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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멜리 노통의 소설은 순식간에 사람을 사로잡아 버리거나 찜찜한 불쾌감을 안겨주거나 하는 식으로 독자들의 호오(好惡)를 재빠르게 갈라놓는다. 노통의 소설에 담긴 빛나는 위트와 완벽한 통제속에 직조한 듯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통렬한 문장에 한번 빠져버리면 좀처럼 헤어나오기가 힘들다.그의 소설을 말할 때면 종종 '잔인함과 웃음' '악의와 순진무구함' '차가움과 광기' 등 완전히 상반되는 어휘가 아이러니컬한 대비를 이루며 따라붙곤 한다. 노통이 지금까지 발간한 모든 소설은 대개 150여페이지 내외의 짧은 길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잔부스러기 단어들은 철저히 배제한 채 명료하고 절제된 문장만을 구사하하는 가운데 폭발적으로 내용을 전개시키시면서 자신만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통찰력을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노통은 언제나 사회와 조직, 전통과 상식의 경직성에 야유와 빈정거림을 아끼지 않지만 그 표출방식은 경쾌한 웃음과 날카로운 풍자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사회와 인간관계의 부조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펼치는 그 소설들은 아주 쉽고 매끄럽게 그리고 유쾌하게 읽힌다. [두려움과 떨림]에서 그는 20대 초 일본의 한 기업에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하며 겪었던 일들을 실마리 삼아 잔혹하면서 한없이 우스꽝스러운 블랙 유머를 창조해냈다. 이 소설에서 동양사회를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편향된 시각과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을 엿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보다 현실을 더 치열하게 그려내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하는 견해가 우세한 듯 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젋은 벨기에 여성은 일본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덕택에 일본의 대기업에서 1년 계약으로 일하게 되지만 신입사원으로서 맨 처음 하게 되는 일은 차 나르기이다. 그러나 차를 나르면서 일본어로 인사를 던진 것이 일본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그 다음에는 시간 때우기용 복사업무로 담당이 바뀐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타부서의 부장을 도와 발군의 사업보고서를 작성하지만 다른 사람의 담당업무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폐기당한다. 그렇게 점점 미끄럼을 타듯 점점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더니 급기야는 그에게 화장실 용품 정리정돈이라는 기가 막힌 업무가 떨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의 외형적인 위치가 비천해질수록 주인공 내면의 독백은 더욱 더 여유와 익살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그 아이러니한 대비 구조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작가의 비아냥거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만든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책속에 기술되어 있듯이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엄격한 명령체계와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 비효율적인 절차와 형식의 실체를 향해 유머러스한 비아냥으로 한방 먹이는 노통의 통렬한 복수를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이기도 하다. [두려움과 떨림] 외에도 근래 우리나라에 소개된 노통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기발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인간사이의 관계와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의 파괴]에서는 중국의 문화혁명기를 배경으로 6살짜리 소녀에게 맹렬한 사랑을 느끼는 7살짜리 소녀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또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는 세살짜리 천재소녀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존재론적 성찰과 철학적 사유를 벌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초콜릿은 내가 필요해.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내 입속으로 들어가면 그건 쾌락이 되거든'과 같은 독백을 늘어놓는 세살 꼬마의 모습이라니. 노통이라는 작가만의 남다른 창의성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가득한 소설이다. 또 [적의 화장법]은 언어의 결투라도 벌이듯 오로지 두 사람의 치열한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특이한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긴장감 넘치게 전개된다.

조만간 노통의 전작이 다 번역되어 나올 듯 하다. 한권씩 사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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