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 ㅇㅇㅇ 영세불망비

  

옛 관아 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석 명칭이에요. 흔히 선정비 혹은 송덕비라고 부르는 것들이죠. 이 비석들은 많은 경우 조선조 후기에 세워졌어요. 그런데, 알다시피, 조선조 후기는 군소민란이 잦았던 시기예요. 이런 시기에 선정비 혹은 송덕비가 많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당시의 혼란상을 반증하는 거예요. 대부분 강제하여 세운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 중엔 분명 진솔한 마음으로 세운 것도 있을 거예요


사진은 송곡서원(서산 소재)에 있는 류양학의 기공비[업적을 기리는 비]예요. 1935년에 세워졌어요. 이 비는 강제하여 세운 걸까요, 진솔한 마음으로 세운 걸까요? 송곡서원은 1693(숙종 19)에 세워진 서원으로 9분의 선현을 배향하고 있어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10년에 중건됐어요.

  

내용이 길으니 끊어서 읽어 볼까요?

  

有非常之功者 當得非常之名 勒之金石垂之竹帛 使之稱思乎後世而爲之法也 太常之紀鐘鼎之銘 尙矣 止如峴山漢水之一沈一立 以備陵谷之遷者 非玆故歟 유비상지공자 당득비상지명 륵지금석수지죽백 사지칭사호후세이위지법야 태상지기종정지명 상의 지여현산한수지일침일립 이비능곡지천자 비자고여

  

특별한 공이 있는 사람은 응당 그 이름을 금석에 새기고 죽백[역사책]에 남겨 후인이 그것을 칭송하고 사모케 해 좋은 모본이 되게 해야 한다. 태상[천자나 임금의 깃발]에 기록하고 종정[종이나 솥]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당연하며 현산과 한수에 세우고 넣어서 언덕과 계곡으로 변할 것에 대비케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瑞山松谷祠 寔鄕先生俎豆之所也 旣廢而重建也 柳公在根瑾錫 固已賢勞矣 然財詘擧贏 如蘋藻之薦堂宇之治 乃歲歲所有事者 而物力有未逮 서산송곡사 식향선생조두지소야 기폐이중건야 유공재근근석 고이현로의 연재굴거영 여빈조지천당우지치 내세세소유사자 이물력유미체

  

서산 송곡사는 향선생(퇴임후 지방에서 후학을 교육시킨 이들]에게 제향을 드리는 곳이다. 훼철되었다가 중건됐는데 류재근공과 류근석공의 노력이 컸다. 그러나 재물은 부족하고 공사는 커 제수[제사용 물품]의 준비와 당우[건물]의 수리는 해마다 있었지만 온전한 정비는 어려웠다.

  

於是 琴村柳公以是爲己任 號呼於襟紳洎諸先生之後 湖嶺數千里 脚血奔走 十餘年不怠 卒以成緖 爾來建堂宇門廡者 凡十六間 計數割田者 凡四町一半步 乃定有司 朝望上香 又增爲一歲兩享之儀 旣合旣完 長久遠不替 於乎 偉矣 어시 금촌류공이시위기임 호호어금신기제선생지후 호령수천리 각혈분주 십여년불태 졸이성서 이래건당우문무자 범십육간 계수할전자 범사정일반보 내정유사 조망상향 우증위일세양향지의 기합기완 장구원불체 오호 위의

  

이에 금촌(琴村) 류공이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 사림과 이곳에 모신 선생들의 후손에게 호소하느라 영호남 수 천리를 다리에 피가 나도록 왕복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년, 마침내 일의 실마리가 잡혔다. 이후 당우와 문무[문과 곁채]를 세운 것이 모두 16칸이고, 수요를 헤아려 토지를 장만한 것이 41반보[대략 13천평 정도]였다. 아울러 유사[전담자]를 정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올리게 하고 보태어 1년에 두번 제사를 드리게 한 바 합당하고 온당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재물의 구비로 이 일이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게 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邦人士皆以是爲琴村之功 無間焉 將伐石紀功 屬不佞爲文 顧非其人 然知公之有是豐功 則雅矣 因敍其實以歸之 公名瀁學字公習 自號曰琴村 琴軒葦村二先生之肖孫也 방인사개이시위금촌지공 무간언 장벌석기공 촉불녕위문 고비기인 연지공지유시풍공 즉아의 인서기실이귀지 공명양학자공습 자호왈금촌 금헌위촌이선생지초손야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금촌공의 공적이라고 여기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에 비석을 세워 그의 공을 기록하려 함에 불초에게 비문을 의뢰했다. 내 그만한 인물이 되지 못함을 잘 아나 공에게 이런 훌륭한 공적이 있음을 본디부터 잘 알기에 그 사실을 서술하여 보냈다. 공의 이름은 양학이고 자는 공습이며 자호는 금촌이다. 이 서원에 모신 금헌[류방택]과 위촌[류백순] 두 선생의 족손이기도 하다


