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일 화요일


드디어 금강산을 보게 되는 것이냐. 비록 먼발치로나마. 6, 몸을 일으켰다. 밤새 비가 왔는지, 몸이 늘어져 진즉에 눈을 떴지만 계속 누워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거의 버스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서울에서 1박을 할 건지 집으로 내려갈 건지 결정을 못해 머리를 굴리느라 계속 누워 있었다. 두 녀석이 다툰다. 이 사람아, 그간 쓴 돈이 얼만디 또 서울서 1박을 한다는 겨. 그래도 마지막인디 서울서도 한 번 자봐야 되는 거 아녀? 모텔이 거기서 거기지 서울이라고 별 수 있나? 그래도... 둘이 옥신각신하다 결국 첫 번째 녀석이 이겼다. 맞어, 그간 쓴 돈이 얼만디! 커튼을 여니 비가 오고 있었다. 세차진 않지만 밤새 내린 모양으로 정면의 앞산이 흐물흐물해 보였다. 아침 제 의식 행사를 마치고 내려와 안내 프런트에 키를 반납하니, 810분이었다. 어제저녁에 통일 전망대 매표소 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5분 거리라고 했는데, 너무 일찍 내려왔다. 더구나 매표 시간이 9시라는데. 알고는 있지만,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려 방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잠자는 건 곰의 유전자를 받고, 행동은 호랑이의 유전자를 받은 것 같다. 비뿌리는 도로를 뚫고 통일전망대 매표소(매점, 교육관 겸용)에 이르렀다. 장장 5분 만에.



수위인듯한 분이 왔다 갔다 한다. ‘왜 이렇게 일찍 왔냐!’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걸어서는 못 가요! 차 타고 가야지!” 한다. 할머니의 여행기를 읽어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고 있는 상태. 할머니는 무슨 협조를 받아 통일 전망대까지 걸어갔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혹시, 나도?’ 하는 막연한 바램을 가지고 왔는데, 이뤄질 수 없는 바램 같다. 버스가 있냐니, 버스는 없고 택시만 있다며 한 5~6만 원 줘야 할 거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눈알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려고 하는 것을 힘줘서 도로 밀어 넣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왠 후줄근한 차림새의 사내가 힘차게 매표소 근처로 올라오더니 평화의 종!’하고 쳤다. 오잉, 저런 게 있었나? 뭔가를 알고 온 모양이다. 그런데 9시에 매표소 문 여는 건 모르는지 잠겨진 매표소 문을 열려고 했다. “9시부터 문을 연답니다.” 하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 쪽으로 온다. 통일 전망대 가는 방법을 말하니, 이 이 역시 몰랐는지 살짝 당황해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안을 한다. “저하고 반반씩 내고 가시는 건 어떤가요?” 괜찮을 것 같다. “, 그러시죠.” 사내가 택시 회사인지 개인택시 인지에 전화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바로 이곳까지 택시가 올 수는 없고 제진까지 걸어오면 거기서 타고 갈 수 있단다.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일단 가허락을 했다. 매표소 추녀 밑에 두 중늙은이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참 거시기하다. 조금 있다 보니 왠 말끔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가 올라와 매표소 문을 열려고 했다. 사정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약간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혹시 태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차를 가지고 온 것을 봤기 때문). 초면이지만 처량한 상태에 있는 것을 봐서 그런지 흔쾌하게 허락을 했다.


9시가 되어 표를 산 뒤 그렇고 그런 안보 영상을 시청한 후 친절한 두 내외분 차에 올라탔다(후줄근한 차림의 사내도 당연히).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이것저것 물어가며 대화를 했다. 두 내외는 포항 출신인데 근 1년에 걸쳐 동파랑길을 걸었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날씨가 쾌창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소 아쉽다고 했다. 그거야 십분 공감. 동승한 남자분은 이제 동파랑길 시작이라며 어제 부산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아하, 그래서 출발의 의미로 평화의 종을 울렸던 거구나.


차가 통일 전망대 주차장에 섰다. 차에서 내리는데, 감개무량하다. 중간에 차를 타긴 했으나, 어쨌거나 처음 목표했던 대로, 땅끝(마을)에서 이곳까지 오긴 왔구나! 출발 때 날이 흐렸는데, 도착해선 비가 오니, 나름 수미일관한 특별한 날씨다. 전망대 타워에서 금강산 쪽을 바라보는데, 맑은 날씨였으면 분명히 보였을 산들이, 우중이라 모호하다. 현금의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듯도 하고, 통일 상황을 보여주는 듯도 하고,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너무 확대 해석?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북한이다. 이러저러한 편견 없이 그냥 북한 땅 여기저기를 걸어보고 싶은 것. 내 생애 그런 날이 올까? 염원을 담아, 흐릿한 풍경의 금강산을 사진에 담았다.



운전자 분의 배려로 ‘DMZ 박물관까지 견학을 한 후, 우리는 거진에서 헤어졌다. 친절했던 두 내외 분께 감사를! 함께 했던 후줄근한 사내 분은 무사히 일정 잘 마치시길! (‘후줄근한 사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모욕하는 뜻은 없으니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시길!) 거진에서 한 방에 서울 가는 차가 있어(너무 기뻤다!) 표를 끊었다. 1215분 행. 차비가 물경 23,300원이다. 3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다. 차를 타기 전 점심을 해결하려 빵집에 들어가 카스텔라와 초코 우유 하나를 샀다. 냠냠 짭짭. 매표소 근처 화장실에서 작은 볼 일을 해결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다, 마침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 풍경 감상하기가 취미인데, 취미 생활을 못하고 거의 졸면서 갔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중에 거의 취미 생활을 제대로 못했네. 애고, 아쉬워라.



4시가 되어 서울에 도착, 지하철을 타고 꿈에 그리던(?)’ 익선동 교동초등학교에 갔다. 당연히 옛 자취는 찾아볼 길이 없다. 학교에서 서성거리는데 학교 보안관께서 오시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로?” 사정 얘기를 했더니, 반색을 하며 두루두루 보라고 하신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아 편하게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때 타고 놀던 양(석상)이 있었는데 그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했더니, 놀랍게도, 있단다. 안내까지 해주셨다. 정말 정원 속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은 거냐? 그때는 컸던 것 같은데. 보안관께 이 말을 했더니, 웃으면서 자신도 그런 걸 느낀다며, 운동장도 그렇지 않냐고 한다. 운동장을 쳐다보니 진짜 그렇다. 오호,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고? 보안관님과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기념사진을 한 장 같이 찍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찰칵.



내가 다닐 때만 해도 교동초등학교는 지금의 강남 8학군 학교와 같아 학생이 버글버글 했다. 지금은, 보안관님의 말에 따르면, 학생이 없어 한 때 폐교 논의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라는 문화적 가치 때문에 어찌어찌 살렸는데 장래는 그리 밝지 않다고 했다. 또 한 번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실감한다. 난 사실 교동초등학교에 대해 그리 행복한 추억은 없다.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부모님의 무슨 교육 열망 때문에 오게 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익선동에 한복 가게를 내시는 바람에 오게 된 것뿐이다. 학생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그다지 명민하지 않은 나는 선생님의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학교에 다니던 상당수의 학생은 내로라하는 집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선생님의 관심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내노라 하는 집 학생들의 수준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린이 회장 선거를 하는데 후보로 나온 여학생이 자기가 회장이 되면 학교에 시계탑을 건립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놀랍지 않은가.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에. 4학년 때 시골 고향으로 전학을 왔을 때 당시 학생 중에는 보자기에다 책을 싸 오는 아이도 꽤 있었다. 얼마나 격차가 심한가!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시골에 내려온 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본다. 서울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이가 시골에 내려오니, 주변 아이들이 워낙 공부에 소홀해, 본의 아니게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게 됐고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자존감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의 자존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깊이 신뢰하고 있다. 그나저나 당시 시골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들은 나와 달리 다 서울로 서울로 도회지로 도회지로 갔고, 나는 더 시골로 시골로 내려갔다. 서울로 도회지로 간 친구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 만약 내가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진짜 시골에 살게 된 걸 너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럼 시골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찌질하게 산다는(살아야 한다는) 것이냐, 고 물을 수 있겠다. 논리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꼭 논리대로만 되는 것이 세상은 아니잖은가. 시골서조차 주목받지 못했으나 서울로 도회지로 가 주목받고 성공한 친구도 많다. 나는 다만 내 경우만 말한 것이다.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옛적에 다녔던 학교에 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나저나 시골 고향의 초등학교도 자치하면 폐교가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안타까움의 한숨만 나온다.



