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좀 더 학문과 존양 공부에 힘을 쏟았다면 어땠을까! 헤아리기 힘든 성취를 보이지 않았을까? 당시의 선배들이 그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언행을 비난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 얼마나 순후한 기풍이었던가!”   

  

이이가 쓴 「김시습전」은 김시습의 생애를 다룬 정전(正傳)으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이는 전의 마지막에서 김시습과 그의 시대를 위와 같이 평한다. 전의 본문에서 김시습의 기언괴행(奇言怪行)과 그런 그를 크게 탓하지 않았던 인물들을 기술했기에 이런 평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 평이 이이의 진심 어린 평일까?


이이는 김시습이 방약무인한 행동을 하고 당대 사람들이 그를 책망하지 않은― 어쩌면 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몰랐을까? 김시습 못지않은 천재였고 김시습처럼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잠시 불문(佛門)에 의지했던 그가 김시습과 당대 인물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모른다면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이이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한 것이 아닐까?      


이이는 전의 본문에서 김시습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을 소개하며 총오절인(聰悟絶人), 일기이종불망(一記而終不忘), 천자발췌(天資拔萃)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모두가 비범한 재주를 보여주는 말들이다. 보태어 그의 기언괴행들도 소개한다. 이이가 보여주는 김시습의 비범한 재주와 기언괴행 등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이가 왜 시대와 불화하며 지낸 것일까?’ 


그렇다! 이이는 객관적 사실을 통해 한 비범한 인재의 날개를 꺾어버린 불의한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김시습을 타박하지 않았던 이들은 그처럼 살고 싶으나 살 수 없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그리했던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이가 이렇게 객관적 사실을 통해 진심을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김시습전」을 왕명(선조)에 의해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명으로 전을 지으면서 어떻게 그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한 세조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세조를 비판할 수 없다면 그와 함께 정치를 했던 당대 인물도 비판하기는 어렵다. 하여 김시습의 편향된 성향에 대해서만 비판을 한 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비록 왕명이기는 하지만, 이이는「김시습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왕이시여,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인재(人才)가 생기지 않도록 유념하시옵소서!”      


사진의 시는 김시습이 자신의 초상화에  썼다는 시이다(사진은 부여 무량사에서 찍었다. 무량사는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곳이다).     



俯示李賀 부시이하   이하도 내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影至眇 이영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太侗 이언태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쿠나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자기 비하가 가득한 시이다. 그러나 비하는 자만(自滿) 혹은 자긍(自矜)의 이면이다. 이 시를 불의한 시대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펴지 못했던 한 불행한 천재의 자만/자긍이 가득한 시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이러한 시가 나온 데에는 이이가 에둘러 말했던 대로― 물론 나의 억측이지만 ―그의 편향된 성향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불의한 시대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