다. 그중에 유부녀도 포함이다.


단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루키나 왕녀가 불쌍하다.



스포일러 주의



기적은 없다. 영웅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전부 죽어 버렸다. 아버지도 모두, 루키나 왕녀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굴욕을 당해도 교섭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스노바 장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태초에 거대종과 용과 인간의 싸움으로 이 대지는 피폐해지고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해(태양)을 본 지가 1천 년 전이다. 식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사냥감도 통제하며 잡아야 할 만큼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코핀이라는 나라를 침공해서 스노바는 어쩌려고 하는 걸까. 저항은 용서가 되지 않고, 반란의 씨앗이 되는 거라면 아이도 죽이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마치 복수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마냥.


흰머리 청년 '더스트'는 대초원 한 귀퉁이에서 쓰러진 나무 밑동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그는 옛적 마왕이라 불리었던 어떤 인물을 연구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린다. 땅에서는 해골의 손이 쉬고 있다. 어느 날 유적을 연구하던 그에게 낯선 여자애가 쫓겨온다. 머리엔 이상한 투구를 썼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 땅에 어인 일일까. 모험가들에게 쭃겨온 그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 청년 더스트는 마술을 이용해 땅에서 쉬고 있던 해골로 하여금 그녀를 구하게 한다. 이것이 청년 더스트와 왕녀 루키나의 미래를 바꿀 거라는 걸 지금은 몰랐겠지. 여자애의 이름은 '애시'라고 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장점: 혼자서 다 해 먹는 먼치킨은 없다. 그놈의 스테이터스 창도 없다. 마법은 있지만 대규모 술식은 없다. 먼치킨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입에 안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매력이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절망감이 있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정의가 충돌하며 누가 선인지 분간 시키는 묘미가 있다. 사람의 존엄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철학적인 물음이 있다. 가령 '나라를 잃더라고 핍박을 받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다'와 '억압받고 개돼지 취급 당하며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마음마저 박살 내버리는 삶에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있다. 죽더라도 자유를 쟁취할 것이냐. 살아서 굴욕을 당할 것이냐의 물음이 있다. 


왕녀 루키나는 일방적인 선택을 강요 당한다. 굴욕적인 조건이 걸리고 항복을 선서하며 벌레처럼 바닥을 기라고 한다. 저항은 무의미,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오른다. 왕녀인 자신에게 당돌한 진언을 마다하지 않던 머리가 흰 소년을. 그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이 국난을 타개할 비책을 제시했을 것이다. 고대 시절 코핀이라는 나라에는 마왕이라고 불렸단 사내가 있었다. 죽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금단의 마술에 손을 대어 마왕으로 낙인찍히고 추방되었던 사내. 세월이 흘러 그 마왕의 업적을 연구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사상 두 번째 마왕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추방되었다.


흰머리 청년은 '애시'라는 여자애를 만난다. 애시는 용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나라를 찾아와 용의 실물을 보고자 한다. 애시의 부모는 스노바라는 나라에서 용이라는 신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가 처형 당한다. 자신들만의 용이 유일신이라 떠받드는 나라에서 타국의 용신은 이단으로 치부하는 걸 간과한 것이다. 부모의 마지막 업적인 용에 관련된 걸 찾아 애시는 코핀으로 온다. 코핀의 하늘에는 비를 관장하는 용신이 있고, 백성들로부터 숭배받고 있다. 마지막 소원인 것처럼 애시는 거기에 매달린다. 자기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스노바 군은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른다. 애시는 죽다가 살아난다. 그리고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흰머리 청년은 분노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애시는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다.


맺으며, 이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기적은 없다.'를 들 수가 있군요. 희망이 되는 싹은 처음부터 잘려 나갑니다. 지배자에게 있어서 피지배자들에게 절망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죠. 희망의 싹을 없애고, 자신들의 최고 정점인 왕녀로 하여금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게 한다. 그렇게 해서 의지를 꺾는다. 통제에 있어서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루키나 왕녀의 꺾이지 않는 마음은 참 절절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소리만 치는 왕녀가 사실 꼴불견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왕족에 어울리는 근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속칭 바지사장 취급 당하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합니다.