비문의 내용 중 이 일(제대로 된 중건)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영호남 수 천리를 다리에 피가 나도록 왕복"했다는 대목을 보면 류양학이 서원의 중창을 위해 매우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서원용 전답을 마련한 내용을 보면, 비문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본인의 재산도 상당 부분 희사했을 것으로 보여요. 비문이란 것이 원래 약간의 과장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해도 류양학이 충심으로 서원의 중창을 위해 애쓴 것은 틀림없어 보여요. 이렇게 보면 이 기공비는 강제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어요. 옛 지방 관아 주변에 차고 넘치는 선정비와는 격이 다른 비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드는 건 왜일까요? 대부분의 선정비가 역으로 시대의 난맥상을 보여주듯 이 기공비 역시 역으로 류양학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류양학이 서원의 중창을 위해 애쓴 시기는 일제 강점기예요. 일제 강점기에 선현 배향을 위해 서원 중창에 애쓴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요? 차라리 그 노력을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애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서원의 본래 기능 중의 하나였던 강학을 활성화시키던가. 일제 강점기 서당은 항일 정서를 키우는 기관으로 지목되어 탄압을 받았어요. 서원은 서당보다 격이 높은 기관이니, 만일 강학 기능을 되살렸다면, 항일 정서를 키우는 더없이 훌륭한 기관이 됐을 거예요(물론 일제의 탄압이 만만치 않았겠지만요). 류양학의 노력은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노력이었을지 모르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맹목적 노력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핵심적인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가죽 혁)(힘 력)의 합자예요. 마구의 한 종류인 굴레라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은 밖으로 드러난 근육의 모양을 그린 것인데, 굴레는 그같이 외관상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고 있어요. 굴레 륵. 새기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새길 륵.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勒絆(늑반, 고삐), 勒文(늑문, 문장을 돌에 새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실 사)(몸 기)의 합자예요. 실타래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실타래 기. 적다(쓰다)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기록의 초기 형태는 실을 묶어 표현하는 것이었다고 하잖아요? 적을 기.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紀綱(기강), 紀事(기사, 사실을 기록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쇠 금)(이름 명)의 합자예요. 공적이 많은 사람의 일을 금석에 새긴다는 의미예요. 새길 명.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碑銘(비명), 銘心(명심,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겨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실 사)(놈 자)의 합자예요. 실마리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실마리 서.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端緖(단서), 頭緖(두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사람 인)(의 약자, 어길 위)의 합자예요. 뛰어난 사람이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보통 사람과 다른 이가 뛰어난 사람이란 의미로요. 뛰어날 위.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偉大(위대), 偉業(위업, 위대한 사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장인공, 본래 자[]를 그린 것으로 규준 법도란 의미 내포)(힘 력)의 합자예요. 국가가 요구하는 일정한 규준과 법도에 맞게 세운 업적이란 뜻이에요. 은 뜻을, 은 뜻과 음을 담당해요. 공 공.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功績(공적), 成功(성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고기 육)(작을 소)의 합자예요. 후손이 선조의 외형과 비슷하다는 뜻이에요. 외형의 모습을 내포한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닯을 초.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不肖(불초), 肖像(초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앞서 류양학의 공을 다소 혹평했는데, 그의 공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서원의 강학 기능을 되살려 국학 관련 학과 학생들이 정규 커리큘럼으로 이 시설을 이용하게 하는 거예요. · 재정 뒷받침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건물의 유지 보수에도 보탬이 되고 국학 관련 학과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에도 보탬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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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1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찔레꽃 2019-05-11 20:09   좋아요 0 | URL
반가워, 동근아. 잘 지내고 있지? 객지에 나가면 늘 건강이 우선이야. 앞으로도 종종 들려 줘~ ^ ^

2019-05-12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식재료 매진.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어제 지인의 초대로 홍성군 홍동면에 갔어요. 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약간의 한담을 나누다 나왔는데 식당 앞 입간판에 저 문구가 써있더군요. "아니 벌써 오늘 영업 끝난 겨! 야, 장사 할 만 하겄다!" 동행한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어요. 토요일인데다 면내엔, 소규모지만, 임시 장터가 열려 사람들이 제법 많았어요. 음식점 주인도 진즉에 이 상황을 알았으렸만 어째서 돈 벌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의아스럽더군요. 그런데 지인에게 물어보니 이런 영업 행태가 어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배짱좋게(?) 영업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더군요.