학교를 나와, 한 때 살았던 익선동을 찾았다. 그런데, 여기도 왜 이리 좁아터진 거냐. 원래 그랬냐, 아니면 축소된 거냐. 땅과 집이 오무라 들었다 늘었다 할리는 만무. 저 좁은 골목에서 한 때 내가 활보했단 말이지. 하하하. 익선동은 모던 한옥촌이다. 1920년대부터 개발된 곳이다. 짐작컨대 우리나라 학구열상 교동초등학교를 끼고 있어 사람들이 더 몰려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온갖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한 상가가 되었다. 젊은이들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란다. 정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약간 한산한 데를 찾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살던 곳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익선동 주변을 걸어보는데, 그간의 극심한 시대 변화를 생각하면, 의외로 그렇게 변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줬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는데, 이곳에 살 때 있던 그 플라타너스가 아닌가 싶다. 창덕궁이 보인다. 심심하면 놀러갔던 곳이다(당시는 무슨 궁인지도 몰랐다). 한 때 친하게 지냈던 홍ㅇㅇ의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낙원약국'을 찾아봤는데, 없다. 애고, 나도 60이 다 됐는데 ㅇㅇ이의 아버지가 그 약국을 하고 계시겠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ㅇㅇ이네는 꽤 부유해서 그 집에 놀러 가면 놀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느 하늘에서 잘 살고 있는지?



길을 걷다 아내에게 줄 선물로 작은 모자 하나를 사고 전철을 타러 갔다. 이젠 집에 가야지. 표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예매해 놓았다. 8시 차.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저녁을 먹으러 지하에 있는 신세계 매장으로 갔다. 떨이로 파는 음식을 약간 싼값에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일까, 매장이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초밥을 하나 사서 푸드코너 매장에서 먹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란한 매장을 나와 서산행 노선 앞 대합실에서 가족 단톡방에 올린 사진들을 정리하고 그간 쓴 비용도 결산해보았다. 20일 동안 쓴 총비용이 1,453,580원이다. 대략 하루에 7만 원가량 쓴 셈이다. 숙박비만 저렴하면 지출이 훨씬 덜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짧은 해외여행 비용과 견줘보면 그렇게 많이 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역시 100만원 넘긴 비용을 20일간 여행 비용으로 썼다고 생각하니, 살짝 부담감이 밀려온다. (다행스럽게도 이 비용은 퇴직 후 받은 전년도 성과급으로 가름할 수 있었다) 이보쇼, 누가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안 할 까봐 여행 막바지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그간 겪고 생각한 게 어딘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돈타령을 하다니. 한심하오! 그렇네요~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쩐대요? 그리고 제 이름이 ''에다가 ''이잖아유. 이름 값은 해야쥬. 어허, 이 사람이, 갈수록... 수양 좀 더 혀! , .


750, 8시 서산행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왔다. 이 터미널에서 서산행 버스 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오늘처럼 서산행 버스가 정겹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너무도 정겨워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8시 정각에 버스가 출발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 터미널에서 집까지, 처음처럼 걸어 갈려고 했는데, 처가 만류했다. 마중을 나온단다. 으흠, 역시 헛살진 않았군. 여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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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일 월요일

 

해 저문, 아니 해 담은에서 눈을 뜬 것은 5시 반. 앱을 켜고 금강산 콘도까지 거리를 확인하니 40km에 도보로 10시간 4분 걸린다고 나온다. 날씨를 확인하니 오후 늦게 비 소식이 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순대에 내용물 채우듯 꾸역꾸역 아침 식사를 한 후 간단히 세수하고 주변 정리를 한 뒤 모텔을 나섰다. 해변에 나가 아침 녘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햇빛을 바라보고 찍어서 그런지 얼핏 보면 석양 녘 풍경 같다.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 허겄지. 해변 위쪽에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있다. 피정의 집 같기도 하고 요양원 같기도 한. 어느 것이든 좋은 위치에 마련한 것 같다. 피정의 집이라면 다음엔 저기에 가서 묵었으면 좋겠다. 다시 올 기회가 있긴 할까?



755, 청간정에 올랐다. 표현력 없다 보니, 두 마디만 나왔다. 우와! 멋있다! 장대한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로 사진을 찍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하 대통령 필적이 걸려 있다.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 필적이라, 감상은 패스! 택당 이식의 시도 걸려있는데 고사를 사용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외려 홍경모가 쓴 청간정 기사가 관심을 끈다. 끙끙거리며 읽어본다. (애고, 평생 한문 선생을 했는데, 실력이 왜 이리 요 모양이냐. 하긴 시계불알처럼 왔다 갔다만 했으니 뭔 실력이 있으랴. 어디 가서 절대로 한문 선생했다고 말하지 말자!)



청간정은 간성군 남쪽 45리 되는 곳에 있다. 천후산 한 자락이 뻗어 내려 바닷가에 가로로 작은 언덕을 펼쳐 놓았는데 앞에 석봉(石峰)이 있어 우뚝 솟아 층대(層臺)를 이루고 있다. 이 장소를 만경대라 부른다. 높이가 수십 길로, 위에는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얼기설기 삼면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맑은 바닷물이 부딪치며 솟구치는 소리가 웅장하다. 옛적에 이곳에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만경대 남쪽 2리쯤 되는 곳 시냇가에 역정(驛亭)이 있는바 이것이 청간정이다. 만경루가 없어짐에 만경대 옆으로 이 역정을 옮겨오고 만경대 편액을 걸어 놓았는데, 본시 시냇가에 있던 건물이라 세간에서는 통칭 청간정이라 부른다. 정자가 바다로부터 수십 발짝 떨어져 있을뿐더러 모퉁이에 위치해 있고 물속의 방패막이 지형이 파도를 막아줘 수해를 입지 않는다. 정자가 넓고 통창하여 거대한 바다를 내려다 보기 충분하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모습, 갈매기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풍경, 어촌의 밥 짓는 연기, 하늘과 물이 만나는 아득한 정경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물이 정자 아래 있는데 티 없이 맑아 그 밑바닥이 보이기에 머리털과 수염이 비칠 정도이다. 바람이 불어 파도의 포말이 드날릴 때는 서리와 눈이 사방에 흩날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산림에 은거하고자 하는 뜻이 생기는 바 이런 풍경은 낮에 더 보기 좋다. 달 뜨는 밤 창가에 누워 바람과 파도 소리가 창문을 흔드는 소리를 들으면 흡사 물 위에서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배를 타고 가다 정자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면 해변에 자마석(自磨石)이란 것이 있다. 자마석은 돌무더기 가운데 있는 일() 거석(巨石)인데 소와 같은 모양새이다. 여기에 한 거석이 그 위에 덮여 있고 그 사이로 주먹 하나 들어갈만한 틈이 있다. 윗 돌과 아랫 돌 중간에 나 있으며 돌을 갈아낸 흔적이 있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긴다. 나도 그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 세 곳 모난 데에도 모두 이런 모양이 있는바, 이는 파도가 항시 바위 틈새로 왔다 갔다 하는 고로 바람과 파도가 세찰 때 바위 또한 거기에 휩쓸려 물결과 상호작용을 하다 보니 그리된 걸 것이다. 이 이치로 보면 하나도 괴이할 것이 없다.



유래와 풍경을 세밀히 묘사해 실감난다. 끙끙거리며 읽은 보람이 있다. 잠시 앉아 풍경을 감상했다. 다시, 출발~.


소나무 우거진 길을 벗어나 잠깐 큰 도로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이인(異人)이 나타났다. 작은 손수레 같은 것을 허리춤에 매어 끌고 오는데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은 꾀죄죄하지만 눈빛은 형형하다. 풍기는 아우라가 만만치 않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수인사를 했다. “여행 중이신가 봐요?”(하나마나한 멍청한 질문. 보면 모르나?) “~” “저는 해남에서 왔는데, 어디로?” “동파랑길 따라가고 있습니다.” 손수레 같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숙박 장비라고 했다. 손수 제작했단다. 200여 일 넘게 전국을 일주하고 있다고. 식사는 어떻게 하시냐니, 주로 사 먹으며 어쩔 수 없을 때는 라면으로 때운단다. 가본 곳 중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냐니, 제주의 한라산 둘레길과 탐모라질 길을 추천해 준다. 숙박비가 너무 많이 들어 여행하기 힘들다고 했더니, 동조하며 그래서 자신은 숙박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잠시 이것저것 더 얘기를 하는 중 이인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더 얘기하기는 뭐해 작별 인사를 했다. 도보 여행을 나오면서 막연히 길에서 만날 그 어떤 인연을 기대했는데, 이 이인으로하여 충족된 느낌이다. 확실히 이번 여행은 하늘이 점지해 주신 게 틀림없다. ,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아멘, 아미타불,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알라 알라 기타 등등.



큰 도로를 따라 걷는데 옆으로 걷기 좋은 산책길이 있다. 짤막한 게 아니고 지금 걷고 있는 도로와 병행하는 긴 길이다. 굳이 큰 도로로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걷던 길을 바꿨다. 큰 도로와 산책길 중간에 꽃나무를 심어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는데 무지막지하게 타고 넘어 들어갔다. 운전자들이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산책길 옆으로 펼쳐지는 호수가 장관이다. 무슨 호수일까? 앱을 켜고 살펴보니 송지호. 바다도 멋진데 이런 멋진 호수까지. 고성은 복 받은 고장인 것 같다. 이곳만 여유 있게 걸어도 하루 여행 일정이 될 듯해 보였다.



