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금요일
아버지는 끝내 꿈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긴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꿈속에서 뵌 적이 없는데 뭐 급한 일이 생겼다고 갑자기 꿈에 나타나실까. 지금 계신 곳에선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다. 앱을 켜고 평창읍까지의 거리를 확인하니 42km에 11시간 9분 걸린다고 나온다. 서둘러야겠다. 시답잖은 먹을거리로 아침 식사를 한 뒤 여타 제 의식을 끝내고 출입문을 나섰다. 모텔 현관으로 내려가는데 어제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림 한 점이 눈길을 끈다. 클림트의 그림인가? 화사한 황금빛으로 나무 세 그루와 들판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사람 하나를 그려 놓았다. 아니, 그려 놓았다기보다 살짝 점을 찍어 놓았다. 뭔가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내 눈길을 끄는 걸 보니 나의 그 어떤 무의식 세계를 설명해 줄 그림 같은 생각이 든다. 사진 한 장, 찰칵. 심리학을 전공하는 분한테 왜 저 그림에 호감이 갔는지 물어보면 뭔가 그럴듯한 해설을 해줄 것 같다. 모텔 문을 나서서 시계를 봤다. 6시 5분. 자, 평창을 향하야 출발! 오늘 숙소는 ‘평창장 여관’으로 정했다. 가장 저렴한 가격이었기 때문. 이제는 쓰지 않는 ‘여관’이란 이름이 향수(鄕愁)를 일으킨 것도 한몫했다. 그리 좋은 느낌의 향수는 아니지만.
숙소를 나와 큰 도로를 걸으며 노변 풍경을 하나 찍었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다시 제천에 올 일이 있을까? 앞날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올 일이 거의 없을 것 같다. 안녕~, 제천!
희한한 구호를 써붙인 중학교가 보인다. “나는 내토 중학교 주인임이 자랑스럽습니다.” 또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 진다. ‘나’는 재학생이여? 졸업생이여? 교장이여? 교직원이여? 그리고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겨? 뭐, 대충 무슨 의도에서 써붙인 것인지 짐작은 가지만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애매모호한 구호이다.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넘의 중학교 구호를 보고 괜한 꼬장을 부리는 것을 보면 난 정말 구호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체질인 것 같다. 뭐, 거창하게 체질까지….
길가의 쓰레기 중 역사적인 기념물이 될 쓰레기 사진을 하나 찍는다. 레쓰 비(Let’s be) 커피 캔.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본 쓰레기이다. 앞으로도 가장 많이 볼 것이 틀림없다. 강진읍 한 24시 마트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찢어진 배낭을 버릴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사러 갔는데, 약간 맛이 간 듯한 중년 사내가 ‘레쓰 비’를 사려고 했다. 여주인이 일갈했다. “아저씨, 이제 그만 드셔!” 가게 주인에게 듣기 어려운 말을 들었음에도 이 중년 사내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아, 왜 그랴, 먹고 싶어.”라고 했다. 여주인이 계속 안 팔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가게를 나왔다. 저 정도 되면 중독이라고 해야 할 것, 아니, 중독이다! 싼 값의 달콤한 커피 음료로 잠시나마 고단한 세상사 잊고 즐거워지고 싶은 사내의 마음을 능히 헤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저 사내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수많은 이들이 ‘레쓰 비’로 인하여 커피 중독이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통계를 본 적도 내 본 일도 없지만 여행 중 접한 ‘레쓰 비’ 쓰레기를 보건대 틀림없지 않을까 싶다. 제조사인 롯데칠성음료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과문해서 그런지, 롯데칠성음료가 이에 대해 뭔가 합당한 조치를 했다는 소식은 접한 적이 없다. 장사하는 이들에게 무슨 도덕을… 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최소한의 도덕을 덧칠해 놓는 것이 종국적으론 그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롯데칠성, 내 말 잘 귀담아 들어주셔. (위키 백과를 검색해 보니, ‘Let’s Be‘는 ‘우리 함께’라는 뜻의 ‘Let’s Be Together’에서 ‘Together’를 줄인 말로 '캔커피를 마실 때에는 항상 레쓰 비를 마시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나온다. 나는 막연히 '살아갑시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했는데, 오해였다.)