그 이유는 바로 사진의 '로컬푸드' 때문이었어요. 홍동면은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로컬푸드의 정착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긴밀하기 때문에 손익 분기점이 거의 일정하다고 해요. 그러니 일부러 무리하여 장사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외부 손님들이 많이 와야 이익을 낼 수 있는 일반 식당과는 운영 틀 자체가 다른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즉 언제나 준비한 식재료는 다 매진된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지, 식당 메뉴도 다양하더군요. 청국장, 추어탕, 돈까스, 비빔밥, 한우 곰탕. 장사가 안돼서 이런 저런 메뉴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즐겨 찾는 메뉴이기에 마련한 거였어요. 후식으로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요구르트를 주더군요.


"우리나라 로컬푸드는 중소규모 생산자에게 새로운 판로를 제공하는 '농산물 제값받기'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나 생산자 주도 직거래는 상품 구색 갖춤이 부족하여 소매업에서는 대부분 실패하였다. 1980년대 이후 소비자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교육하며 조직한 생협이 농산물 직거래를 주도하면서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 관계 구축을 전제로 지속적인 거래로 정착하였다. 로컬푸드는 생협의 성과를 바탕으로 대량생산, 대량유통이 주도하는 유통구조를 지역에서 생산과 소비를 완결하며 지역 내 유통 구조를 복원하는 운동으로 실현되고 있다." (정은미 외 2인,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로컬푸드 추진 전략과 정책과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88쪽)


인용문은 우리나라 로컬푸드의 기원과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경제'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런데 홍동면의 로컬푸드는 이런 관점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아, 사진은 음식점에서 찍은 거예요) 홍동면의 로컬푸드는 '환경과 생태'에 우선 방점을 두고 있거든요. 이는 이 지역의 센터 역할을 하는 풀무고등농업기술학교와 관련성이 깊어 보여요. 이 학교는 환경과 생태를 중시하는 농업 교육을 하고 있고, 이 곳 졸업생들이 이 지역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홍동면의 유명한 오리농법 쌀도 이 학교 출신 주형로 씨가 처음 시작했죠.


많은 이들이 농업의 미래를 암울하게 보는데 이곳 홍동면에서는 미래의 희망으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로컬푸드는 그 희망의 일단인 듯 싶구요.


사진의 한자는 '지산지소(地産地消)'라고 읽어요.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한다'란 뜻이에요. 로컬푸드의 한문식 표기인데 로컬푸드보다 그 의미가 한결 더 분명해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더군요. 로컬푸드가 활성화 될수록 이 말도 많이 활성화될 것 같아요. 아쉬운 것은 두 말 다 외래어라는 점이에요. 좋은 우리 말 표현이 만들어져 유행했으면 좋겠어요.


消가 좀 낯설죠? 자세히 살펴 볼까요? 消는 氵(水의 변형, 물 수)와 肖(削의 약자, 깎을 삭)의 합자예요. 물이 다 말라버렸다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肖은 음(삭→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무가 깎여 나가듯 물이 점점 줄어 다 말라버렸다는 의미로요. 다할(꺼질) 소. 消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消盡(소진), 消防(소방) 등을 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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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http://www.koreanart21.com>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아 / 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 /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 반딧불 쫓아서 즐기었건만 /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실향민은 주로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죠. 실향민에게 가곡 꿈 속의 고향은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는 노래일 것 같아요. 그러나 정작 그 고향에 가보게 됐을 때 느끼는 심정은 어떠할까요

  

오래도록 애모해왔던 사람을 실제 만나면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 때문에 많이 실망하게 된다고 하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내가 변했듯이 상대도 변한 게 당연하련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실향민의 심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어요. 하여 어쩌면 이런 말을 절로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꿈속에 그릴 때가 좋았어~”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만 실향민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은 물리적으로 가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물리적으로 가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실향민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옳을 거예요

  

죄송한 말이지만, 북에 고향을 둬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실향민들이 남에 고향을 둔 실향민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고향은 꿈속에 그릴 때가 행복할 것 같기에 말이죠.