흰머리 청년 '더스트'와 이상한 투구의 '애시'의 관계도 눈여겨볼만합니다. 위기에 처한 애시를 구해주고 이후 줄곧 같이 살면서 애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시는 더스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장면 장면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게 또 이 작품의 묘미가 아닐까 싶었군요. 그러다 난세는 이들에게 손을 뻩치게 되고, 애시가 말려들면서 빡친 더스트가 마왕이 되어 가는... 이 작품은 루키나 왕녀의 시각과 더스트와 애시의 시각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시냇물이 만나 강을 이루듯 이야기를 합쳐지죠. 이걸 절묘하게 역어 가는 작가의 실력이 좋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카타르시스나 큰 흥미를 끌만한 소재는 없는데 치밀한 구성이 이목을 집중시켜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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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 슬레이어 6 - SL Comic
카규 쿠모 지음, 쿠로세 코우스케 그림, 김성래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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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로 대전투도 막바지에 접어듭니다. 단순히 고블린만 있는 줄 알았더니 왜 앨리게이터(악어)가 있고, 고블린 챔피언(맞나 가물하네)이 있냐고요. 고블린 개떼 러시로 계속해서 궁지에 몰리면서도 타개책을 찾아내는 고블린 슬레이어. 이 타개책이라고 내놓은 방법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게, 그와 같이 다니면 목숨이 몇 개나 있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동안 그의 전적은 화려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동굴에서 고블린들을 질식사(내지는 너구리 몰이) 시킨다며 불을 놓는데 이게 팀킬도 될 수 있다는 걸 간과하질 않나. 그래서 엘프녀는 금지 시키죠. 할 수 없이 수몰 시키는데 이것도 팀킬, 엘프녀 이마에 실핏줄이 생깁니다. 이것도 안 되나? 그러면 이번엔 폭파 시킵니다. 엘프녀 이마에 생긴 실핏줄은 터져 버립니다. 뭐, 어쩌라는 건지. 그는 이번엔 새로운 타개책을 내놓아요.


물, 불, 폭파가 안 되면 생매장은 어떤가?


왜? 이번엔 네가 바라는 물, 불, 독, 폭파를 안 썼다만?


너, 웃는 얼굴로 맞아본 적 없지?



스포일러 주의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도시 지하수로에 이만큼이나 되는 고블린 떼가 있는 게 수상쩍습니다. 마신의 수하로 보이는 뭔가(다크엘프)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이 정도 되면 모험가가 아니라 군을 파견해야 함에도 어째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게 누가 손을 썼나? 그래서 검의 처녀에게 따지죠. 애초에 검의 처녀의 의뢰였고, 고블린 몇 마리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저승 갈뻔한 대사건이었던 말이지요. 엘프녀와 여신관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박살 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고. 근데 생각해보면 답은 나와 있었죠. 이전에 검의 처녀가 자신의 과거를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망가진 이유도. 그리고 밤만 되면 도시에서 여자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으니 단순한 고블린 몇 마리의 소행으로 치부하기엔 뭔가가 있었더랬죠.


밝혀지길, 결국은 검의 처녀는 자기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해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채 고블린 슬레이어 파티를 지하수로에 밀어 넣은 것. 사실 검의 처녀는 이 작품에 있어서 안타까운 악녀의 포지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전에서 보면 사람들에게 갈굼 당하고, 여차여차해서 파티를 짜고 모험가를 하다가 고블린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되어 버렸죠.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고블린의 고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게 되었고, 이번에는 자신이 해야 될 일(검의 처녀는 마신을 쓰러트린 실력자이자 금등급)임에도 너라면 날 구해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고블린 슬레이어를 냅다 발로 뻥 차버리곤 시치미를 뚝. 살아돌아온 그에게 고블린을 없애도 나의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소연. 정말 세상 피곤하게 만드는 능력 하난 뛰어난 게 검의 처녀란 말이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모를 테니까.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런 그녀를 다독여주지 않습니다. 상냥한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고블린이 나온다면 없애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검의 처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겠지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무뚝뚝하고 건성건성이었던 고블린 슬레이어가 조금식 변해갑니다. 타인을 칭찬할 줄 알게 되었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게 되었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줄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축제에 같이 가자고 하는 접수원 누님의 말에 예전 같으면 마다했을 그가 긍정의 말을 내놓은 것에서 그의 성격이 많이 둥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군요. 