어찌어찌하야 다시 해변 길을 걷는다. 시계를 보니 12. 점심때이다. 적당한 식당이 있으면 한 끼 사 먹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을 하느님이 알아차리신 것일까, 근사한 식당이 눈에 띈다. 이름도 멋지다. ‘금강산도 식후경.’ 고성 최고의 맛집이란다. 최근에 지었는지 건물이 산뜻하다. 입간판에 메뉴를 소개해 놨는데, 물회가 눈에 띈다. 더구나 물회가 전문이란다. 그려? 한 번 먹어볼까? 그런데 가격이 세다. 만육천 원. 까짓 거, 막판인데. 이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주인이 창가 쪽 1인 테이블 석으로 안내해 준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받는다. 점점 자동화되는 음식점. 나중엔 음식 배달도 로봇이 해줄 것 같다.



창가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는데, 두 젊은 남녀가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물컵을 근경에 두고 바닷가 두 젊은 남녀를 카메라로 바라보니, 물컵은 거대한 수조처럼, 두 젊은 남녀는 미미한 사물처럼 보인다. 물컵의 물을 두 사람에게 쏟으면 물에 빠져 허우적 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리에 차이에서 비롯되는 유머러스한 미감. 재미있는 사진이 될 것 같아 한 장 찍었다. 스토커 아닙니다~.



물회가 나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먹어보는 회다. 말 그대로 차가운 물에 담긴 회인데, 고춧가루와 식초가 많이 들어가 맵고 시다. 국수가 함께 나왔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그냥 물회에 넣어 함께 먹었다. 더운 참에 맛있게 먹었는데 먹고 나와 뱃속이 불편해 한참 고생했다. 너무 빨리 먹어 소화가 안된 탓도 있지만, 물회가 너무 차가워서 그랬던 것 같다. 차가운 음식이 불편한 걸 보면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다시, 출발.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어 확실히 그간 지나온 길들에 비해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게 이쪽 길이다. 게다가 자전거 도로가 대부분 해변을 끼고 나 있어 바다 감상까지 하며 걸을 수 있기에 더 좋다. 신나게 걷고 있는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쓰레기를 만났다. 오토바이. 세상에, 오토바이까지. 관광 강원 얼굴에 먹칠하는 물건이다. 진태 씨, 신경 좀 써주셔~.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뭐냐? 금방 자전거 도로를 칭찬했는데, 자전거 길 통행금지 띠를 둘렀네. 뭐여, 내 허락도 안 받고 언제 저런 거를 한 겨. 진태 씨, 정말 이렇게 할 겨~. 자전거 도로를 따라오던 자전거 여행자들이 무척 당황할 것 같다. 빨래 보수되기를!



440. 화진포의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박마리아 별장을 들렸다. 사실 별 매력 없는 인물들의 별장이지만 한 때 역사의 틀을 짜고 권력의 못을 박은 자들이라, 어떤 곳에서 자빠져 자고 밥을 먹었는지 궁금해 들려보기로 했다. 김일성 별장은 외국인 선교사의 집이었던 것을 김일성이 자신의 별장으로 쓴 것인데,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용했단다. 관광객에게 실감 나는 관광을 하라고 당신이 지금 딛고 있는 계단이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댓살 때 사진 찍은 장소라며 당시 사진을 계단 벽면에 붙여 놓았다. 별 재미없는 실감. 별장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김일성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복잡하고 힘든 정무를 뒤로하고 쉬러 왔을 테지만, 시대 상황을 두고 보면, 왠지 마음 편히 쉬며 바다를 감상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땅에서 죽었는가. 자네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여. 이제 지상을 떠난 지금, 그곳에서 평생을 X 잡고 반성하며 민족의 제단 앞에 사죄토록 하게나.



이기붕 박마리아 별장은 숙소까지 가야 할 시간이 촉박해 그냥 지나칠까 하다 입장료가 아까워 잠깐 들렸다. ()와 박()은 굥과 김()의 본보기 같은 인물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줄 알았는데 되풀이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쓱 한 번 훑어보고 나왔다. 박마리아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현대사의 많은 추악한 일에 관련된 인물이다. 이화여대를 나오고 미국 피바디 대학에서 석사까지 받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건 오로지 돈과 권력이었다. 남편 이기붕은 그녀의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에고, 그만하자, 입만 더러워진다. 댁들도 지상을 떠난 지금, 그곳에서 평생 무릎 꿇고 두 손 든 채 민족의 제단 앞에 사죄토록 하시오!



531. 날이 점점 흐려진다. 간간 빗방울이 던진다. 길가에 민박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왜 이리 청량리 588 같은 느낌인지 모르겠다. 흐려진 날씨에 후주글한 외양 바쁜 발길이 그런 느낌을 자아내게 한 것 같다. 비가 쏟아질 듯 해, 금강산 콘도를 포기하고 어느 한 군데에 들어갈까도 생각했는데 기분이 영 내키질 않아 그만뒀다. 드디어 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꺼내 들었다. 저 멀리 금강산 콘도가 보인다. 65,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방을 달라니, 전망 좋은 곳은 없다며 5만 원이란다. 이미 안복은 충분히 누리고 온 터, 전망이 무슨 상관이랴. 방에 들어갔는데, 시설이 많이 노후돼 있다. 씻고 정리하기 전에, 우선 따뜻한 밥부터 먹고 싶어 콘도 내 편의점에서 사 온 햇반 1개를 전기밥통에 넣은 뒤 취사 스위치를 눌렀다. 금방 밥이 됐다. 찬장에 있는 밥공기를 꺼내 밥을 퍼 담았다. 잠시 두 손으로 밥공기를 잡고 따뜻한 밥 냄새를 맡아본다.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밥 냄새냐. 편의점에서 사 온 깻잎을 반찬으로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머지 제반 저녁 행사를 치렀다.



한동안 부질없이 티브이를 켜고 이것저것 보다가 불현듯 치킨 생각이 나서 콘도 내 치킨집에 내려갔다. 주인이 밥을 먹고 있었다. 튀김 치킨 가격을 보니 19천 원이다. 부담스럽다. 트라이를 해보는데, 통하지 않는다. 주인도 진강원주인이 아니고 나도 이미 밥을 먹었기에 절실하지 않아 그랬던 것 같다. 그냥 나올까 하다, 실질적인 여행 마지막 날이라 자축 겸해 주문을 했다. 술도 한 잔 할까 하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만뒀다. 방에 가지고 와 먹는데, 역시나 부담스럽다. 1/3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싸서 화장실에 갖다 놨다. 방에 냄새가 밸까 봐. 다시 이빨을 닦고 침대에 기대 TV를 켜고 아우성치는 애들 머리를 고루고루 쓰다듬어 주었다. 얘들아, 이제 자야 할 것 같다. 너희들도 그만 자렴. 뭔가 극적인 밤이어야 할 것 같은데, 비가 와서 그런지, 힘들어서 그런지, ()극적인 밤이다.


내일은 통일 전망대를 거쳐 서울 익선동으로 간다. 익선동은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 처음엔 갈 생각이 없었는데 왠지 여행 막바지에 이르니 가고 싶어졌다. 회귀본능일까?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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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일 일요일


여보, 식사!” “!” 맛있는 콩나물 김칫국이 식탁에 올라와 있다. 후루룩 쩝쩝! 처가 제발 입 다물고 먹으라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 트림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불러 뿌듯하다. 갑자기 작은 것이 마렵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찰나, 잠에서 깨었다. 오매, 다 늙어서 실수할 뻔했네. 그것도 남의 이부자리에다. 불현듯 처가 끓여주는 콩나물 김칫국이 먹고 싶다. 입맛만 다시고, 어제 마트에서 산 그렇고 그런 끼닛거리로 아침을 때웠다. 여행이 끝나갈 때가 돼서 그런가 점점 더 그렇고 그런 끼닛거리에 싫증이 난다. 아이고, 미안타, 야들아. 그래도 니들이 큰 힘이 돼줬는데, 종국엔 찬밥 취급하다니(실제로 찬밥이긴 하지만). 만원 더 낸 게 아까워 뽕을 뽑으려고 샤워를 한 뒤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앱을 켜고 고성 봉포까지의 거리를 살펴보니 23km5시간 54분 걸린다고 나온다. 여유 있다. 오늘은 리버사이드 모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평도 괜찮고 가격도 괜찮아 결정했다.


도로에 인적이 별반 없다. 차들도 한산하다. 어제 양양 읍내에 들어설 때, 우중임에도, 사람들이 붐볐는데 오늘 너무도 상반된 도로 풍경을 대하니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든다. 어제 풍경은 혹 꿈속의 풍경이었나? 기념으로 도로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어제 내렸던 버스 터미널을 지난다. 길가에 영산홍과 철쭉이 한껏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다. 꽃을 좋아하는 처를 위해 사진 한 장, 찰칵. 이런, 처는 영산홍과 철쭉을 별반 좋아하지 않는데. 처는 들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 잔디밭에 돋아나는 이름 모를 풀꽃들도 함부로 뽑지 않는다. 잔디밭엔 잔디만 있어야지 여타 잡 것들이 있으면 잔디 관리도 안되고 나중에 잔디 깎기도 불편해, 처한테 타박을 하지만 고치질 않는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아예 영역을 분담하기로 했다. 앞 잔디밭은 처가, 뒤와 사이드 잔디밭은 내가 담당하기로 한 것. 과연 처는 잔디밭을 잘 관리할 수 있을는지? 자칭 생명주의자요 자연주의자인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귀가한 이후 처는 내게 SOS를 보냈다.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잔디밭에 즐비한 야리야리한 여러 풀꽃들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자치하면 풀을 뽑으려다 고것들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는 것. 처한테 나도 모르게 세뇌당한 것 같다.)