하천에 수북이 올라온 잡초들을 본다. 문득 뜬금없는 생각을 한다. 저 풀들이 없다면 세상은….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꽃이나 나무보다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저 하천에 수북이 올라오는 풀들 같다. 새삼 사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고맙다, 얘들아~. 기념사진도 한 장, 찰칵.
시멘트 공장을 지난다. 분진이 많아 잠시 마스크를 썼다. 위용이 대단하다. 사진을 찍어보는데 평면 각도에서 상향 각도로 바꿔 찍어보니 그 위용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산업사회 역군의 대명사 시멘트 공장. 이제는 왠지 뒷전에 나앉은 노인 느낌이다. 그래서 그럴까, 대단한 위용임에도 괜스레 슬퍼 보인다. 이런 나의 애잔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대형 트럭들이 왔다 갔다 하며 빨리 가라고 먼지를 일으킨다. 알았슈, 가면 될 거 아뉴~.
송학면 장곡리(제천시 소재다)를 지나다 신경림 시인의 시집 『길』을 주웠다. 그런데 이거 참 묘하다. 길가에서 책을 주운 것도 그렇고, 하필 주운 책의 제목이『길』이란 것도 그렇다. 또 한 가지 묘한 것은 이 시집을 노변의 무덤 앞 길에서 주웠다는 것이다(노변엔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작자가 지각없이 버린 페휴지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연’ 속에 숨겨진 그 어떤 ‘의미’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제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아버님(어머님), 소자 이제 고향을 떠나고자 하옵니다. 아버님(어머님)이 즐겨 읽으시던 책을 무덤 앞에 놓사오니 인연 닿는 자 만나면 주시옵소서. 언제 또 올까 모르겠습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쿨럭쿨럭(기침).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된 책이 아닐까? 시집을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책은 숙소에 도착해 휴지로 깨끗이 닦고 헤어 드라이기로 말렸다. 노변에 여러 날 방치됐는지 책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길』은 신 시인의 기행시집이라 혹시 내가 지나온 곳 혹은 갈 곳과 일치되는 곳이 있나 살펴봤는데(내가 느낀 것과 비교해 보고 싶어서), 한 두 곳 일치되는 곳이 있을 뿐 대부분 달랐다. 일치되는 곳도 그 지역에 대한 적실한 객관적 느낌보다 다분히 주관적인 느낌을 그려 별반 호감이 가지 않았다. 애써 주워온 것에 비해선 별 볼일 없었던 셈. 집에 돌아올 때까지 간직했는데, 책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심해 결국 버리고 말았다. 대신 기념의 의미로 중고판 『길』을 한 권 새로 샀다. ‘우연’ 속에 숨겨진 그 어떤 ‘의미’은 결국 이런 거였다. “이보게, 길가에 버려진 책은 그냥 두고 지나가시게.”)
강원도로 넘어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런데 환대하는 태도가 너무 밍밍하다. 충북에서는 번듯한 인사를 받았는데. 진태 씨, 신경 좀 쓰셔~. 작은 친절이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른다우. 허기사 맨날 높은디서만 생활해서 낮은 곳 사정을 워치게 알겄어? 강릉 산불 났던 날도 골프 치셨다매? 좌우지간 신경 좀 쓰셔. 하대하는 말투도 너무 기분 나뻐하지 마시고. 같은 본은 아닐지래두 항렬을 보니 증손자 뻘 같아서 약간 말 놓은 겨. 이해 허시지?
