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가을바람에 휘날리고              黃葉秋風裏    

청산은 석양 속에 어두워지네             靑山落照時    

강남은 어드메인지 아득키만 한데       江南杳何處    

쓸쓸한 배 한 척 느릿느릿 가누나        一棹去遲遲        


흔적. ‘어떤 일이 진행된 뒤에 남겨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마음의 흔적이라 이름 붙여 본다.     


월산대군. 조선의 9대 임금 성종의 친형이다. 아버지 의경 세자(세조의 큰아들)가 죽고 작은아버지 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사망했는데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렸기에(4살) 실질적 왕위 계승 서열 1위였으나 병약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34살에 죽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실제로 병약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평균 수명이 길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꼭 병약했다고만도 볼 수 없다. 그의 동생인 성종도 38살에 죽었다. 병약 운운은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많은 이들이 정희왕후(세조의 부인. 월산대군의 할머니)와 한명회(성종의 장인)의 정치적 결탁 때문에 밀려난 것으로 본다.     


무생물이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왕위 서열 1위임에도 왕위에서 밀려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전하는 기록들은 그가 자연 속에서 소요하며 서책을 벗 삼아 지냈다고 한다. 불만 없이 잘 지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그의 진심 어린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 액션도 용납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저 숨죽이고 지낼 수밖에 없었기에 그랬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자연과 서책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지낸 것 같지만 실제는 평생 울울한 심사로 지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그의 마음의 흔적을 위의 시에서 읽는다. 위 시는 부채 그림에 쓴 시이다. 화제이니 그림의 정경을 손에 잡힐 듯이 그리는 것이 요점이다. 시를 읽으면 그림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성공적인 화제시이다. 그런데 내게는 왠지 이 시가 월산대군의 마음의 흔적을 드러낸 서정시로 읽힌다.     


가을바람에 휘둘리는 낙엽과 같은 신세, 석양 속에 그 빛이 가려진 청산 같은 신세, 그게 바로 월산대군 자신의 처지라고 본 것은 아닐까? 강남은 탈출구인데, 문제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느릿느릿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배 한 척은 탈출구 없는 고립무원 적막강산의 처지인 바로 그 자신의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견강부회한 해석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그의 시조도 이와 비슷하니 무리한 주장이라 타박만 받을 일은 아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돌아오노매라     


낭만적 서정보다는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 시조의 이런 정서는 그의 울울했을 심사와 연관 지을 때만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월산대군의 작품 둘을 읽고 그의 '마음의 흔적' 운운했는데, 그가 지하에서  글을 읽는다면 뭐라고 평할지 궁금하다. 이보게  봤어, 라고 할까? 아니면 택도 없는 소리, 라고 할까?


월산대군은 살아서도 죽은 듯이 살았는데― 내가 보기에 ―죽어서도  한 번 죽임을 당한다. 그의 신도비를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이 썼고 그의 부인 박 씨가 연산군과 추문이 있었던 것(연산군은 월산대군의 조카이다). 월산대군에게서 특권층의 비극적인 일면을 본다. 그의 시가 더더욱 애처롭게 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트겐슈타인.     


현대 철학의 신으로 불린다신답게(?)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글을 썼다고 한다평생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하니가능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그러나 몰입이 가져온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공자.


유교의 비조(鼻祖)이다누구보다 겸손했지만 배움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먹는 것도 잊는다 했고늙는 것도 잊고 지낸다 했다몰입의 달인이라고나 할까?     


이들 못지않은 이가 조선에도 있었다퇴계 이황그 어려운 성리서(性理書)를 읽는데 빠져 무더운 한여름을 두문불출했고임금이 벼슬을 준다 불러도 공부하고 싶다며 마다했다몰입의 즐거움을 알았던 이라고나 할까     


사진은 퇴계 이황의 시이다.   

  

身退安愚兮 신퇴안우혜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한데

學退憂暮境 학퇴우모경    학문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溪上始定居 계상시정거    퇴계의 가에 비로소 거처 정하고

臨流日有省 임류일유성    시냇물 굽어보며 날로 반성해보네     


학문할 수 있게 된 처지를 다행으로 여기며 이제야말로 남은 생을 촌음(寸陰)의 낭비 없이 학문에 몰입하리라 다짐하는 시이다     


비트겐슈타인공자퇴계 이황이들은 무엇 때문에 저술배움학문에 몰입했던 것일까진리의 추구그럴 수도 있다그러나 나는 몰입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몰입의 즐거움이 없다면 어떻게 그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글을 쓰고먹는 것도 잊고 늙어가는 육신도 서글퍼하지 않으며한여름의 무더위도 잊으며 두문불출하고 벼슬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몰입의 즐거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이들은 몰입의 즐거움이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갖가지 감각적 재미가 난무하는 세상이다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이것도 몰입이다그런데 빠져나오는 순간 허전함을 느낀다빠져나오며 충만함을 느끼는 재미는 없을까비트겐슈타인공자이황이 보여준 저술배움학문이라 말하고 싶다그들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이들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지 말자그들이 했던 영역에서는 그들만큼 못할지 모른다그러나 그들이 해보지 못했던 영역에서는 우리도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몰입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요는 타인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재지 말고 우리 자신의 잣대로 우리를 재는 걸 것이다자신에게 맞는 저술배움학문의 영역을 찾는 것.     

