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 ㅇㅇㅇ 영세불망비
옛 관아 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석 명칭이에요. 흔히 선정비 혹은 송덕비라고 부르는 것들이죠. 이 비석들은 많은 경우 조선조 후기에 세워졌어요. 그런데, 알다시피, 조선조 후기는 군소민란이 잦았던 시기예요. 이런 시기에 선정비 혹은 송덕비가 많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당시의 혼란상을 반증하는 거예요. 대부분 강제하여 세운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 중엔 분명 진솔한 마음으로 세운 것도 있을 거예요.
사진은 송곡서원(서산 소재)에 있는 류양학의 기공비[업적을 기리는 비]예요. 1935년에 세워졌어요. 이 비는 강제하여 세운 걸까요, 진솔한 마음으로 세운 걸까요? 송곡서원은 1693년(숙종 19)에 세워진 서원으로 9분의 선현을 배향하고 있어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10년에 중건됐어요.
내용이 길으니 끊어서 읽어 볼까요?
有非常之功者 當得非常之名 勒之金石垂之竹帛 使之稱思乎後世而爲之法也 太常之紀鐘鼎之銘 尙矣 止如峴山漢水之一沈一立 以備陵谷之遷者 非玆故歟 유비상지공자 당득비상지명 륵지금석수지죽백 사지칭사호후세이위지법야 태상지기종정지명 상의 지여현산한수지일침일립 이비능곡지천자 비자고여
특별한 공이 있는 사람은 응당 그 이름을 금석에 새기고 죽백[역사책]에 남겨 후인이 그것을 칭송하고 사모케 해 좋은 모본이 되게 해야 한다. 태상[천자나 임금의 깃발]에 기록하고 종정[종이나 솥]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당연하며 현산과 한수에 세우고 넣어서 언덕과 계곡으로 변할 것에 대비케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瑞山松谷祠 寔鄕先生俎豆之所也 旣廢而重建也 柳公在根瑾錫 固已賢勞矣 然財詘擧贏 如蘋藻之薦堂宇之治 乃歲歲所有事者 而物力有未逮 서산송곡사 식향선생조두지소야 기폐이중건야 유공재근근석 고이현로의 연재굴거영 여빈조지천당우지치 내세세소유사자 이물력유미체
서산 송곡사는 향선생(퇴임후 지방에서 후학을 교육시킨 이들]에게 제향을 드리는 곳이다. 훼철되었다가 중건됐는데 류재근공과 류근석공의 노력이 컸다. 그러나 재물은 부족하고 공사는 커 제수[제사용 물품]의 준비와 당우[건물]의 수리는 해마다 있었지만 온전한 정비는 어려웠다.
於是 琴村柳公以是爲己任 號呼於襟紳洎諸先生之後 湖嶺數千里 脚血奔走 十餘年不怠 卒以成緖 爾來建堂宇門廡者 凡十六間 計數割田者 凡四町一半步 乃定有司 朝望上香 又增爲一歲兩享之儀 旣合旣完 長久遠不替 於乎 偉矣 어시 금촌류공이시위기임 호호어금신기제선생지후 호령수천리 각혈분주 십여년불태 졸이성서 이래건당우문무자 범십육간 계수할전자 범사정일반보 내정유사 조망상향 우증위일세양향지의 기합기완 장구원불체 오호 위의
이에 금촌(琴村) 류공이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 사림과 이곳에 모신 선생들의 후손에게 호소하느라 영호남 수 천리를 다리에 피가 나도록 왕복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년, 마침내 일의 실마리가 잡혔다. 이후 당우와 문무[문과 곁채]를 세운 것이 모두 16칸이고, 수요를 헤아려 토지를 장만한 것이 4정 1반보[대략 1만 3천평 정도]였다. 아울러 유사[전담자]를 정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올리게 하고 보태어 1년에 두번 제사를 드리게 한 바 합당하고 온당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재물의 구비로 이 일이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게 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邦人士皆以是爲琴村之功 無間焉 將伐石紀功 屬不佞爲文 顧非其人 然知公之有是豐功 則雅矣 因敍其實以歸之 公名瀁學字公習 自號曰琴村 琴軒葦村二先生之肖孫也 방인사개이시위금촌지공 무간언 장벌석기공 촉불녕위문 고비기인 연지공지유시풍공 즉아의 인서기실이귀지 공명양학자공습 자호왈금촌 금헌위촌이선생지초손야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금촌공의 공적이라고 여기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에 비석을 세워 그의 공을 기록하려 함에 불초에게 비문을 의뢰했다. 내 그만한 인물이 되지 못함을 잘 아나 공에게 이런 훌륭한 공적이 있음을 본디부터 잘 알기에 그 사실을 서술하여 보냈다. 공의 이름은 양학이고 자는 공습이며 자호는 금촌이다. 이 서원에 모신 금헌[류방택]과 위촌[류백순] 두 선생의 족손이기도 하다.