영월 들어서는 입구를 지났다. 조금 전에 대형 트럭이 지나갔는데, 저 앞에서 차가 선다. 좀 위험해 보인다. 뭐여, 길 가에다 대형 트럭을 세우고. 속으로 약간 투덜거리며 지나려는데 기사 분이 나보고 뭐라고 한다. 뭐지? 볼 일 없는데? 못 들은 척하고 지나려는데 또 부른다. “예?” “도보여행 중이신가요?” “아, 예!” 기사 분한테 갔더니 고생한다며 커피 음료를 주신다. 세상에!! 너무 감동해 180° 인사를 드렸다. 얼굴을 보니 내 나이 또래이거나 조금 아래일 것 같다.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발길을 옮겼다. 기사 분이 뒤에서 출발해 지나갈 때 손을 흔들었더니, 기사 분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속으로 기원했다. ‘기사님, 많이 힘드시죠?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기사 분이 준 커피 음료를 배낭에 넣기도 뭐 하고 갖고 다니기도 뭐 해 그냥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더운 날씨에 고카페인 커피를 들이키니 몸에서 가짜 힘이 막 솟구친다. 나는 야, 에너자이저! 이 사람이...여행 중 은근 여러 차례 커피 먹었어. 안뎌, 자네 몸엔 안 맞는 음료여. 조심혀. 네~.
‘단종대왕 유배길’이라는 안내판을 만난다. 그러고 보니, 영월은 단종의 유배지로구나. 애달픈 임금, 이 외에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도대체 정치가, 권력이 무엇이기에 삼촌이 조카를 죽인 것이냐. 수양대군(세조)을 이리저리 재평가도 하더만서도 그 이의 가장 큰 실책은 역시 유교 이념 국가의 그 이념을 스스로 뒤집은데 있다. 그것도 주춧돌을 놓는 국초에. 하기사 할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 장악에서 이미 그것은 뒤집혔다만서도. 어쩌면 수양대군은 그 뒤집힌 것을 아예 뭉개버렸다고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애달픈 임금, 단종. 학교 때 배웠던 왕방연의 시조를 읊어 본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오매, 저것이 뭣이다냐? 배 가르기 좋아하는 일본 놈들, 칼로 배 가른 뒤 꾸물럭 꾸물럭 삐져나온 허연 내장 같은 것들이 건공중에 이어져있다. 뭐지? 길이가 한 참 된다. 가까이 가면서 붙여놓은 표지판을 보니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이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석회석 채취 산이 보인다. 저기서 채취해 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가공 공장으로 옮기는가 보다. 중간 기착지인듯한데를 지나는데 회사 사람이 나온다. 점심 시간대라 점심 먹으러 나가는 듯싶다. 다짜고짜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을 다시 한번 물어 재확인한 뒤, 저기 보이는 산에서 얼마간 채취했고 앞으로 얼마간 더 채취하냐고 물으니, 30년 채취했고 앞으로 한 50년 정도 더 채취할 수 있다고 답해줬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분이었는데, “뭐냐? 너는?”하는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다.
30년 동안 갈취당했고 앞으로 50년 동안 더 갈취당할 산을 지난다. 그런데 이게 뭔 요상한 마음이냐? 갈취당한 헐벗은 산을 보는데 애처로운 느낌보다 장엄한 느낌이 드니. 황야의 돌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 것. 이건 필시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로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문곡 초등학교 덕산 분교장이란 폐교를 지난다. 원래부터도 분교였으니, 조그마한 학교였을 터. 흡사 반공 소년 이승복이 다녔을 법한 학교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딸과 아들이 다닌 초등학교에 이승복 상이 있었는데(지금도 있다), 그게 아직도 유효한 상(像)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배가 고프다. 배낭에서 누룽지를 꺼내 씹으면서 간다.
드디어 평창 입성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반가운 인사는 없다. 얼마간 가니 ‘원동재 정상’이라며 해발 400m라는 것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보인다. 별생각 없이 발길을 옮겼는데 상당한 고지(高地)에 올라온 것이다. 눈길을 돌려 아래를 쳐다보니 해발 400m라는 고지가 실감 난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다. ‘해발 400m’라는 고지(告知)보다 ‘무척 높은데 왔슈. 한 번 내려다 봐유.’라고 써놨으면 어땠을까? 정상에 섰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지?