맺으며, 여신관의 놀라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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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어문 제국 이야기 1 - S Novel+
모치츠키 노조무 지음, Gilse 그림, 현노을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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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굳이 판타지일 필요가 있었나 싶은 판타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착각계, 착각에서 오는 개그, 캐릭터가 귀여운 역하렘 여성향, 권위주의에 빠져살다 단두대에 목이 걸려 죽은 녀의 미래 개혁, ​그냥 보따리 싸서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 엉성한 이야기.


표지 설명: 저리 먹고 살이 안 찐다.


포인트: 캐릭터 일러스트가 귀엽다. 특히 클로에. 


단점: 남자가 읽으면 변태 & 오타쿠(오타쿠는 그나마 양반이 아닐까) 소리 들을 수 있다. 어째서인지 등장인물들 이름 외우기가 힘들다.


스토리: 참회(懺悔)하자. 인생 2회차를 맞은 왕녀가 1회차 때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매우 강한 스포일러 주의, 어찌 된 일인지 글이 어마 무시하게 길어짐. 읽기 싫으신 분은 윗쪽 ↑만 읽으셔도 됩니다.




여긴 티어문 제국, 귀족은 백성들을 괴롭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끼에 일반 직장인의 월급 한 달 치를 쓰든 말든 니들이 뭔 상관이냐. 백성들의 고혈이나 다름없는 세금을 좀 낭비했다고 뭐가 잘못인데. 그러니 돈 좀 낭비하고 심심풀이로 백성들을 좀 괴롭혔다고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전복 시키다니 너무 한거 아닌가 싶다. 황녀 '미아'는 지하 감옥에서 의문에 잠긴다.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어제까지만 해도 난 인싸였는데 말이지. 오늘은 거죽 떼기 하나 걸치고 "돼지도 안 먹는 개사료를 밥이라고 던져주는 간수가 죽도록 밉다(요건 일부 각색)".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하 감옥에서 찬물로 몸을 닦고 죽도록 추운 겨울을 겪으며 드디어 밖으로 나가나 싶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광장에 마련된 단두대.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황월 토마토를 맛이 없다며 남기는 행동이 죄임을 깨달은 것은 먹을 것이 없어진 뒤..."


눈을 떠보니 인생 2회차다. 앞으로 몇 년 뒤에 또다시 단두대가 기다린다. 죽도록 싫다. 개도 안 먹을 죽도록 맛없는 밥도 싫고, 차가운 물로 몸을 닦는 것도 싫고, 한기에 몸이 얼어버릴 거 같은 겨울도 싫다. 더욱 싫은 건 목이 잘리는 것. 이걸 회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를 바꾸면 되는 것.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제국의 과거를 돌아 본다. 거기서 시사하는 건 무엇인가를 발견해내는 거다. 답은 자연스레 떠올려진다. 왕족이라고 아랫사람들을 하대하지 않는다. 세금을 낭비하지 않는다. 역병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지는 걸 막는다. 사람은 잘못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열거해보니 한마디로 쓰레기, 맛없는 황월 토마토를 내놓은 전속 요리사가 미웠다. 지하 감옥에서 먹은 황월 토마토는 전속 요리사가 해준 요리보다 맛이 없었다.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때는 몰랐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상대에겐 상처가 된다는걸. 허투루 쓴 세금이 백성들의 고혈이라는 걸.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서야 깨닫는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그래서 2회차 때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것만이 미래 단두대행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 모두가 떠나버린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켜줬고,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나눠줬던 덜렁이 메이드를 전속 메이드로 삼는다. 끝까지 기울여져가는 제국의 재정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때론 황녀인 자신에게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단 안경잡이도 부하로 거둔다. 이것은 보은이다. 1회차 때 모두가 떠나버린 자신의 곁을 지켜준 것에 대한 소소한 보은. 


이 걸음은 미래를 바꾸기 위한 매우 소중한 첫걸음이다.