낙산 해수욕장 안내판이 보인다. 들어갈까, 말까? 시간도 넉넉해 들어가기로 했다. 바닷가에 살고 있지만(실제 바닷가는 아니다. 바닷가에 가려면 적어도 20분 이상은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바다에 가면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소재를 바다와 소년으로 잡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 나오려는데, 저쪽에서 뭔가 공사가 한창이다. 벌써 해수욕장 개장 준비를 하나보다. 인부들 얼굴을 보니 거의 내 대중이거나 더 많아 보인다. 시계를 보니 838분인데, 이른 시간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 같다. 아침들은 든든하게 자셨는지. 문득 홀로 생활하시는 형님이 생각난다. 처도 자식도 있건만 조그만 원룸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형님. 마음만 좋고 경제에 너무 어두워 여러 번 사기를 당하고 종국엔 식구들한테도 외면을 받아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드리는 생활비로 근근이 생활하고 계신다. 마음만 안타까울 뿐 도와드리는데 한계가 있어 누님들과 매번 아쉬움을 토로하며 형수와 조카들을 성토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말 시대가 많이 변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시절과 비교해 보면. 그래도 어떻게 자기 남편을, 아버지를. 오늘 아침엔 무엇을 드셨을까? 지난번 뵙을 때 여쭤보니 아침은 라면으로 때우신다고 들었는데, 오늘도 라면으로 아침을 드셨을까? 그러나 나의 형님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저 공허한 안타까움일 뿐이다. 뭘 화끈하게 해 드릴 수 없기 때문. 형님, 그래도 건강 관리 잘하셔요. 그래야 형제들 얼굴 오래 볼 수 있죠. 그리고 혹 그 네 가지가 없는 조카 X들이 회심해서 형님께 잘할는지도 모르니. 형수는 이미 황새 울었으니, 기대하시지 말고요.



낙산사 들어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왠지 들어가고 싶다(‘왠지가 적중했다. 절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건 낙산사가 처음이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다). 예의 그 입장료 스트레스를 받으며 낙산사에 들어갔다. 휴일이어서 그런가 관광객들이 붐빈다. 화재로 전소된 후 새로 지어서인지 건물들이 멀끔하고 조경도 단정하다. 대지도 넓은 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통보전을 보고 나오며 작품 사진을 하나 찍었다. 원통보전을 찍은 게 아니라 원통보전 추녀를 배경으로 하늘을 찍은 것. 우리나라 건축물은 선이 아름답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아 확인 차 한 번 찍어본 것인데, 찍고 나서 확인해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주워들은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다.



해수관음상을 보러 갔다. 한 아주머니가 절을 하고 계셨다. 아주머니가 일어나 자리를 비꼈을 때 냉큼 사진을 찍었다.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름대로 미감이 느껴진다. 베트남 다낭에 갔다가 본 거대한 해수관음상과 대비된다. 그 관음상은 정말 거대만 했지 어떤 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 관음상을 보며 베트남도 경제가 좋아지면서 최고 최대를 숭상하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나저나 바닷바람이 센데 너무 옷을 얇게 입고 계신 것 같다. 사시사철 저렇게 입고 계실 텐데, 건강이 염려된다. 보살님, 감기 조심하셔요~.



낙산사의 하이라이트는 '의상대'가 아닐까? 동해 일출 사진과 함께 꼭 등장하는 의상대. 바닷가 한 끝 언덕 위에 조신한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의상대를 대하니, 괜스레 못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한복 곱게 차려 입은 약간 도도한 새색시를 보는 느낌이다. 사진을 아니 찍을 수 없다. 곁에서 사진을 찍던 수다스러운 아주머니 한 분 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양한 포즈를 취해 보라며 성의 있게 찍어 주신다. 감사합니다~.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는데, 중간중간에 경내(境內)에 있는 찻집(기념품 집)을 찾지 말아 달라는 신도(信徒) 호소문 입간판이 눈에 띈다. 그간 임대로 영업을 해왔는데, 계약 기간이 끝났음에도 철수하지 않고 있으며, 건물도 제대로 보수를 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호소문만 보면 영업점이 악덕 업주인 것 같은데, 저쪽 입장을 들어보지 않아 정확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그럴까, 애타는 호소문에도 불구하고, 찻집(기념품 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바닷가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저절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찻집이다. 나도 저절로, 애타는 호소문을 무시하고, 찻집(기념품 집)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기념품을 돌아보는데 고개를 까딱이며 절을 하는 귀여운 동자승 인형이 보인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기념품을 파는 이 한테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얼마냐고요?”라고 되묻는다. , 동문서답?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는데, 얼마냐라니? 사람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나 보다. 다시 되묻고 허락을 받아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가격이 15천이라 살만 해 하나 사고 싶었지만, 빤스 한 장도 버거운 여행 배낭에 동자승 인형을 넣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그만뒀다(집에 돌아와 많이 후회했다. 여러 쇼핑몰을 뒤지며 낙산사에서 본 그 동자승 인형을 사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동영상만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대추차를 한 잔 주문해 마셨다. 7천 원이다. 거의 점심 값. 한과 1개를 덤으로 준다.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했다. 답답한 실내를 나와 밖에서 마시는데,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다. 날씨가 약간 추운 데다 바람이 불어 그런 것 같다. 기모 바지에다 살짝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내겐 아무렇지도 않다. 본의 아니게 실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차를 마셨다.



찻집(기념품 집)을 나와 낙산사 나가는 길로 들어서려는데, 멋진 문구를 새긴 표석을 만났다. '길에서 길을 묻다.' 길에서 이란 시집을 주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길에서 길을 만나다.'란 표석을 대하니 이 또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번 여행은 필시 하늘이 내게 점지해 주신 여행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길을 떠난 자에게 딱 어울리는 사물들을 만날 수 있으랴~. 오오~ 하늘이시여~! 속으로 무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낙산사를 나왔는데 화재 당시 참상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한 번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갔는데, 생각 외로 끔찍한 모습은 별반 없었다. 하기사 화재에 전소됐는데, 뭐가. 당시 탔던 목재로 지은 정자(범종각)와 석물 파편들을 늘어놓았다. 남대문도 그랬고 이곳도 그렇고 우리 문화재들은 대부분 목재라 정말 화재에 취약하다. 우리 문화재가 갖고 있는 숙명.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터.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큰 도로를 따라가다 자전거 도로 안내판이 있어 과감히 걷던 길을 바꿨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도 고성 봉포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을 듯했던 것(실제도 그랬다). 자전거 도로와 동파랑길 안내가 잘 돼있어 마음 편히 해안 길을 따라 걷는다. 번잡한 차 소리 듣지 않고 시원한 파도 소리 들으며 길을 걸으니, 그간 여행하면서 마음 졸였던 모든 압박감이 일거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몽돌 해변을 지난다.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라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가면, 모래사장과 달리, 와그르르 소리가 난다. 그릇에 담긴 바둑 돌을 바닥에 쏟을 때 나는 듯한 소리. 와그르르.



다시 큰 도로로 나와 걷는데 저 멀리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잠수복을 입고 즐기는데 유독 저곳에서만 사람들이 붐빈다. ‘물치 해변인데, 너울성 파도가 다른 해변보다 커서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아직은 추운데지나면서 서핑을 마친 사람들이 벌벌 떨며 따뜻한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고, 그런 험한 것은 아랫사람들한테 시킬 것이지, 뭐 하러 손수 하느라고한바탕 훈수를 두었다(속으로).