     

평균 수명이 늘면서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저술배움학문에서 한 가지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공자의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     


발분방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 배움에 몰입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 모든 근심을 잊어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 잘하고 애써 좋은 표정 짓는 사람에게 인()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뜻이다공자의 말이다주지하는 것처럼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이다그는 인을 설명할 때부처처럼방편 설법을 사용한다상대에 맞춰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위의 말도 분명 누군가와 대화하며 나온 말일 것이다아마도 상대의 과도한 립 서비스에 경각심을 주려 이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공자가 생각한 인에 과도한 립 서비스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문득여기 교언영색이란 의미를 포장이란 의미로 환치하고 인이란 의미를 진실이란 의미로 환치하여 이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러면 위 말은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포장이 많을수록 진실과 멀어진다포장은 물건에도 사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니위 말을 한 번 더 환치하면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진실한 사람은 숨기고 꾸미지 않고좋은 물건은 포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치관이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것이다포장을 경계하는 공자의  저 말은크게 보면농경문화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상업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는 저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상업에서 포장이란 불가결의 요소이기 때문이다공자가 만약 상업 문화를 배경으로 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교언영색 의어인(巧言令色 宜於仁). 말 잘하고 애써 좋은 표정 짓는 것은 인에 합당한 태도이다상업이란 모름지기 타인의 마음을 훔쳐야 가능한 것이니 상대를 배려해 좋게 말하고 좋은 표정 짓는 것은 권장될 일이지 터부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의 한자는 과실대(果實袋)’라고 읽는다과일 포장지란 뜻이다과일의 맨살을 드러내지 않고 포장지를 씌운 이유는 뭘까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값을 더 받기 위해서이다그렇지 않다면 굳이 포장지를 씌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확실히 포장은 상업과 관련된 것이다농업에 기반한 문화에서는 포장이 발달할 수가 없다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포장이란 기피 혹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목하 우리는 상업의 극성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심지어 생명조차 시대에 포장은 필수 불가결이다물건도 마찬가지이고 사람도 마찬가지이다포장을 통해 값을 올리려 분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도이다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지나치면 아예 안 한 것만도 못하게 된다비근한 예로 성형을 과도하게 하여 외려 이상한 몰골이 된다던가 겉은 그럴싸한데 속은 썩어있는 과일 상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이들 모두 일시적으론 값이 올랐을 수도 있지만 종내는 원래 값도 못할 수 있다무릇 포장이란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어야지 빈목(矉目)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최근 어느 대통령 후보의 부인 논란은 과도한 포장이 빚은 문제이다화룡점정을 하려다 빈목이 된 사례라 하겠다확실히 포장은 적당할 때 의미가 있지과도할 때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이런 점에서앞에서 공자의 말을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말이라고 비판 비슷하게 언급했지만사실 공자의 말은 상업의 극성 자본주의 시대 포장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공자의 말은 다음과 같이한마디로해석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적당히 포장해라!


(공자는 교언영색에 인이 없다고는 안 했다. 인과 멀어질 수 있다고 경계했을 뿐이다그렇다면 그가 교언영색즉 포장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과유불급한 포장을 말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그런 의미에서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가 좀 더 학문과 존양 공부에 힘을 쏟았다면 어땠을까! 헤아리기 힘든 성취를 보이지 않았을까? 당시의 선배들이 그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언행을 비난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 얼마나 순후한 기풍이었던가!”   

  

이이가 쓴 「김시습전」은 김시습의 생애를 다룬 정전(正傳)으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이는 전의 마지막에서 김시습과 그의 시대를 위와 같이 평한다. 전의 본문에서 김시습의 기언괴행(奇言怪行)과 그런 그를 크게 탓하지 않았던 인물들을 기술했기에 이런 평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 평이 이이의 진심 어린 평일까?


이이는 김시습이 방약무인한 행동을 하고 당대 사람들이 그를 책망하지 않은― 어쩌면 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몰랐을까? 김시습 못지않은 천재였고 김시습처럼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잠시 불문(佛門)에 의지했던 그가 김시습과 당대 인물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모른다면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이이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한 것이 아닐까?      


이이는 전의 본문에서 김시습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을 소개하며 총오절인(聰悟絶人), 일기이종불망(一記而終不忘), 천자발췌(天資拔萃)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모두가 비범한 재주를 보여주는 말들이다. 보태어 그의 기언괴행들도 소개한다. 이이가 보여주는 김시습의 비범한 재주와 기언괴행 등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이가 왜 시대와 불화하며 지낸 것일까?’ 


