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http://www.koreanart21.com>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아 / 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 /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 반딧불 쫓아서 즐기었건만 /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실향민은 주로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죠. 실향민에게 가곡 「꿈 속의 고향」은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는 노래일 것 같아요. 그러나 정작 그 고향에 가보게 됐을 때 느끼는 심정은 어떠할까요?
오래도록 애모해왔던 사람을 실제 만나면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 때문에 많이 실망하게 된다고 하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내가 변했듯이 상대도 변한 게 당연하련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실향민의 심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어요. 하여 어쩌면 이런 말을 절로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꿈속에 그릴 때가 좋았어~”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만 실향민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은 물리적으로 가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물리적으로 가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실향민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옳을 거예요.
죄송한 말이지만, 북에 고향을 둬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실향민들이 남에 고향을 둔 실향민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고향은 꿈속에 그릴 때가 행복할 것 같기에 말이죠.
사진은 조선 전기 3대 초서가의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예요. 「꿈 속의 고향」 가사의 원형 같은 느낌을 주는 시예요.
山水情懷老更新 산수정회노경신 산수에 대한 그리움 나이 들수록 더해
如何長作未歸人 여하장작미귀인 어이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신세로 계속 있으리
碧桃花下靑蓮舍 벽도화하청련사 예 놀던 벽도화 아래 청련사
瓊島瑤臺入夢頻 경도요대입몽두 경도(瓊島) 요대(瑤臺) 자주 꿈속에서 본다오
「학성에서 친구에게[鶴城寄友人]」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노경에 지은 시로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어요. 양사언은 40여 년 동안 환로(宦路)를 걸었던 사람이에요. 평생을 외지로 떠돌았으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을 거예요. 꿈속에서 만나는 고향의 정경 표현이 그 그리움의 정도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양사언은 해배(解配)길에 객사했다고 해요. 그토록 그리던 고향을 죽어서야 돌아간 것인데, 눈을 감을 때 회한의 감정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회한의 감정이 많았기에 행복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향을 평생토록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간직할 수 있었기에 말이죠.
이 시에 등장하는 시어 벽도화 · 청련 · 경도 · 요대 등은 도가적 경향이 강한 시어예요. 도가적 경향이 있는 사람은 탈속을 지향하죠. 이 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 것이지만 은연중에 양사언의 가치관도 드러내고 있어요. 양사언은 40여 동안 환로를 걸으면서 축재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요. 이는 그의 도가적 경향성과 무관치 않아 보여요. 아울러 이 글씨에서도 그의 도가적 경향성이 엿보여요. 문외한인 제가 봐도 시원시원한 기풍이 탈속적인 풍모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거든요.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과시 틀리지 않는 말이에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懷 忄(마음심)과 褱(품을 회)의 합자예요. 물건을 품속에 간직하듯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의미예요. 품을 회. 懷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懷抱(회포), 懷妊(회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歸는 시집가다는 뜻이에요. 여성은 시집을 가야 평생토록 머물 장소를 얻게 된다는 의미로 止(그칠지)를 주 의미로 삼고, 시집을 가면 아내가 된다는 의미로 婦(아내부)의 약자로 부 의미를 삼았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시집갈 귀. 의미를 부연하여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해요. 돌아갈 귀. 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歸家(귀가), 歸還(귀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碧은 王(玉의 변형, 구슬 옥)의 약자와 石(돌 석)과 白(흰 백)의 합자예요. 옥과 흡사하며 창백한 빛이 도는 돌이란 의미예요. 구슬 벽. 푸를 벽. 碧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碧眼(벽안), 碧玉(벽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瓊은 적색의 값진 구슬이란 의미예요. 王(玉의 변형, 구슬 옥)의 약자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옥 경. 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瓊田(경전, 좋은 밭), 瓊室(경실, 화려한 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頻은 頁(머리 혈)과 步(涉의 약자, 건널 섭)의 합자예요. 물을 건널 적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되풀이하여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예요. 자주 빈. 頻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頻繁(빈번), 頻度(빈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양사언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면모는, 앞서 언급한대로, 초서의 대가라는 점에 있어요. 조선 전기 초서 3대가의 한사람으로, 혹은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죠. 과거의 지식인은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기에 오늘날의 시각 - 한 분야에 정통한 것이 지식인이라는 - 으로 과거의 지식인을 평가하면 자칫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양사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