금강대교를 지난다. 높은 다리를 지나며 본의 아니게 아래에 사는 사람네들 집 지붕을 보게 된다. 살림들이 곤고한지 많은 지붕이 슬레이트이고 검은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한쪽에선 추운 날씨에 서핑한다고 지랄 발광하는 모습이 보이고, 한쪽에선 곤고한 생활에 힘들 사람들 사는 곳이 보이니마음이 좀 거시기하다. 내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숙소를 향하야! 시계를 보니 4시다. 낙산사를 들린 데다 해변을 걸으며 종종 쉬었더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갑자기 주변에 모텔이 있으면 들어가 쉬고 싶어 진다. 그런데 하느님이 내 마음을 아셨나, 길가에 해 담은 모텔이란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얼마 들어가지 않는다. 갑자기 마음이 급회전을 한다. 굳이 방포까지 갈 필요는 없다. 얼마 안 남기는 했지만. 저기 가서 한 번 살펴보고 괜찮으면 머물기로 하자. ‘해담모에 도착했는데 시설이 너무 훌륭하다. 아파트형인데, 지은 지 얼마 안 된듯 조경수들에 지지대를 해놓았고 흙들이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다. 바가지요금을 받을 게 분명해 보여 발길을 돌렸다. 다시 도로로 나와 발길을 옮기려다 그냥 전화나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 해담은입니다.” 싱그러운 여인의 목소리. “혹시, 방 있나요?” “, 몇 분 이시죠?” “도보여행 중인데, 혼자입니다. 가격은 얼마?” “5만 원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싸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 결재를 하며 왜 이렇게 가격이 싸죠?”했더니, 일요일엔 평일 가격을 받는다며, 또 혼자 묵는다고 해서 5천 원을 깎아줬다고 한다. 오매, 좋은 거! 여주인 얼굴을 보니 얼굴이 해맑다. 그래서 해 담은이라고 모텔 이름을 지었나? 카드를 받아 들고 방에 들어갔다. 우와! 그간 지내왔던 모텔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모텔이다. 무인텔 급의 시설에다 베란다까지 있다. 전망도 좋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매, 좋은 거! 베란다 밖 바다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모텔에서 사진 찍기는 처음이다. 나중에 혹 이쪽으로 여행을 오게 되면 다시 한번 오고 싶은 모텔이다. 만약 외관만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연락을 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황이 어려워 보인다고 금방 포기하지 말고 한 번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새삼스런 생각을 해본다. 샤워를 하고 여타 제 의식 행사를 마친 뒤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있으니 마음도 그같이 변했나 야리꾸리한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일은 고성 통일 전망대 근처 금강산 콘도까지 간다. 앞으로 이틀이면 여행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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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일 토요일


몽롱한 상태에서 잠을 깼다. 똥둣간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냄새를 못 맡는데 간밤의 탈취제 냄새는 사라질 줄 모르고 코끝에 달라붙어 계속 나를 자극했다. 밤새 몇 번을 깼다. 도대체 탈취제를 얼마나 뿌렸기에. 아무래도 평창 모텔 살인 사건의 주인공을 만들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어머니 본향의 시조님께서 어여삐 여겨 살려주신 것 같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고도의 초월 축지법을 사용하야 3일 갈 거리를 단 하룻만에 가기로 했다. 안나 할머니께선 평창에서 마평 청심대, 마평 청심대에서 상원사, 상원사에서 양양 서림까지 3일에 걸쳐 이동하셨는데, 나는 곧바로 평창에서 양양으로 비상하기로 한 것. 할머니는 지인도 있고 템플 스테이도 예약을 해놓아 그런 일정이 가능했으나, 나는 그럴만한 형편이 못돼 숙소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초월 축지법을 쓰기로 했다. 게다가 버스에서 구경하는 차창 밖 풍경은 내가 즐기는 오락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도보여행의 정도를 어기는 게 다소 아쉽지만, 어차피 이미 베린 몸, 뭔 대수랴! (아니, 이 자가 이젠...) 더구나 오후엔 비 소식도 있다. 그래도 상원사는 한 번 들려봐야겠다. 한암 스님이 6.25 전쟁 중 목숨을 걸고 지켜낸 절이라니, 도대체 어떤 절이기에 그랬나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아침을 먹은 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모텔에 대한 복수로 이부자리를 그대로 펼쳐놓고 쓰레기도 약간 던져놓을까 하다 그만뒀다. 소심한 자의 양심이 발목을 잡아 그간 해오던 대로 모두 정리를 하고 나왔다. 아줌씨, 제발 탈취제는 쓰지 말아 주세요~. 너무 괴롭습니다. 오늘 숙소는 양양의 () 모텔로 정했다. 후기에 호평이 많았기 때문. 가격도 적당했다. 5만 원. 토요일이니 이해할만한 가격이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평창에서 상원사를 가려면 우선 장평에 가야 하고 장평에서 다시 진부로 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상원사로 간다. 장평행 버스는 715분 출발. 1시간가량 시간이 남아 평창읍내를 한 바퀴 돌아봤다. 간 밤의 불쾌한 경험 때문일까, 이른 아침의 다소 스산한 느낌 때문일까, 평창읍은 마치 황량한 서부의 간이역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의 본향이라 보너스 점수를 주려해도 줄만한 점수가 없었다(평창 관련 분들 노여워 마셔요. 그냥 일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니,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작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띈다. “촌집 팔아요. 4,900만 원. 주택지: 3002,500만 원.” 집은 그렇다 쳐도, 300평에 2,500만 원이면 평당 얼만겨? 8원 조금 넘네? 시상에, 이건 땅값이 아니라 똥값이네. 아니네, 똥값만도 못하네. 정화조 한 번 푸는데도 5만 원이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강원도 땅은 금 따는 콩 밭인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여. 그때 파 엎은 콩 밭이 아직도 회복이 안된 모양이지? 이 사람아, 지금 농담할 때여! 알어. 왜 모르겄어! 슬프니께, 그냥 한 번 웃으려고 농짓거리 한 거지. 작은 현수막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 여기까지는 당시 느꼈던 실제 느낌이다. 그런데 평당 8원은 나의 착오였다. 8만원이 맞다. 산수에 서투른 나의 오류.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나의 생각도 당연히 오류. 농촌 소멸 인구 소멸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8만원은 도시 땅값에 비하면 '똥값'이 분명하지만 일반 시골 땅값에 비하면, 잘은 모르지만, 아주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가격인 것 같다. 내용을 고칠까 하다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쓰고 싶어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노출시켰다. 헤아려 읽으셨기를!


장계 찍고 진부 찍고 상원사 주차장에 내렸다. 상원사 들어오기 전 월정사 입구에서 때 아닌 간첩 심문을 받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데, 월정사 매표소 직원이 올라오더니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첩에게는 5천 원을 받고, 현지인에게는 그보다 적게 혹은 그냥 관대하게 용서하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버스에 타고 있어 입장료는 안내는 줄 알고 얼씨구나 하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애고 그놈의 입장료, 입장료. (사찰 입장료는 54일 자로 몇 군데를 제외하고 폐지됐다. 대신에 국가나 지자체에서 보존해 준다.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니 그게 그거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절 들어갈 때마다 느꼈던 입장료 스트레스가 사라져 잘한 입법이라 생각된다. 굥한테 칭찬하는 것도 있네? 혹시 이것도 천공한테 자문받은 거 아녀?)

조금 오르니 상원사 소개 입간판이 보인다.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 세조 10(1464) 왕사(王師)인 사미 등이 상원사의 중창 경위와 내역에 대해 기록한 것이란다. 왕실의 어첩과 권선문의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선문은 한문과 한글로 적혀있는데 한글 권선문은 한글 창제 당시의 서체와 표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써놨다. 국보란다. 그런데 핵심이 빠져 있다. 상원사 중창은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서 벌인 사업이며, 이 때문에 왕실에서 적지 않은 물품을 하사해 이런 기록물이 남게 된 것인데, 이 사실이 빠져있는 것. 입간판의 중창 권선문 사진을 보니 쌀이 5백 석, 비단이 5백 필, 베가 5백 필, 철이 15천 근 내려진 것으로 나온다. 굉장한 시주이고, 세조(왕실)()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세조의 원찰이었기에 가능했던 하사품이다. 그런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에게 무슨 만수무강을 빌어주며, 또 그것이 고마워 하사품을 내려주는 것은 무슨 행위란 말인가. 대자대비한 부처님이니 다 용서하고 받아주실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내겐 문화재적 가치보다 정교(政敎) 밀착의 추태를 보여주는 산 증거로 보인다 (하긴 그런 것도 문화재적 가치라면 가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과한 생각일까?



상원사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다. 대웅전도 없고 문수전이 대웅전 구실을 한다. 거기다 새로 불사를 해서 허여멀건하기 까지 하다. 뭐여, 기대한 것 하곤 딴 판이네? 경내(境內) 찻집에서 주인에게 물으니, 상원사는 원래 암자였단다. 그려? 선초에 왕실의 총애를 받던 절인데, 암자였다고? 이상한디? 혹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녀? 그러나 절의 규모가 뭐 그리 대수랴. 절에 머물렀던 사람이 더 대수지. 상원사가 유명한 건 6.25 당시 이곳을 불태우려던 국군의 작전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켰던 한암 선사와 그의 제자인 불전(佛典) 한글 번역의 금자탑을 쌓은 탄허 스님 때문이다. 만약 이 두 분 스님이 없었다면 상원사는 별 볼일 없는 절이었을 것이다. 강진에서 다산을 빼면 시체인 것과 매한가지로 말이다. 두 큰 스님의 족적 때문에 이 작은 사찰은 길이 세인/수도인의 메카가 될 것 같다. 상원사를 나오며 시원시원한 현판 글씨 사진을 찍었다. 탄허 스님의 글씨. 어떤 인물이었을지 능히 짐작케 한다.