노거수(老巨樹)를 만난다. 안내판을 보니 400년이 넘는단다. 가만히 나무를 안고 귀 기울이면 수많은 사연들을 들려줄 것 같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받을까 봐. 강원이라 그럴까, 아직 벚꽃이 한창이다. 하얀 팝콘을 터뜨린 지 얼마안 된 벚나무를 만났다. 아내에게 줄 선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아니, 여기가…. 평창이씨시조재실(平昌李氏始祖齋室)을 만난다. 오늘은 참 묘한 날이다. 길에서 『길』이란 시집을 줍더니, 어머니의 본향 시조를 모신 사당을 만나다니. 이 ‘우연’엔 어떤 숨은 ‘의미’가 숨어있는 것일까? 이 사람아, 그 이전에 자신을 좀 반성 혀. 평창, 하면 당연히 먼저 어머니의 본향이란 걸 떠올렸어야 하는 거 아녀? 저 재실을 보기 전엔 그런 생각 꿈에도 못했지? 기껏 떠올린 건 아마 평창동계올림픽 정도였을 껴, 맞지? 반성 혀! 그렇구나! 아, 나의 무심함이여! 어머니, 죄송합니다!
계제에 어머니 얘기나 한 번 해야겠다. 어머니는 1924년생 이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여성에게는 비교적 고학력인 보통학교를 나오셨다. 결혼 전에 신용조합에도 얼마간 다니셨다. 또래의 다른 분들에 비해서는 개화되신 편이었던 셈. 어머니의 삶이 꼬인 건 결혼부터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처승이셨는데 어머니의 사주를 보고 후처로 들어가야 명이 길다고 어머니를 후처로 결혼시키셨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상처(喪妻) 상태셨다. 그리고 먼저 간 처에게서 얻은 딸도 있었다. 그런데 시집을 와보니 애매한 상태의 여자분이 집에 있었다. 아버지 수발을 들어주고 있던 분이었는데, 이분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도 있었고 게다가 이 여자분이 데리고 들어온 딸도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맞닥뜨린 젊은 새색시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분은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결국엔 집을 나갔다. 어머니와의 불화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간 부인에게서 얻은 딸 등쌀에 못 이겨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은 죽은 자식을 포함해 6 남매였다. 그런데 어머니 호적엔 이후에 본인이 낳지 않은 기(旣) 두 딸을 포함해 세 명의 자식이 더 올라가게 된다. 어머니와의 혼인 이후 아버지의 바람기로 얻은 자식들이었던 것.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의 바람기로 얻은 자식은 그 어머니 되는 분이 건사한 것이다. 아버지와 돌아간 부인의 몸에서 난 딸은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평생 어머니께 깍듯한 대우를 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집을 나간 분의 딸과 어머니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딸이 어머니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처럼 위장해 아버지가 어머니를 핍박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딸은 이렇게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오랜 세월 어머니 곁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음에도 가정사에는 등한해 살림할 돈을 내놓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살림을 꾸리려 독학으로 바느질을 배우셨고, 이는 어머니의 평생 직업이 됐다. 이후 어머니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건 ‘6.25’와 ‘계(契)’였다. 6.25 당시 인공 치하에서 어머니는 여맹위원장을 맡을 뻔했다. 사는 게 하도 괴로워 하려고 했던 것. 그런데, 아버지가 “그거 하면 다시는 자식 볼 생각 말라.”고 해서 하지 못했다. 만약에 여맹위원장을 했다면, 진즉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신묘하게도 외할아버지의 점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계’는 어머니가 살림을 위해 벌였던 것인데, 중간에 자기 몫을 타고 도망한 사람들이 생겨 지금으로 말하면 연쇄부도 비슷한 상황이 돼 계주였던 어머니는 도망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 60년대 말이었다. 어머니는 7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한복점을 하셨다. 나중에 내가 찾아보게 될 익선동에서 ‘왕성 한복’이란 한복점을 하셨는데, 꽤 잘 됐다. 그런데 보험 사기를 당하셔서 종국엔 거의 무일푼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오셨다. 이후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바느질로 빚진 곗돈을 갚으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빚진 곗돈 갚기는 내게까지 이어졌다. 