....는 너무 진지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작품은 착각을 기반으로 한 개그물이다. 황녀인 '미아'가 미래 단두대를 피하기 위해 자신이 걸었던 길을 되짚어 가며 잘못을 바로 잡아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개그가 되는 건, 황녀 '미아'의 행동이 주변에 오해를 낳고, 그 오해는 부풀려져 그녀를 성녀로 승화 시킨다는 것이다. 미아는 그저 미래에 단두대만 피하면 된다. 그러니 단두대 행에 연결되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속마음을 숨기고 애둘러 말했을 뿐인데 주변은 그걸 확대해석한다. 미래에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인 재정이 빵꾸나는 걸 막아야 한다. 안경잡이에게 제국의 피폐해지는 재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상담하고 재건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는데 이걸 안경잡이는 확대해석해서 그녀야말로 올바른 지도자라며 추켜 세운다. 


그만큼 제국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냥 미아가 단두대를 피하려면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안경잡이는 그녀의 썩은 속마음을 알리가 없다. 그니까 그녀는 애초에 진짜로 제국의 재정을 걱정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걱정하는 것뿐. 문제는 자기가 안 하고 안경잡이에게 일을 떠넘긴다. 1화차 때 안경잡이가 일을 제법 잘 해줬거든사실 단두대 황녀의 인생 1회차 때 벌인 잘못을 반성하여 잘못을 바로 잡아가는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미아가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 행동으로 인해 주변이 오해하고 그녀를 추켜 세운다. 가령 또 이런 일이 있다. 혁명이 일어나는 두 번째 이유가 되는 역병 창궐을 초기에 막고자 행동에 나서는데, 그런 행동이 주변에 어떻게 비칠까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본질은 그녀의 안위지만(주변은 그녀의 속마음을 모른다), 역병을 막아서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일로도 연결이 되니까. 그녀의 본질이야 어떻든 일단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건 틀림이 없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는 게 특징이다. 여기에 지니고 있는 물품까지 내놓으며 재정에 보탬이 되라고 하는데, 이걸 두고 그녀는 거의 성녀급이 되어 버린다. 실상은 그 물품은 버려도 아깝지 않은 물건이다. 그녀의 속은 시커멓다 못해 썩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는 세 번째 이유가 되는 아랫사람 하대하는 걸 당연시 여기는 풍조에서 그녀는 반란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제국의 상위 귀족들은 하급 귀족들이나 평민을 괴롭혀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괴롭힘당하는 어떤 하급 귀족을 구하게 되면서 그녀는 또다시 성녀가 된다.


황녀인 그녀는 상위 귀족들의 정점이다. 당연히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녀는 괴롭힘당하는 하급 귀족을 구해준다. 괴롭힘은 미래 혁명이 일어나는 세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그만큼 제국에서 아랫사람 괴롭힘이 만연하다는 것이고, 황녀가 아랫사람 구해준다는 건 현재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사실은 기껏 아군으로 만들어둔 덜렁이 전속 메이드에게 밑 보이지 않기 위함이라는 타산이 깔려 있는데 주변은 알리가 없다. 지금은 아군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 두어야 하니까. 문제는 지금 구해준 하급 귀족이 미래 혁명을 일으킨 주모자 중 하나라는 것. 일이 참 재미있어진다. 자신을 단두대에 올린 장본인을 구해주게 된 그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거기에 성녀 다운 말까지 내뱉어 놓으니 주모자는 구세주를 넘어 사이비 교주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학원 라이프, 그녀의 미래개혁은 계속된다. 인맥도 많이 만들고, 남친도 만들고... 이럴 바엔 그냥 보따리 싸서 야반도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매우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여 캐릭터들이 귀엽다. 남 캐릭터는 별로다. 성격도 이상하고... 아무튼 노력한다. 근데 복선을 보니 미래는 바뀌지 않을 거 같다.