그렇다! 이이는 객관적 사실을 통해 한 비범한 인재의 날개를 꺾어버린 불의한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김시습을 타박하지 않았던 이들은 그처럼 살고 싶으나 살 수 없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그리했던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이가 이렇게 객관적 사실을 통해 진심을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김시습전」을 왕명(선조)에 의해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명으로 전을 지으면서 어떻게 그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한 세조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세조를 비판할 수 없다면 그와 함께 정치를 했던 당대 인물도 비판하기는 어렵다. 하여 김시습의 편향된 성향에 대해서만 비판을 한 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비록 왕명이기는 하지만, 이이는「김시습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왕이시여,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인재(人才)가 생기지 않도록 유념하시옵소서!”      


사진의 시는 김시습이 자신의 초상화에  썼다는 시이다(사진은 부여 무량사에서 찍었다. 무량사는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곳이다).     



俯示李賀 부시이하   이하도 내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影至眇 이영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太侗 이언태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쿠나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자기 비하가 가득한 시이다. 그러나 비하는 자만(自滿) 혹은 자긍(自矜)의 이면이다. 이 시를 불의한 시대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펴지 못했던 한 불행한 천재의 자만/자긍이 가득한 시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이러한 시가 나온 데에는 이이가 에둘러 말했던 대로― 물론 나의 억측이지만 ―그의 편향된 성향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불의한 시대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억해 줘서 고마워!”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 어느 날, C에게 연락을 하여 모교 중학교 교정에서 만났다교정엔 잔설이 남아 있었다살짝 서먹한 기운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C가 먼저 입을 열었다.         

     

C와 이야기를 해본 것은 초등학교 때뿐이었다같은 중학교를 다녔어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고등학교는 각자 외지로 나가 더더욱 말을 할 수 없었다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C는 집안 사정 때문에 고향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소문을 들었지만 본 적은 없었다이런 C에게 내가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C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C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고 중학교 때도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 버스를 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여전히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C에게 연락을 취한 건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한 집에서 하숙하던 고등학교 후배가 선배는 여자 친구도 없냐는 말에 나도 있다며 보여주겠다고 호언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 C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후 C와 나는 서너 번 더 만났다만나는 중에 나는 C에게 가와바다 야쓰나리의 설국을 선물했다특별한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C가 문학을 좋아했기에 그저 내가 갖고 있던 소설 책중 하나를 준 것뿐이었다.                  


그해 나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고, C는 모 대학 국문과에 진학했다나는 괜한 자존심에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이듬해 나는 사범대학에 진학했다어느 날 과(편지꽂이에 C가 보낸 학보가 와 있었다. C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네 얘기했어!”                    


직장 생활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있던 어느 날 C가 찾아왔다낯익은 얼굴들과 함께였다초등학교 때 활동했던 자유교양부 동창들과 계속 만나고 있는데 이번에 고향에서 모임을 갖게 됐고 우연히 내 안부가 궁금해 왔다는 것이었다자유교양부에 남자 둘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 명이 나였다. 오랫만이라 허공에 떠도는 먼지 같은 잡담을 나누던 중 C가 약간은 엉뚱한 고백을 했다(C는 소문에 듣자니 대학 때 임신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고 했다상대는 같은 과 선배였다고 들었다). C의 엉뚱한 고백에 나는 약간 머쓱했다이후 C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ㅇㅇ CEO가 네 동창이라던데!”                    


일요일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대학 동창 내외가 찾아왔다둘은 과 커플이었다. 3년 전에 명퇴를 했는데 불현듯 생각이 나서 왔다고 했다반가운 정담을 나누고 헤어질 무렵 남자 동창이 뜬금없이 말했다그래...?”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데 집히는 것이 있었다. ‘혹시 C?’ 여자 대학 동창은 묘하게도 초등학교 때 자유교양부를 함께 했던 한 여자애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그것도 친한그 여자애가 자기 동창들― 특히나 친한 자유교양부 친구들 이야기를 여자 대학 동창에게 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중에 C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던 사실도 말했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 대학 동창도 알고 있을 수 있으니, 그랬기에 남자 대학 동창이 내게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동창내외를 보내고 심심파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예측대로 C였다개명을 하여 옛날에 사용하던 애칭을 본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성공한 사업가인 데다 소설과 같은 간난(艱難)한 삶을 살아 인터뷰를 한 것도 많고 드라마도 있었다약간 놀란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돼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인터뷰에서 간난한 삶을 신앙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부와 명예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C는 초·중학교 동기동창 중 가장 성공한 동기동창이 아닐까 싶었다.                  


C의 인터뷰를 보면서 놀란 것은 CEO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거였다말과 얼굴 모두에 진솔함이 묻어났다.                


돌아보면 C는 참 괜찮은 동창이었다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C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만일 내가 조금만 노력했다면 C는 지금 내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평범한 아낙네로.       

     

오늘은 눈이 간헐적으로 내린다고 한다문득 C와 만났던 잔설이 남아 있던 교정이 생각난다그 교정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폐교가 된 것앞으로 C를 만날 일이 있을까없을 것 같다그러나 만난다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를 키운 건 팔 할이 나야~” 그래도 C는 왠지 해맑게 웃어줄 것 같다.     


*자유교양부: 70년대 고전 읽기 교육 일환으로 만든 일종의 독서반이다특정 학생들을 모아 지정 고전을 읽게 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교내외에서 시험을 치르고 시상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