경내 찻집에서 사치를 부렸다. 대추차 한잔을 마신 것. 7천 원인데, 진했다.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서비스로 고구마 2개를 덤으로 줬다. 이른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했다. 찻집 주인이 적멸보궁을 한 번 가보라고 권한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자들의 필수 코스란다. 시간이 얼마냐 걸리냐니, 남자 걸음으로 한 40분 걸린단다. 불자는 아니지만 시간이 될 듯하여 가보기로 했다. 아까 상원사 주차장에서 올라올 때 간이 승강장의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는데 상원사에서 진부로 가는 버스가 1145분에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15. 깄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오려면 시간이 약간 빠듯하지만 올라가는 시간은 40분이래도 내려오는 시간은 그보다 단축될 터이니, 갔다 올만 하겠다. 찻집을 나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말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꽤 붐빈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계단으로 돼있어 생각보다 오르기가 힘들었다. 이런 길인데도 연세 드신 분들이 오르는 것을 종종 봤다. 사람의 신심(信心)이란 참으로 힘이 센 특이한 물건이다. 가는 중간중간 희한한 돌들이 설치돼 있었다. 끊기지 않고 깎아놓은 사과 껍데기 모양의 소형 돌들이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여기서 소리가 났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오잉, 가만히 가서 살펴보니 속에 앰프 시설이 돼있었다. 적멸보궁의 법회를 중계방송하고 있는 듯했다. 거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뭐 저렇게까지 하는 비웃음도 나오는 물건이었다. 재미 삼아 사진 한 장, 찰칵. 적멸보궁을 한줄기 바람처럼 쓱 휘돌아 본 뒤 바로 하산했다. 부처님, 다음에 시간 여유 있을 때 와서 천천히 둘러볼게요~.



상원사에서 다시 진부로 돌아와 강릉 가는 표를 끊었다. 1230분 차다. 그런데 차가 안 왔다. 뭐여? 시골이니께, 이해 혀! 바로 이어지는 차가 1250분 차라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차에 학생들이 많이 탄다. 강릉으로 놀러 가는 것 같다. 그려, 한참 젊은 나이에 별 볼일 없는 면()에 뭐 볼 것이 있겄어. ()나 가야 볼 것이 있겄지. 문득 중학교 때의 황당한 추억이 떠오른다. ㅇㅇ이와 공주에 영화 보러 놀러 갔었는데, 그게 어떻게 선생님들의 눈에 띄어 다음 날 구타를 당한 것이다. 지금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는데, 당시는 그게 통했다. 나는 그냥 선생님께 싹싹 빌었다. 가슴 아픈 건 이 사건 이후 ㅇㅇ이는 학교를 데면데면 나오다 결국은 그만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잘 살고 있는지? 영화를 보러 가자고 꼬드긴 건 바로 나였기 때문에 ㅇㅇ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서울에서 파고다와 피카딜리 극장을 다녀본 적이 있는 내게 면 단위의 답답한 문화 환경은 말 그대로 답답 그 자체였다(초등학교 4학년 때 시골로 내려왔다). 더구나 머리가 살살 굵어지는 나이인 중학교 때는 그 답답함이 더했다. 하여 모처럼만에 ㅇㅇ이를 꼬드겨 영화 구경을 갔던 것인데, 그 사단이 생긴 것이다. 학교 현장에 있을 때 어쩌다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학생들은 정말요?”를 연발했다. 그때는 그랬다.



강릉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뉴스를 들으니 산불이 심하던데, 터미널이라 그런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하겠다. 이른 점심 때문에 배가 고파 던킨 도너츠에 들어가 5,900원어치 도넛을 사서 허기를 채웠다. 미제의 구정물(지인이 부르는 커피의 별명)도 마실까 하다 그만뒀다. 그간도 주제넘게 많이 마셨는데2시 출발 양양행 버스표를 끊고 대합실 터미널에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차창으로 구경하는 풍경도 재미있지만 대합실 터미널에 물끄러미 앉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맞은편에 로또 판매점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지만 끊어질 만하면 오고 끊어질 만하면 온다. 자기네 판매점에서 ㅇ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홍보물을 써붙였는데, 그게 한몫하는 것 같다. 사실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학교 다닐 때 대립각을 세웠던 교감이 자신은 자식들에게 절대 복권을 사지 말라고 강조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양반, 평소 목소리가 내 큰 목소리의 두 배는 되었다.) 속으로 그러셔? 그건 나하곤 의견이 맞으시네.’ 했다. 나는 복권(로또)() ‘소확행이란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의 피를 빨어먹는 흡혈귀라고 생각한다. 나도 절대로 아이들에게 복권(로또) 사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빵 사 먹으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구경하다, 문득 이병욱 선생님을 떠올렸다. 춘천에 계신데, 갈 수도 있는데. 퇴임했으니 춘천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들리라고 하셨는데. 막국수와 닭갈비를 사주시겠다며. 사실 양양행 버스표를 끊기 전 춘천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예의 수줍은 성격 탓에 막상 선생님을 봬도 당장이야 반갑지만 이후엔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아(술을 마시게 된다면 취해서 횡설수설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뒀다. 온라인상으로 뵙는 것 하고 실제 뵙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병욱 선생님은 알라딘 블로그에서 알게 된 소설가이다. 교사 출신이신데 작고한 소설가 이외수와 자별하게 지내셨다. 최근에 그와 얽힌 청춘 시기를 그린 세 남자의 겨울이란 작품을 펴내셨다. 문단 세계에 과문해 선생님의 위상을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 생각으론, 매우 저평가된 숨은 보석 같은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페북에 이따금 올리는 짧은 글들을 보면 이 분의 내공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여, 세 남자의 겨울을 한 번 사 읽어 보시라! 내 말이 과히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외수 작고 즈음 전후하여 출판되고 빵빵한 광고 날렸으면 적지 않은 부수가 팔렸으리라 생각한다. 선생님께 전화라도 한 번 할까 하다 이 역시 그만뒀다. 어쩌면 그리운 채로 그냥 멀리 지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피천득이 아사코를 마지막 만났을 때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차라리 아니 만났으면 좋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냥 온라인상으로만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양양행 버스가 왔다. 양양으로 양양하게 출발~.


비가 와서 그런가 약간 노곤하다. 양양에 도착할 때까지 간간이 졸았다. 터미널이 외진 곳에 있었다. 의외. 비 뿌리는 속을 돌진하여 중간에 마트에 잠깐 들렀다 숙소인 몽 모텔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숙소에 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우중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거 애초 약속과 다르다. 숙박비가 6만 원이라고 돼있다. 사람도 없고 키오스크로만 결재하게 돼있다. 순간 기분이 ~’해졌다. 1만 원이면 식사 한 끼 값인데야속했지만, 다른 데를 찾기가, 우중이라, 너무 귀찮다. 그냥, 결정! 짐을 풀고 아까운 만원을 생각해 간이식으로 저녁을 때울까 하다가 우중에 30여분 이상을(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걸어와 뜨거운 국물 있는 것을 먹고 싶어 과감히(!) 저녁을 사먹으러 모텔 밖으로 나갔다. 칼국수 집이 바로 눈앞에 띄었다. 우중에, 칼국수, 좋지! 망설임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완전한 저녁 시간대라 아니라 그런가 썰렁하다. 손님 두 분이 소주를 들고 있었다. 닭칼국수 메뉴가 눈에 띄어 주문했다. 내온 칼국수는 그렇고 그랬다. 그래도, 뜨듯한 국물 있는 것을 먹을수 있으니, 이게 어디냐! 정신없이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일찌감치 저녁 제 의식을 치르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도 제천에서처럼 TV가 거대하다. 요즘 큰 화면의 TV 설치가 모텔의 유행인가? 채널을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역시나 볼만한 게 없다. 그런데 이 모텔, 그간의 모텔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TV밑에 성인방송 채널 시청 비번을 붙여 놓은 것.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그런데 성인 방송 채널을 눌러보니 지금은 준비 중운운하며 10시 이후에 시청이 가능하다고 나온다. 10시까지 기둘러? 아이고, 앓느니 죽지. 그냥 이것저것 서로 저 잘났다고 저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애들을 그려 그려하며 고루고루 쓰다듬어주다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밤 꿈엔 오랜만에 내 님이나 한번 만나보자. 불을 끄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내일은 고성 봉포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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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일 금요일


아버지는 끝내 꿈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긴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꿈속에서 뵌 적이 없는데 뭐 급한 일이 생겼다고 갑자기 꿈에 나타나실까. 지금 계신 곳에선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다. 앱을 켜고 평창읍까지의 거리를 확인하니 42km11시간 9분 걸린다고 나온다. 서둘러야겠다. 시답잖은 먹을거리로 아침 식사를 한 뒤 여타 제 의식을 끝내고 출입문을 나섰다. 모텔 현관으로 내려가는데 어제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림 한 점이 눈길을 끈다. 클림트의 그림인가? 화사한 황금빛으로 나무 세 그루와 들판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사람 하나를 그려 놓았다. 아니, 그려 놓았다기보다 살짝 점을 찍어 놓았다. 뭔가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내 눈길을 끄는 걸 보니 나의 그 어떤 무의식 세계를 설명해 줄 그림 같은 생각이 든다. 사진 한 장, 찰칵. 심리학을 전공하는 분한테 왜 저 그림에 호감이 갔는지 물어보면 뭔가 그럴듯한 해설을 해줄 것 같다. 모텔 문을 나서서 시계를 봤다. 65. , 평창을 향하야 출발! 오늘 숙소는 평창장 여관으로 정했다. 가장 저렴한 가격이었기 때문. 이제는 쓰지 않는 여관이란 이름이 향수(鄕愁)를 일으킨 것도 한몫했다. 그리 좋은 느낌의 향수는 아니지만.