뜬금없지만, 글이 길어지고 시간도 시간이라서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아직 반도 못 썼는데, 이건 필자의 나쁜 버릇이라고 할까요. 무아지경이 되면 끝도 없이 써 내려갑니다. 장신 차리고 보면 몇 시간이 지나 있고, 글은 오만상 길어져 있고... 이번 티어문은 사실 이렇게 길게 쓸 만큼 작품성이 뛰어난 건 아닙니다. 주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인데요. 이 과정이 역경을 이겨내고 얻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행동을 하다 보니 얻어걸리는 그런 부류죠. 상대가 알아서 착각을 해주니 이쪽은 편하게 일을 처리해 나간다고 할까요. 그래서 딱히 긴장감이 높은 것도 아니고 크게 유쾌한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점수를 주자면 10점 만점에 6점 정도. 점수가 낮은 이유는 인맥을 만들기 위해 이웃 나라 왕자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대목이 억지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군요. 이 작품이 19금이었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몸까지 내놓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영혼 없는 대시는 은근히 짜증을 불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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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탄의 왕과 바나디스 18 - Extreme Novel, 완결
카와구치 츠카사 지음, 요시☆오 캐릭터 디자인, 카타기리 히나타 일러스트, 한신남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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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한 설명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시골 청년 '티글' 구국의 영웅이 되어가는 그 결말 편이 되겠습니다. 시작은 옆 나라와 물 길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지만, 거기서 만난 이웃나라 공녀(바나디스) '에렌'의 협력을 받아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나아가 내란을 일으킨 귀족을 처치하며 만천하에 영웅의 탄생을 알렸죠. 사실은 그저 자신의 영지만 지키면 되는, 남자로 태어나 원대한 꿈을 꿔볼 만도 하겠건만 그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영지를 소중히 하고,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고, 부모님이 그래왔던 것처럼 티글도 그렇게 소박하게 인생을 살려고 했었습니다.


참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사절단으로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 기억 상실증에 걸리기도 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물과도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픈 이별도 겪어야 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녀(바나디스)라는 입장이 되어 영지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히로인의 애절한 마음도 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걸어오길 2년, 간신히 브륀을 안정화 시키고 지스터트로 넘어와 마물 우두머리와 최종전을 펼치기가 무섭게 왕위를 둘러싼 내란이 일어나고 말아요. 좋아하게 된 에렌 등 히로인들이 말려들어 힘들어하게 되자 티글은 또다시 분연히 일어서는 걸 선택하죠.


그리고 에렌의 스승이자 좋은 친구였던 '유젠'의 뜻을 받들어 티글은 지스터트의 새로운 왕이 되고자 합니다.



에렌은 숙적 '피그넬리아'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이루고자 했던 뜻은 비슷하지만 방식이 달라 틀어지게 된 이후 앙숙으로 지내 왔었습니다. 그러다 에렌의 양부가 그녀의 손에 죽게 되면서 철천지 원수가 되어 버렸죠. 피그넬리아는 항상 극단적인 성격으로 이번엔 지스터트를 내란으로 몰아가는 발렌티나에게 붙어 자기만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지만, 에렌은 분전한 끝에 그녀를 뛰어넘었습니다. 여기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가 있는데요. 작가는 용구 '발그렌'으로 하여금 전(前) 주인의 '사샤'의 유지를 받들게 하는, 일부러 새로운 주인으로 피그넬리아를 선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군요. 피그넬리아가 있는 이상 에렌에게 있어서 평범한 삶은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뛰어 넘어라. 사샤가 원했던 자기는 못하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이루지 못한 염원을 에렌에게 맡기고 눈을 감은 그녀(사샤)에 대한 보상을 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는.


피그넬리아는 12권 표지가 뿌렸던 사망 플래그대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군요. 용병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행동이 제약되는 공녀로 선택되었고, 졸지에 에렌의 대척점이 되어서는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캐릭터라 할 수 있죠. 작가가 지면 관계로 표현을 생략했는지 악역임에도 사람 볼 줄도 모르고 부릴 줄도 모르는,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멍청한 악역으로만 등장하다 하직하게 되어버린, 비운의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어쩌면 용병인 에렌도 자신의 양부의 소원을 받들어 조금 강박증을 가지고 행동했다면 피그넬리아처럼 되지 않았을까 하는 반면교사 같은, 급조한 캐릭터치고는 꽤 많은 걸 시사하고 떠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걸 뛰어넘은 티글과 에렌은 최종 보스 '발렌티나'를 몰아내고 지스터트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합니다. 