  

사진은 조선 전기 3대 초서가의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예요. 꿈 속의 고향가사의 원형 같은 느낌을 주는 시예요.

  

山水情老更新 산수정회노경신   산수에 대한 그리움 나이 들수록 더해

如何長作未여하장작미귀인   어이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신세로 계속 있으리

桃花下靑蓮舍 벽도화하청련사   예 놀던 벽도화 아래 청련사

臺入夢 경도요대입몽두   경도(瓊島) 요대() 자주 꿈속에서 본다오

  

학성에서 친구에게[鶴城寄友人]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노경에 지은 시로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어요. 양사언은 40여 년 동안 환로(宦路)를 걸었던 사람이에요. 평생을 외지로 떠돌았으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을 거예요. 꿈속에서 만나는 고향의 정경 표현이 그 그리움의 정도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양사언은 해배(解配)길에 객사했다고 해요. 그토록 그리던 고향을 죽어서야 돌아간 것인데, 눈을 감을 때 회한의 감정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회한의 감정이 많았기에 행복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향을 평생토록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간직할 수 있었기에 말이죠.

  

이 시에 등장하는 시어 벽도화 · 청련 · 경도 · 요대 등은 도가적 경향이 강한 시어예요. 도가적 경향이 있는 사람은 탈속을 지향하죠. 이 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 것이지만 은연중에 양사언의 가치관도 드러내고 있어요. 양사언은 40여 동안 환로를 걸으면서 축재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요. 이는 그의 도가적 경향성과 무관치 않아 보여요. 아울러 이 글씨에서도 그의 도가적 경향성이 엿보여요. 문외한인 제가 봐도 시원시원한 기풍이 탈속적인 풍모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거든요.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과시 틀리지 않는 말이에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懷 忄(마음심)(품을 회)의 합자예요. 물건을 품속에 간직하듯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의미예요. 품을 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懷抱(회포), 懷妊(회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시집가다는 뜻이에요. 여성은 시집을 가야 평생토록 머물 장소를 얻게 된다는 의미로 (그칠지)를 주 의미로 삼고, 시집을 가면 아내가 된다는 의미로 (아내부)의 약자로 부 의미를 삼았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시집갈 귀. 의미를 부연하여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해요. 돌아갈 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歸家(귀가), 歸還(귀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구슬 옥)의 약자와 (돌 석)(흰 백)의 합자예요. 옥과 흡사하며 창백한 빛이 도는 돌이란 의미예요. 구슬 벽. 푸를 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碧眼(벽안), 碧玉(벽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적색의 값진 구슬이란 의미예요. (의 변형, 구슬 옥)의 약자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옥 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瓊田(경전, 좋은 밭), 瓊室(경실, 화려한 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머리 혈)(의 약자, 건널 섭)의 합자예요. 물을 건널 적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되풀이하여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예요. 자주 빈.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頻繁(빈번), 頻度(빈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양사언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면모는, 앞서 언급한대로, 초서의 대가라는 점에 있어요. 조선 전기 초서 3대가의 한사람으로, 혹은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죠. 과거의 지식인은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기에 오늘날의 시각 - 한 분야에 정통한 것이 지식인이라는 - 으로 과거의 지식인을 평가하면 자칫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양사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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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하신지요? 그간 주물럭 거렸던 무거리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지난 번에는 『길에서 주운 한자』란 제호를 달았는데, 이번에는 『길에서 만난 한자』라는 제호를 달았습니다. 전작(前作)이 한자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생각 중심이라 제호에 약간 변화를 주었습니다.

 

전작에서 서평을 부탁드렸던 벗님들의 격려와 충고가 이번 책을 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자 중심보다 생각 중심으로 책을 내게 된 것도 그 도움의 일단입니다(순오기 님의 충고). 이제는 더 이상 제 블로그를 찾지 않으시는(흑흑, 제게는 몹시 슬픈 일입니다) 한 벗님의 충고, 저자 자신보다 독자를 우선시하라는 충고도 이번 책에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격려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찬에 가까운 서평을 해주신 벗님의 서평이 이번 책을 내는데 큰 힘이 됐다는 것도 고백합니다(양철나무꾼 님의 격려).

