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된 자가 인간 성품의 근원을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찰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그것의 공효를 천하 국가에 펼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경전과 사서일 뿐이다. 이 밖에 다른 책을 구하게 되면 오도(유학의 도)를 버리고 이단으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는 무궁하고 사물의 변화 또한 이와 더불어 무궁하기에 경전과 사서 외에도 다른 책들이 있다. 다양한 사상과 기예를 가진 자들이 각자가 터득한 소견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책을 지었으니, 이들의 주장과 책의 내용이 비록 성인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과 부합되지 않는다 해도 나름의 볼만한 부분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하여 이들의 주장과 책의 내용은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어 도는 지극히 크기에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한다. 하여 고래로 선비 된 자들이 이러한 주장과 책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태평광기』도 이러한 연유로 지어진 책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책은 많은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담느라 내용이 너무 많고 지리하다. 물경 500권에 달하여 이 책을 다 읽은 이들은 극히 드물다. 나의 벗 성임은 옛것을 좋아하는 해박하고 단아한 군자이다. 일찍이 이 거질의 책을 독파하고 이 글이 갖는 풍부함과 화려함 그리고 신비하고 경이로운 이야기가 주는 놀라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압도적 양과 요점의 미비함에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에 그 지리하고 지나치게 황탄한 내용들은 빼고 50권으로 축약하여 읽기 좋은 판본으로 만들었다.     


완성된 책을 내게 가져와 서문을 요청하기에 받아서 읽어보았다. 진(晉)의 온교가 우저가에서 쇠뿔에 불을 담아 물아래를 비췄더니 온갖 신이한 것들이 다 보였다는 것처럼 『태평광기』의 주요 신이한 내용들이 다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진시황의 여산릉을 발굴할 때 팔수록 진기한 패물이 나온 것처럼 책장을 넘길수록 점입가경의 내용이 나오게 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책에는 수천 년간의 귀신과 인간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이 다 들어있는바, 기쁘고 놀랍고 받들고 버려야 할 것들이 모두 한 상에 빠짐없이 차려져 있다. 하여 다섯 수레의 많은 책을 읽지 않고도 이 책만 충실히 읽으면 좁고 고루한 식견을 탈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임이 얼마나 이 책에 공력을 들였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임이 내게 책을 건네며 한 말이 있다. “자네도 알다시피 괴력난신(怪力亂神)은 공자께서 언급하길 꺼리신 바일세. 후세 사람들이 이 책을 지목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그르치는 책이라고 할까 좀 걱정되네.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나는 이렇게 답했다. “역경에도 하도가 있고 서경에도 낙서가 있으며 시경에도 ‘현조’와 ‘무민’ 같은 시가 있으며 예기에서도 네 영물(기린, 봉황, 거북, 용)의 응답을 언급하고 있고 역사서에서도 여섯 비익조에 관한 일을 기록하고 있네. 성인께서 경을 정비하실 때 이러한 일들을 모두 그대로 둔 것은 무슨 뜻이었겠는가? 천하의 이치란 무궁하고 사물의 변화 또한 이와 더불어 무궁하기에 하나의 생각이나 사상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신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괴력난신을 언급하길 꺼리신 것은 사람들이 육경의 이치엔 어두우면서 색은행괴(索隱行怪)의 설에 매몰될까 걱정하셨기에 그리하셨다고 보네. 만약 먼저 육경의 도를 분명히 궁구하여 학문의 경지가 정대하고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비록 저잣거리의 비루한 말도 모두 나름의 이치가 있기에 나를 성장시키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걸세. 하물며 한적하고 답답할 때 이 책을 보면 흡사 옛사람과 한자리에 앉아 즐겁게 담소하며 즐거워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무료하고 답답한 기운이 얼음 녹듯 사라져 가슴이 시원해지니 그 가치가 어떠하겠는가? 이런 것이 예기에서 이르는 “한 번 긴장하면 한 번 이완해야 한다”는 이치 아니겠는가! 옛사람도 이런 것을 알았기에 패관을 두었고 소설가라는 이들의 글도 전해지게 된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것이 존재하고 전해 졌겠는가!” 성임은 나의 말에 동조의 뜻을 보였다. 이에 이 서문을 지어 그에게 보냈다.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약태평광기서(『略太平廣記』序)



*『태평광기』는 송 태종(939-997) 연간에 이임 등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송대 이전까지의 거의 모든 설화가 집대성된 책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고려 고종(1192-1259) 이전으로 보며, 최근에는 나말여초로 보려는 입장도 있다. 비교적 일찍 도입된 설화집으로 우리나라의 소설 발달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신은 이 책의 장점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태평광기'의 장점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육조에서 송초까지의 소설이 거의 전부 그 안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만약 대략적인 연구를 한다면 많은 책을 따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요괴·귀신·화상·도사 등을 한 부류씩 매우 분명하게 분류하고 아주 많은 고사를 모아 놓았으므로 물리도록 실컷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윗글에서도, 관점은 약간 다르지만, 이런 『태평광기』의 장점을 언급하고 있다.     