발렌티나, 그녀는 선대 왕 빅토르가 사망하고 왕좌가 공석이 되자 차기 왕을 두고 내란에 빠진 틈을 비집고 들어와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되고 싶어 했죠.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 알고 보면 발렌티나도 참 안타까운 캐릭터입니다. 다른 공녀와 다르게 어릴 적부터 양호하게 성장해왔지만 음침한 성격 때문에 친구는 하나도 없고, 커서도 따돌림당하는 등(자기가 자초한 일), 현실에 대입 시키면 방구석 폐인 같은 캐릭터인데요. 그런 주제에 포부는 얼마나 심대한지, 문제는 그게 얼마나 구멍이 크고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모른다는 거고, 그로 인해 티글로 하여금 지스터트 왕이 되는 길을 깔아줘버리는 말도 안 되는 캐릭터죠. 자신의 야망에 방해되는 티글을 없애려 했지만 오히려 티글로 하여금 왕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게 그녀. 적어도 그녀가 다른 공녀들을 괴롭히지만 않았어도(티글 역린 건드림) 야망을 이뤘을지도 모를 일이라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티글은... 이 한마디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선 고생을 필수불가결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하렘 왕국을 건설했으니 고생은 보답받은 거나 다름없죠. 지키고자 했던 고향도 지켰고요. 여느 인기 많은 주인공이 다 그렇듯, 타인을 존중하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교본 같은 캐릭터가 바로 티글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지금까지 보면 에렌등 공녀들의 힘으로 전쟁을 치러 왔으니... 좀 안 좋게 평하자면 기둥서방 같은? 사실 이것도 인성이 뒷받침 해줘야 가능한 것이기에 꼭 나쁜 건 아닙니다.



맺으며, 뭐랄까 이번 18권은 작가의 뒷심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마지막답게 화려한 뭔가를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전투는 꽤 처절하게 묘사하는데 어차피 우리 군이 이길건데라는 느낌이 강하고, 몇몇 장면은 개연성이 한창 부족하더군요. 가령 왕의 보좌관 론인지 미론 인지하는 영감이 미쳐가는 과정을 들 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미치게 하는가 하는 설명이 부족해요. 밀론이 어린 왕자를 인질로 잡고 뭔가에 씐 것처럼 노망난 부분도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하는 설명도 없고요(뭐 필자가 놓쳤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엔딩 부분은 일본 엔터테이먼트 답지 않게 확실히 끝을 맺는 건 좋았군요. 내란이 끝나고 다시 3년이 흐른 시점에서 지금 누구와 같이 있는가, 지금 그의 곁에는 누가 있는가, 그리고 결실은? 같은, 여운을 남길만한 엔딩을 보여주면서 후련하게 해주는 것만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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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14 - L Novel
와타리 와타루 지음, 박정원 옮김, 퐁칸 ⑧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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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르: 돌부리에 넘어지고 강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러브 코미디, 임금 0(제로)에 도전하는 노가다, ​무엇이든 들어 드립니다. 심부름 센터(봉사부), ​서러운 1년 비정규직, ​사장님(히라츠카 선생)이 야반도주를 하였기에 심부름 센터(봉사부)는 폐업 ​합니다.


14권 요약: 홀로 떠나는 여행길,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꿈을 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아무도 없는데도,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데도, 그럼에도 연어는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상류에 도착한다면 나는 웃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서. 분명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연어는 길고 긴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14권 줄거리: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걸 끝내고 홀로서기에 나서는 유키노는 프롬(학교 축제, 발상지는 미국인 듯)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것은 나의 의지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끝낼 때도 나의 의지로 끝을 낸다. 이 축제를 무사히 끝낸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분명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을 테지. 그것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모른 채.


표지 설명: '또 봐~' 표지가 대놓고 스포질 한다.


14권 집중 포인트: '그녀의 소원을 들어 줘' 



스포일러 주의, 장문 주의, 읽기 곤란한 분들은 위쪽 부분만 읽으셔도 됩니다. 밑에 내용을 압축해놓은 거라 보시면 돼요. 


본 리뷰는 이 글을 읽는 분들과 의견과 생각과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 의견을 받겠지만 태클은 사양합니다.