고향에 돌아오신 이후 드신 계를 어머니 생전에 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 사후에 내가 갚은 것이다(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내가 철이 일찍 들어 대출이라도 받아 어머니 생전에 홀가분하게 빚을 청산해 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머니는 생애 말년에 큰 일을 하나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자 혼자 추레하게 살면 남보기 안좋다며 집을 거의 새로 짓다시피 개조하신 것. 자식들 도움 하나도 안 받으시고 혼자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한 뒤 위암 3기 판정을 받으시고 6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1996년이었고 72세 셨다. 나는 막내 누님과 나이 차이가 8살이고 큰 형님과는 18년 차이가 있어, 위에 써 내린 사연들 대부분은 어머니나 누님들한테 들은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버지의 흉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는 건 어머니의 삶이 너무도 안타깝기 때문이며, 어머니의 안타까운 삶을 통해 남자로서 남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마음을 다지는데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 괴로워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결코 아버지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늘 주의를 주셨는데, 이 점이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귀에 어머니의 당부가 들리는 듯하다. “너는 그래도 아버지한테 잘해야 한다.” 자식들이 엇나갈까 봐 노심초사하셨던 어머니의 염려 때문에 오늘날 남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연히 만난 평창이씨시조재실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 아닐까? 특히, 남편이 더.
4시 15분이 돼간다. ‘원미 막국수’라는 홍보 간판이 보인다. 오, 막~국수! 그래 오늘 저녁은 저걸로! 식당에 도착했는데, 5시부터 저녁 시작이라며 기다리란다. 기다리는 거야, 선수지! 산골 물을 끌어들인 수도가 있어 성난 발들을 달래주고 잠시 쉬었다. 정각 5시가 되니, 들어오란다. 한 사람분만 만들 수 없어 5시부터 들어오라고 했단다. 다른 손님이 안 오면 어쩌냐니, 온단다! 미안함을 살짝 덜어내고, 주인집 딸이 내온 막국수를 대했다. 오매, 맛있는 거! 후루룩 쩝쩝. 단숨에 비웠다. 값을 보니 7천5백 원이라고 돼있다. 주인집 딸에게 만 원짜리 현금을 내니 3천 원을 거슬러준다. 5백 원 더 받으셔야는데… 하니, 됐다며 쾌활하게 웃는다. 튼실한 몸매에 얼굴도 너부대대한데, 왜 이리 이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목표했던 숙소, ‘평창 여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거 장소가 영~ 후미진 데다 주변도 어수선하다. 이름도 ‘여관’에서 ‘모텔’로 바뀌어 있다. 혹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큰 규모의 모텔을 봤는데, 거기로 갈까 하다 그냥 머물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나오는데 순창에서 만났던 그 여주인의 언니쯤 돼 보이는 이가 나온다. 아, 잘못 들어왔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방을 달라며 얼마냐고 물으니, 4만 원이란다. 금요일이니 받을만한 금액이긴 한데, 그래도 왠지 비싼 느낌이다. 배정된 방으로 가는데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날 듯한 상황일 때 보여주는 그런 음산한 분위기가 맴돈다. 이거, ‘평창 모텔 살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녀? 방에 들어갔는데 예상했던 대로 시설이 후줄근하고 예의 노후된 숙소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배낭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댓자로 누웠다. 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났구나. 언제부턴가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눈떠서 움직이면 어느새 숙소에 도착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점점 마지막 지점에 다가오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빨리 저녁 의식 행사를 치르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난다. 샤워를 하고 나와 제 저녁 의식을 치르고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런데 이부자리에서 탈취제 냄새가 난다. 모텔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민박에서도 이러지 않았다. TV를 켜고 이것저것 시답잖은 프로를 보다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자는 중에 자꾸 잠을 깼다. 탈취제 냄새 때문. 최악의 여관이었다. 평창에서의 잠은 결코 平昌(평창)하지 않았다). 내일은 양양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