비문의 내용 중 “이 일(제대로 된 중건)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와 "영호남 수 천리를 다리에 피가 나도록 왕복"했다는 대목을 보면 류양학이 서원의 중창을 위해 매우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서원용 전답을 마련한 내용을 보면, 비문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본인의 재산도 상당 부분 희사했을 것으로 보여요. 비문이란 것이 원래 약간의 과장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해도 류양학이 충심으로 서원의 중창을 위해 애쓴 것은 틀림없어 보여요. 이렇게 보면 이 기공비는 강제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어요. 옛 지방 관아 주변에 차고 넘치는 선정비와는 격이 다른 비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드는 건 왜일까요? 대부분의 선정비가 역으로 시대의 난맥상을 보여주듯 이 기공비 역시 역으로 류양학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류양학이 서원의 중창을 위해 애쓴 시기는 일제 강점기예요. 일제 강점기에 선현 배향을 위해 서원 중창에 애쓴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요? 차라리 그 노력을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애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서원의 본래 기능 중의 하나였던 강학을 활성화시키던가. 일제 강점기 서당은 항일 정서를 키우는 기관으로 지목되어 탄압을 받았어요. 서원은 서당보다 격이 높은 기관이니, 만일 강학 기능을 되살렸다면, 항일 정서를 키우는 더없이 훌륭한 기관이 됐을 거예요(물론 일제의 탄압이 만만치 않았겠지만요). 류양학의 노력은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노력이었을지 모르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맹목적 노력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핵심적인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勒은 革(가죽 혁)과 力(힘 력)의 합자예요. 마구의 한 종류인 굴레라는 뜻이에요. 革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力은 음(력→륵)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力은 밖으로 드러난 근육의 모양을 그린 것인데, 굴레는 그같이 외관상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고 있어요. 굴레 륵. 새기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새길 륵. 勒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勒絆(늑반, 고삐), 勒文(늑문, 문장을 돌에 새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紀는 糸(실 사)와 己(몸 기)의 합자예요. 실타래란 뜻이에요. 糸로 뜻을 표현했어요. 己는 음을 담당해요. 실타래 기. 적다(쓰다)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기록의 초기 형태는 실을 묶어 표현하는 것이었다고 하잖아요? 적을 기. 紀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紀綱(기강), 紀事(기사, 사실을 기록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銘은 金(쇠 금)과 名(이름 명)의 합자예요. 공적이 많은 사람의 일을 금석에 새긴다는 의미예요. 새길 명. 銘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碑銘(비명), 銘心(명심,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겨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緖는 糸(실 사)와 者(놈 자)의 합자예요. 실마리란 뜻이에요. 糸로 뜻을 표현했어요. 者는 음(자→서)을 담당해요. 실마리 서. 緖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端緖(단서), 頭緖(두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偉는 亻(사람 인)과 韋(違의 약자, 어길 위)의 합자예요. 뛰어난 사람이란 뜻이에요. 亻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韋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보통 사람과 다른 이가 뛰어난 사람이란 의미로요. 뛰어날 위. 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偉大(위대), 偉業(위업, 위대한 사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功은 工(장인공, 본래 자[尺]를 그린 것으로 규준 법도란 의미 내포)과 力(힘 력)의 합자예요. 국가가 요구하는 일정한 규준과 법도에 맞게 세운 업적이란 뜻이에요. 力은 뜻을, 工은 뜻과 음을 담당해요. 공 공. 功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功績(공적), 成功(성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肖는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小(작을 소)의 합자예요. 후손이 선조의 외형과 비슷하다는 뜻이에요. 외형의 모습을 내포한 月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小는 음(소→초)을 담당해요. 닯을 초. 肖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不肖(불초), 肖像(초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앞서 류양학의 공을 다소 혹평했는데, 그의 공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서원의 강학 기능을 되살려 국학 관련 학과 학생들이 정규 커리큘럼으로 이 시설을 이용하게 하는 거예요. 행 · 재정 뒷받침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건물의 유지 보수에도 보탬이 되고 국학 관련 학과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에도 보탬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