엄마라는 사람은 사자다. 자기 새끼를 낭떠러지에 떨어트려 올라오는 새끼만 기른다. 고생했다고,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말로 새끼를 감싸지 않는다. 살아 돌아온 새끼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동물의 새끼는 부모로부터 사냥법을 배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걸까. 유키노는 부모로부터 배우질 못했다. 그저 엄마는 할 수 있을 테니까 해보라고 한다.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래서 오기를 부려본다.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못한다는 걸 들키는 게 무엇보다 두렵다. 그래서 도도한 척, 아무도 곁에 오지 못하게 한다. 언니는 방관자다.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언니는 무엇이든 척척해내는 사람이다. 언니는 나와 무엇이 다른 걸까. 언니가 걸었던 길을 밟으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는 있다. 저걸 보고 따라간다면 분명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겠지. 하지만 길은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야 어디로 가야 할지 배우질 못했으니 길이 보일 리가 없다. '히키가야 하치만'은 호롱 불을 들고 그녀를 지나 걸어간다. 그녀(유키노)의 눈이 호롱 불을 들고 가는 하치만을 비춘다. 저 사람을 따라가면 나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어느덧 유키노는 하치만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하치만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 정말?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나에게 있어서 그는 구세주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걸 할 수 있을 테지. 그렇게 그녀는 흘러가면 흘러가는 데로 강물에 몸을 맡기는 나뭇잎이 되기로 했다. 


유키노가 프롬을 개최하는 것에 못마땅해 했던 학부모회는 불건전하다며 딴지를 걸어온다. 유키노의 엄마는 학부모 대표가 되어 학교에 쳐들어와 그만두라고 한다. 보통 자기 자식이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게 부모의 의무이긴 하다. 그런데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며 아이들의 가능성을 짓밟아 버린다. 참견과 관심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무엇이 올바르고 그른지를 알려주는 것보다 민망하고 남사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못하게 한다. 당연히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유키노는 엄마의 말이라면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게 커왔으니까. 그녀(유키노)의 의존증은 다름 아닌 부모에 의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엄마는 자식이 뭘 하든 참견을 하고, 반론은 철저하게 막아버리는 화법을 쓴다. 엄마와 딸 사이엔 토론이란 무의미하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프롬을 무사히 마친다면, 나는 더 이상 하치만의 등을 보고 걷지 않아도 된다. 엄마에게 난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어필할 수 있다(1). 언제부터인가 자각은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걸. 의존증을 끊지 않으면 글러먹은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걸. 그래서 그에게 이만 끝내자고, 지난 1년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만 내려놓을 때가 왔다. 빠르든 늦든 언젠가 파탄이 온다면 지금 끝내는 게 좋겠지. 여기서 주저한다면 난 또다시 의존하고 말 테니까. 상냥한 이들에게, 그래서 '그녀의 소원을 들어 줘'라고 승부 조건을 걸은 것이리라. 프롬은 무사히 마칠 것이다. 무대 뒤 프롬을 도와주러 온 하치만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본다. 거리는 가깝다. 하지만 그 간격엔 건너지 못하는 낭떠러지가 존재한다.



유이가하마는 이대로가 좋다. 부실에 가면 언제나 그녀(유키노)와 그(하치만)이 있다. 같이 수다를 떨고 의뢰가 들어오면 힘을 합쳐 해결하고, 하굣길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이들(둘)이 있어서 좋다. 그녀는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기를 바란다. 문득 그녀에게 있어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몇이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유키노와 하치만을 만나 그녀는 매일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유이에게 있어서 친구란 무엇인가. 미우라와 에비나가 사교용이라면 유키노와 하치만은? 어느덧 유이에게도 지난 1년간은 어떤 것보다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그래서 잃는 게 무엇보다 두렵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하치만을 두고 유키노와 대립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언제부터 하치만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그가 나에게 의존하면서부터일까?