숙소를 나와 큰 도로를 걸으며 노변 풍경을 하나 찍었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다시 제천에 올 일이 있을까? 앞날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올 일이 거의 없을 것 같다. 안녕~, 제천!



희한한 구호를 써붙인 중학교가 보인다. “나는 내토 중학교 주인임이 자랑스럽습니다.” 또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 진다. ‘는 재학생이여? 졸업생이여? 교장이여? 교직원이여? 그리고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겨? , 대충 무슨 의도에서 써붙인 것인지 짐작은 가지만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애매모호한 구호이다.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넘의 중학교 구호를 보고 괜한 꼬장을 부리는 것을 보면 난 정말 구호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체질인 것 같다. , 거창하게 체질까지.



길가의 쓰레기 중 역사적인 기념물이 될 쓰레기 사진을 하나 찍는다. 레쓰 비(Let’s be) 커피 캔.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본 쓰레기이다. 앞으로도 가장 많이 볼 것이 틀림없다. 강진읍 한 24시 마트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찢어진 배낭을 버릴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사러 갔는데, 약간 맛이 간 듯한 중년 사내가 레쓰 비를 사려고 했다. 여주인이 일갈했다. “아저씨, 이제 그만 드셔!” 가게 주인에게 듣기 어려운 말을 들었음에도 이 중년 사내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 왜 그랴, 먹고 싶어.”라고 했다. 여주인이 계속 안 팔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가게를 나왔다. 저 정도 되면 중독이라고 해야 할 것, 아니, 중독이다! 싼 값의 달콤한 커피 음료로 잠시나마 고단한 세상사 잊고 즐거워지고 싶은 사내의 마음을 능히 헤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저 사내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수많은 이들이 레쓰 비로 인하여 커피 중독이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통계를 본 적도 내 본 일도 없지만 여행 중 접한 레쓰 비쓰레기를 보건대 틀림없지 않을까 싶다. 제조사인 롯데칠성음료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과문해서 그런지, 롯데칠성음료가 이에 대해 뭔가 합당한 조치를 했다는 소식은 접한 적이 없다. 장사하는 이들에게 무슨 도덕을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최소한의 도덕을 덧칠해 놓는 것이 종국적으론 그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롯데칠성, 내 말 잘 귀담아 들어주셔. (위키 백과를 검색해 보니, ‘Let’s Be‘우리 함께라는 뜻의 ‘Let’s Be Together’에서 ‘Together’를 줄인 말로 '캔커피를 마실 때에는 항상 레쓰 비를 마시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나온다. 나는 막연히 '살아갑시다정도의 의미로 이해했는데, 오해였다.)



하천에 수북이 올라온 잡초들을 본다. 문득 뜬금없는 생각을 한다. 저 풀들이 없다면 세상은.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꽃이나 나무보다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저 하천에 수북이 올라오는 풀들 같다. 새삼 사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고맙다, 얘들아~. 기념사진도 한 장, 찰칵.



시멘트 공장을 지난다. 분진이 많아 잠시 마스크를 썼다. 위용이 대단하다. 사진을 찍어보는데 평면 각도에서 상향 각도로 바꿔 찍어보니 그 위용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산업사회 역군의 대명사 시멘트 공장. 이제는 왠지 뒷전에 나앉은 노인 느낌이다. 그래서 그럴까, 대단한 위용임에도 괜스레 슬퍼 보인다. 이런 나의 애잔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대형 트럭들이 왔다 갔다 하며 빨리 가라고 먼지를 일으킨다. 알았슈, 가면 될 거 아뉴~.



송학면 장곡리(제천시 소재다)를 지나다 신경림 시인의 시집 을 주웠다. 그런데 이거 참 묘하다. 길가에서 책을 주운 것도 그렇고, 하필 주운 책의 제목이이란 것도 그렇다. 또 한 가지 묘한 것은 이 시집을 노변의 무덤 앞 길에서 주웠다는 것이다(노변엔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작자가 지각없이 버린 페휴지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연속에 숨겨진 그 어떤 의미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제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아버님(어머님), 소자 이제 고향을 떠나고자 하옵니다. 아버님(어머님)이 즐겨 읽으시던 책을 무덤 앞에 놓사오니 인연 닿는 자 만나면 주시옵소서. 언제 또 올까 모르겠습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쿨럭쿨럭(기침).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된 책이 아닐까? 시집을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책은 숙소에 도착해 휴지로 깨끗이 닦고 헤어 드라이기로 말렸다. 노변에 여러 날 방치됐는지 책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은 신 시인의 기행시집이라 혹시 내가 지나온 곳 혹은 갈 곳과 일치되는 곳이 있나 살펴봤는데(내가 느낀 것과 비교해 보고 싶어서), 한 두 곳 일치되는 곳이 있을 뿐 대부분 달랐다. 일치되는 곳도 그 지역에 대한 적실한 객관적 느낌보다 다분히 주관적인 느낌을 그려 별반 호감이 가지 않았다. 애써 주워온 것에 비해선 별 볼일 없었던 셈. 집에 돌아올 때까지 간직했는데, 책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심해 결국 버리고 말았다. 대신 기념의 의미로 중고판 을 한 권 새로 샀다. ‘우연속에 숨겨진 그 어떤 의미은 결국 이런 거였다. “이보게, 길가에 버려진 책은 그냥 두고 지나가시게.”)



강원도로 넘어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런데 환대하는 태도가 너무 밍밍하다. 충북에서는 번듯한 인사를 받았는데. 진태 씨, 신경 좀 쓰셔~. 작은 친절이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른다우. 허기사 맨날 높은디서만 생활해서 낮은 곳 사정을 워치게 알겄어? 강릉 산불 났던 날도 골프 치셨다매? 좌우지간 신경 좀 쓰셔. 하대하는 말투도 너무 기분 나뻐하지 마시고. 같은 본은 아닐지래두 항렬을 보니 증손자 뻘 같아서 약간 말 놓은 겨. 이해 허시지?



영월 들어서는 입구를 지났다. 조금 전에 대형 트럭이 지나갔는데, 저 앞에서 차가 선다. 좀 위험해 보인다. 뭐여, 길 가에다 대형 트럭을 세우고. 속으로 약간 투덜거리며 지나려는데 기사 분이 나보고 뭐라고 한다. 뭐지? 볼 일 없는데? 못 들은 척하고 지나려는데 또 부른다. “?” “도보여행 중이신가요?” “, !” 기사 분한테 갔더니 고생한다며 커피 음료를 주신다. 세상에!! 너무 감동해 180° 인사를 드렸다. 얼굴을 보니 내 나이 또래이거나 조금 아래일 것 같다.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발길을 옮겼다. 기사 분이 뒤에서 출발해 지나갈 때 손을 흔들었더니, 기사 분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속으로 기원했다. ‘기사님, 많이 힘드시죠?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기사 분이 준 커피 음료를 배낭에 넣기도 뭐 하고 갖고 다니기도 뭐 해 그냥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더운 날씨에 고카페인 커피를 들이키니 몸에서 가짜 힘이 막 솟구친다. 나는 야, 에너자이저! 이 사람이...여행 중 은근 여러 차례 커피 먹었어. 안뎌, 자네 몸엔 안 맞는 음료여. 조심혀. ~.


단종대왕 유배길이라는 안내판을 만난다. 그러고 보니, 영월은 단종의 유배지로구나. 애달픈 임금, 이 외에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도대체 정치가, 권력이 무엇이기에 삼촌이 조카를 죽인 것이냐. 수양대군(세조)을 이리저리 재평가도 하더만서도 그 이의 가장 큰 실책은 역시 유교 이념 국가의 그 이념을 스스로 뒤집은데 있다. 그것도 주춧돌을 놓는 국초에. 하기사 할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 장악에서 이미 그것은 뒤집혔다만서도. 어쩌면 수양대군은 그 뒤집힌 것을 아예 뭉개버렸다고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애달픈 임금, 단종. 학교 때 배웠던 왕방연의 시조를 읊어 본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오매, 저것이 뭣이다냐? 배 가르기 좋아하는 일본 놈들, 칼로 배 가른 뒤 꾸물럭 꾸물럭 삐져나온 허연 내장 같은 것들이 건공중에 이어져있다. 뭐지? 길이가 한 참 된다. 가까이 가면서 붙여놓은 표지판을 보니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이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석회석 채취 산이 보인다. 저기서 채취해 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가공 공장으로 옮기는가 보다. 중간 기착지인듯한데를 지나는데 회사 사람이 나온다. 점심 시간대라 점심 먹으러 나가는 듯싶다. 다짜고짜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을 다시 한번 물어 재확인한 뒤, 저기 보이는 산에서 얼마간 채취했고 앞으로 얼마간 더 채취하냐고 물으니, 30년 채취했고 앞으로 한 50년 정도 더 채취할 수 있다고 답해줬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분이었는데, “뭐냐? 너는?”하는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다.