 

충고든 격려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번 책에 대한 벗님들의 충고와 격려를 듣고 싶습니다. 주소와 성함을 남겨 주시면 책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공으로 책을 받으면 부담스러워 서평쓰기 어렵다며 마다하시는 분도 많으신 것, 잘 압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없다고 봅니다. 나쁜 면과 좋은 면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고, 이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서평용 책을 요청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어 서평을 해주시는 것, 그것 자체가 제게는 보내드린 책을 상회하는 큰 보답입니다.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내내 건승하시길 기원드리며

 

2019. 4. 21(일)

 

찔레꽃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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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1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8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찔레꽃 2020-01-02 11:06   좋아요 0 | URL
네! ^ ^ 주소를 알려 주시겠어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요`~ ^ ^

2020-01-0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3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3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란 글의 일절이에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투사(鬪士)로 살았던 분이 민족의 사업으로 힘주어 말한 것이 강성대국(强盛大國)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문화국이었다는 것이 놀라워요. 거대한 땅과 폭력을 추구하는 야만의 독재 시대를 청산하고 작은 땅과 문화라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협력과 공존의 시대를 지향했던 선생에게선 정치가적 면모보다는 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두드러져 보여요

  

정치인들 중에 그를 좋아하면서도 정치가로서는 후한 점수를 매기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선생의 면모가 큰 요인이라고 해요. 복마전 같았던 해방정국을 해쳐 나가기 위해서는 여우의 지혜도 필요했는데 선생은 우직한 곰과 같은 면모만 보였다는 거죠.

  

그러나 그런 우직한 면모를 가졌던 분이었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그 분의 가치가 더 빛나는 것 같아요. 당시 노회한 술수로 정국을 헤쳐 갔던 많은 이들 대표적인 인물이 김일성과 이승만이죠 이 역사의 매서운 평가에 부침(浮沈)하는 것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죠. 물론 김구 선생에 대한 평가도 긍정 일색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여러 인물에 비교해보면 긍정 우위를 점하는 건 확실해요.

  

사진은 김구 선생이 환국하기 전날 저녁에 쓰신 휘호예요. 불변응만변 을유추반국전석 백범 김구(不變應萬變 乙酉秋返國前夕 白凡 金九)라고 읽어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온갖 변화에 대응하자 / 을유년(1945) 가을 고국으로 돌아가긴 전날 저녁 백범 김구 쓰다라고 풀이해요.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는 노 독립투사의 만감(萬感)이 서린 휘호예요. 자력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온갖 이념과 노선으로 갈가리 나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죠. 여기 불변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바로 민족이죠. ‘만변역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바로 혼란한 해방 정국을 가리키죠. 이 휘호에서도 선생의 우직한 면모가 느껴져요

  

당시 많은 이들이 선생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부르짖었지만 이면에는 자신(自身)’자당(自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했죠. 이는 선생 역시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자신과 임정(臨政)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러나 그 강도, 즉 자신과 자당이 민족보다 우선시돼야 한다는 마음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더 약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협상이 결렬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북의 김일성을 만나러 간 것이 그 한 증좌(證佐)예요. 확실히 선생은 정치가적 면모보다는 지사로서의 면모가 강했어요. 사진의 글씨도 그런 면모를 보여줘요. 다소 거칠지만 결기에 찬 아우라를 발산하는 글씨예요.

  

두자만 자세히 살펴볼까요?

  

은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여 변화 시키다란 의미예요, (칠 복)을 사용하여 의미를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변할 변.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急變(급변), 變貌(변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마음 심)(기러기 안)의 합자예요. 뜻이 모아진다는 의미예요. 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흐트러짐 없이 무리지어 나르는 기러기처럼 뜻이 모아졌다는 의미로요. 합할(응할)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應接(응접), 相應(상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사진은 JTBC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김병기 교수가 한 강의 중에 등장한 거예요. 이 휘호는 현재 상해 임시정부 청사 건물에 있다고 해요. 김 교수는 많은 이들이 한자 한문에 무관심하다보니 선열들이 남겨놓은 유묵을 그저 아무개 글씨래정도로만 여기고 그 의미나 가치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그 한 사례로 이 휘호를 들었어요. 출연자 중 한 사람도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갔었는데 이 글씨를 봤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자책을 하더군요. 십분 공감되는 강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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