알고 있었다. 그녀(유키노)도 하치만을 좋아한다는걸, 그녀(유키노)의 집에서 그와 그녀가 다정히 같이 찍은 사진을 봤을 때보다 이전부터. 그래서 미련은 두지 않으려고 했다. 홀로서기를 하며 혼자 걸어가려는 그녀(유키노)는 나의 친구다.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해보자고 하치만에게 말을 건네본다. 이 대화가 어떤 아픔을 몰고 올지, 하지만 견딜 수 있으리라. 왜냐면, 다시 예전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다시 부실에서 그들과 수다를 떨며 지난 1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코마치 생일 케익 만들기를 빙자해 그를 집으로 끌어들여 이거저거 만들어 가는 그녀(유이)의 모습은 어쩐지 처절하게만 느껴진다. 프롬이 끝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찌그러진 캔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치만은 이대로 끝나는 걸 원한다. 누구에게 휘둘리는 것도, 누군가를 의존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그럴까 유키노가 홀로서기에 나섰을 때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그녀가 프롬을 성공 시킨다면 그녀의 병(의존증)은 고쳐질 테니 자신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아도 그녀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모른 채. 하루노(유키노 언니)는 그런 하치만을 불쌍히 쳐다본다. 그리고 진실을 하나 알려준다. 그녀(유키노)가 프롬을 성공 시켜도 병은 고쳐지지 않는다는걸. 연어는 상류로 올라가지 못한다. 왜냐면, 여기가 상류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상류라 믿고 웃으려 하고 있다. 무대 뒤에서 손을 흔드는 유키노를 바라보며 하치만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녀와 나 사이에 펼쳐진 낭떠러지를 건너 그녀에게 다을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그녀(유키노)는 여전히 도도한 척 앞을 보며 걸어가려 한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앞 길에 호롱 불을 들어 비추어주는 이도 없는 길을,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고서, 그제서야 하치만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가 다다르고자 했던 상류는 여기가 아님을. 그래서 상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유도를 해줘야만 한다. 혼자 가지 못한다면 내가 같이 가주면 되지 않을까. 웅덩이 속에 움츠려 있는 그녀를 깨워 상류는 여기가 아님을 알려주고 따라오라고, 나랑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어 본다. 연어는 꿈에서 깨어나 앞장서서 가는 다른 연어를 따라간다. 연어는 무사히 상류에 도착할 수 있을까. 거기에 도착한다면 진정한 웃음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맺으며, 대망의 완결입니다. 장장 8년에 걸쳐 이 작품을 읽어온 필자로서는 후련하기 그지없군요. 엔딩도 이에 못지않은 후련함을 선사합니다. 사실 이미 12~3권에서 이런 엔딩은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군요. 단지 등을 누가 떠밀어 주느냐만 남았었죠. 이번 14권 후반은 분위기가 갑자기 많이 바뀌어 적응이 힘들었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사실 13권(혹은 이전)에서 유키노와 하치만의 관계를 보자면 오히려 이번 14권 후반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흘러갈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리고 유키노의 성격이 180도 바뀌는데, 이건 바뀌었다기보다 껍질을 벗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전 13권 리뷰에서 유키노를 '말하지 않는 아픔'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성격이 변하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테죠. 


그건 그렇고, 그동안 이 작품에 관심을 뒀던 분들은 궁금해하시는 게 하나 있을 텐데요. 그래서 누가 누구와 맺어지는가, 이게 이 작품의 최대 포인트라 할 수 있죠. 입이 근질근질하긴 합니다만. 이걸 알아버리면 14권 읽을 의미가 없어지는지라 애써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누군가와 맺어진다는 것이고, 몰래 사귀는 것이 아닌 소문이 다 날 정도로 작중 공인이 되어 버린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은 분위기가 그냥 달달해서 돌아가실 정도가 되어 버리죠. 그냥 귀여워 죽습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고민을 하고 폼을 잡고 그랬는지... 문제는 사람이 세명이라는 것, 둘이 맺어지면 하나는 필연적으로 남게 된다는 것. 이것이 또 가슴을 후벼파죠. 사실 관계도를 따지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답이 나오기도 하고요.


  1. 1, 아, 참고로 유키노의 엄마는 딸이 싫어서 학대하는게 아닌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킨다고 보면 됩니다. 길은 알려주지 않고 알아차리길 바라는 타입이죠. 딸이 어떤 길을 선택하면 정말로 그걸로 괜찮겠니?하며 걱정과 질책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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