30년 동안 갈취당했고 앞으로 50년 동안 더 갈취당할 산을 지난다. 그런데 이게 뭔 요상한 마음이냐? 갈취당한 헐벗은 산을 보는데 애처로운 느낌보다 장엄한 느낌이 드니. 황야의 돌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 것. 이건 필시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로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문곡 초등학교 덕산 분교장이란 폐교를 지난다. 원래부터도 분교였으니, 조그마한 학교였을 터. 흡사 반공 소년 이승복이 다녔을 법한 학교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딸과 아들이 다닌 초등학교에 이승복 상이 있었는데(지금도 있다), 그게 아직도 유효한 상()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배가 고프다. 배낭에서 누룽지를 꺼내 씹으면서 간다.



드디어 평창 입성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반가운 인사는 없다. 얼마간 가니 원동재 정상이라며 해발 400m라는 것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보인다. 별생각 없이 발길을 옮겼는데 상당한 고지(高地)에 올라온 것이다. 눈길을 돌려 아래를 쳐다보니 해발 400m라는 고지가 실감 난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다. ‘해발 400m’라는 고지(告知)보다 무척 높은데 왔슈. 한 번 내려다 봐유.’라고 써놨으면 어땠을까? 정상에 섰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지?



노거수(老巨樹)를 만난다. 안내판을 보니 400년이 넘는단다. 가만히 나무를 안고 귀 기울이면 수많은 사연들을 들려줄 것 같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받을까 봐. 강원이라 그럴까, 아직 벚꽃이 한창이다. 하얀 팝콘을 터뜨린 지 얼마안 된 벚나무를 만났다. 아내에게 줄 선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아니, 여기가. 평창이씨시조재실(平昌李氏始祖齋室)을 만난다. 오늘은 참 묘한 날이다. 길에서 이란 시집을 줍더니, 어머니의 본향 시조를 모신 사당을 만나다니. 우연엔 어떤 숨은 의미가 숨어있는 것일까? 이 사람아, 그 이전에 자신을 좀 반성 혀. 평창, 하면 당연히 먼저 어머니의 본향이란 걸 떠올렸어야 하는 거 아녀? 저 재실을 보기 전엔 그런 생각 꿈에도 못했지? 기껏 떠올린 건 아마 평창동계올림픽 정도였을 껴, 맞지? 반성 혀! 그렇구나! , 나의 무심함이여! 어머니, 죄송합니다!



계제에 어머니 얘기나 한 번 해야겠다. 어머니는 1924년생 이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여성에게는 비교적 고학력인 보통학교를 나오셨다. 결혼 전에 신용조합에도 얼마간 다니셨다. 또래의 다른 분들에 비해서는 개화되신 편이었던 셈. 어머니의 삶이 꼬인 건 결혼부터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처승이셨는데 어머니의 사주를 보고 후처로 들어가야 명이 길다고 어머니를 후처로 결혼시키셨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상처(喪妻) 상태셨다. 그리고 먼저 간 처에게서 얻은 딸도 있었다. 그런데 시집을 와보니 애매한 상태의 여자분이 집에 있었다. 아버지 수발을 들어주고 있던 분이었는데, 이분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도 있었고 게다가 이 여자분이 데리고 들어온 딸도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맞닥뜨린 젊은 새색시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분은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결국엔 집을 나갔다. 어머니와의 불화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간 부인에게서 얻은 딸 등쌀에 못 이겨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은 죽은 자식을 포함해 6 남매였다. 그런데 어머니 호적엔 이후에 본인이 낳지 않은 기() 두 딸을 포함해 세 명의 자식이 더 올라가게 된다. 어머니와의 혼인 이후 아버지의 바람기로 얻은 자식들이었던 것.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의 바람기로 얻은 자식은 그 어머니 되는 분이 건사한 것이다. 아버지와 돌아간 부인의 몸에서 난 딸은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평생 어머니께 깍듯한 대우를 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집을 나간 분의 딸과 어머니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딸이 어머니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처럼 위장해 아버지가 어머니를 핍박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딸은 이렇게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오랜 세월 어머니 곁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음에도 가정사에는 등한해 살림할 돈을 내놓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살림을 꾸리려 독학으로 바느질을 배우셨고, 이는 어머니의 평생 직업이 됐다. 이후 어머니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건 ‘6.25’()’였다. 6.25 당시 인공 치하에서 어머니는 여맹위원장을 맡을 뻔했다. 사는 게 하도 괴로워 하려고 했던 것. 그런데, 아버지가 그거 하면 다시는 자식 볼 생각 말라.”고 해서 하지 못했다. 만약에 여맹위원장을 했다면, 진즉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신묘하게도 외할아버지의 점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는 어머니가 살림을 위해 벌였던 것인데, 중간에 자기 몫을 타고 도망한 사람들이 생겨 지금으로 말하면 연쇄부도 비슷한 상황이 돼 계주였던 어머니는 도망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 60년대 말이었다. 어머니는 7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한복점을 하셨다. 나중에 내가 찾아보게 될 익선동에서 왕성 한복이란 한복점을 하셨는데, 꽤 잘 됐다. 그런데 보험 사기를 당하셔서 종국엔 거의 무일푼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오셨다. 이후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바느질로 빚진 곗돈을 갚으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빚진 곗돈 갚기는 내게까지 이어졌다. 고향에 돌아오신 이후 드신 계를 어머니 생전에 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 사후에 내가 갚은 것이다(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내가 철이 일찍 들어 대출이라도 받아 어머니 생전에 홀가분하게 빚을 청산해 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머니는 생애 말년에 큰 일을 하나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자 혼자 추레하게 살면 남보기 안좋다며 집을 거의 새로 짓다시피 개조하신 것. 자식들 도움 하나도 안 받으시고 혼자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한 뒤 위암 3기 판정을 받으시고 6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1996년이었고 72세 셨다. 나는 막내 누님과 나이 차이가 8살이고 큰 형님과는 18년 차이가 있어, 위에 써 내린 사연들 대부분은 어머니나 누님들한테 들은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버지의 흉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는 건 어머니의 삶이 너무도 안타깝기 때문이며, 어머니의 안타까운 삶을 통해 남자로서 남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마음을 다지는데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 괴로워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결코 아버지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늘 주의를 주셨는데, 이 점이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귀에 어머니의 당부가 들리는 듯하다. “너는 그래도 아버지한테 잘해야 한다.” 자식들이 엇나갈까 봐 노심초사하셨던 어머니의 염려 때문에 오늘날 남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연히 만난 평창이씨시조재실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 아닐까? 특히, 남편이 더.


415분이 돼간다. ‘원미 막국수라는 홍보 간판이 보인다. , ~국수! 그래 오늘 저녁은 저걸로! 식당에 도착했는데, 5시부터 저녁 시작이라며 기다리란다. 기다리는 거야, 선수지! 산골 물을 끌어들인 수도가 있어 성난 발들을 달래주고 잠시 쉬었다. 정각 5시가 되니, 들어오란다. 한 사람분만 만들 수 없어 5시부터 들어오라고 했단다. 다른 손님이 안 오면 어쩌냐니, 온단다! 미안함을 살짝 덜어내고, 주인집 딸이 내온 막국수를 대했다. 오매, 맛있는 거! 후루룩 쩝쩝. 단숨에 비웠다. 값을 보니 75백 원이라고 돼있다. 주인집 딸에게 만 원짜리 현금을 내니 3천 원을 거슬러준다. 5백 원 더 받으셔야는데하니, 됐다며 쾌활하게 웃는다. 튼실한 몸매에 얼굴도 너부대대한데, 왜 이리 이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목표했던 숙소, ‘평창 여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거 장소가 영~ 후미진 데다 주변도 어수선하다. 이름도 여관에서 모텔로 바뀌어 있다. 혹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큰 규모의 모텔을 봤는데, 거기로 갈까 하다 그냥 머물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나오는데 순창에서 만났던 그 여주인의 언니쯤 돼 보이는 이가 나온다. , 잘못 들어왔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방을 달라며 얼마냐고 물으니, 4만 원이란다. 금요일이니 받을만한 금액이긴 한데, 그래도 왠지 비싼 느낌이다. 배정된 방으로 가는데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날 듯한 상황일 때 보여주는 그런 음산한 분위기가 맴돈다. 이거, ‘평창 모텔 살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녀? 방에 들어갔는데 예상했던 대로 시설이 후줄근하고 예의 노후된 숙소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배낭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댓자로 누웠다. ,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났구나. 언제부턴가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눈떠서 움직이면 어느새 숙소에 도착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점점 마지막 지점에 다가오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빨리 저녁 의식 행사를 치르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난다. 샤워를 하고 나와 제 저녁 의식을 치르고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런데 이부자리에서 탈취제 냄새가 난다. 모텔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민박에서도 이러지 않았다. TV를 켜고 이것저것 시답잖은 프로를 보다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자는 중에 자꾸 잠을 깼다. 탈취제 냄새 때문. 최악의 여관이었다. 평창에서의 잠은 결코 平昌(평창)하지 않았다). 내일은 양양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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