*도덕과 재미는 양립하기 쉽지 않은 가치이다(윗글에서는 둘 다 ‘도’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예교가 지배하던 과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윗글 마지막에 성임이 애써 책을 만들고도 걱정스러운 말을 한 것이나 서문을 써 준 이승소가 글 첫머리와 마지막 부분에 『태평광기』가 갖는 가치를 애써 변론한 점은 이런 양립이 쉽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달리 말하면 아무리 도덕을 강조해도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선초만 해도 성리학이 강고하지 않고 도학보다 사장의 전통이 강했던 고려의 영향이 남아 재미를 지닌 책을 옹호하는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성리학이 난숙한 조선 중기 이후엔 이렇게 패사소품의 글을 옹호하는 글을 쓰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이 서문은 『약태평광기』란 책에 써준 서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 책의 제목은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이다. 어느 책명이 맞는 걸까? 서문으로 본다면 『약태평광기』가 맞을 것 같다. 『태평광기상절』이란 책을 갖고 와 서문을 요청했다면 『태평광기상절서』라고 하지 굳이 『약태평광기서』라고 할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후에 책 제목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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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시(다른 이의 시구를 모아 지은 시)는 송초에 시작되어 왕안석 · 석연년 등에 이르러 성황을 이루었다우리나라에선 매월당의 집구시가 돋보인다     


일찍이 서거정이 스승인 유방선에게 집구시의 어려움과 쉬운 점에 대해 질의한 적이 있다그때 유방선은 이렇게 말했다: “집구시를 짓기란 어려우면서도 쉽고쉬우면서도 어렵다.” 서거정이 무슨 말씀이냐고 물으니유방선이 이렇게 말했다: “집구시는 왕안석도 어려워한 바인데 고려 때 임유정과 최집균은 모두 이에 능했다그들의 집구시를 보면 흡사 평소 시를 지을 때처럼 운에 맞춰 자연스럽게 시를 지은 것처럼 보여 평소 많은 인물들의 시를 수집해 제재별 내용별로 분류해 시작에 대비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그런데 우리나라는 서적이 그렇게 많지 않아 이름난 이들의 작품이 대부분 드러나 있는데 위 두 사람의 집구시에 등장한 사람 중에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집구시가 진정한 집구시인지 매우 의심스럽다또한 두 사람이 집구시에 능통했는데도 정작 그들 자신의 시는 세상 사람들의 입 줄에 오르내리는 것이 한 편도 없으니 이들의 집구시가 제대로 된 집구시라 할런지도 의문이다이러니 집구시 짓기가 어려우면서도 쉽고쉬우면서도 어렵다고 하지 않겠느냐?” 근자에 영남 사람 전극항이란 이가 집구시에 능하다고 알려졌는데그 속에 듣도 보도 못한 이들의 시가 들어 있으니 그의 집구시는 저 임유정과 최집균의 집구시와 같은 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자년(1636)에 나는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병이 생겨 그해 겨울을 병상에서 보낸 적이 있다당시 무료하던 차 문천상이 지은 집두시(두보의 시를 집구한 시) 200수를 읽은 적이 있는데모두가 뛰어나고 절실하여 흡사 두보가 문천상을 위해 지은 시 같았다이에 자극받아 나도 시험 삼아 집구시를 지었는데다른 이의 시는 섞지 않고 오로지 두보의 시만을 모아 절구(4구의 시)를 짓고 문산(문천상의 호)라 명명했다쾌차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계속 지어 총 2백여 수가 됐고간혹 장편으로 짓기도 했으며 율시(8구의 시)로 지은 것도 있다이 집구시가 잘됐는지의 여부는 자신할 수 없으나적어도 임 · 최 · 전씨의 작품과 같은 의심은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의 『집두시』후서(『集杜詩』後序)



집구시는 요즘 말로 하면 짜깁기라고 할 수 있다짜깁기의 핵심은 그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다집구시도 마찬가지이다비록 타인의 시구를 조합하여 시를 지을지언정 극히 자연스러워야 성공한 시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위 유방선의 말을 빌면 집구시의 원작은 많은 이들에게 공개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 같다공개된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지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을 때 성공한 집구시로 본 것그렇지 않으면 집구의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불투명한 표절보다 투명한 표절을 더 높이 쳤다고나 할까?     


모방이나 표절은 창작의 기운이 막혔을 때 나오는 궁여지책이다일반적으로 송시는 당시에 비해 격이 낮다고 평가받는데송대에 집구시가 시작되고 성황을 이루었다는 것도 이런 평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김육의 시도그의 시를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혹 창발성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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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저 꽃과 /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 한 대목이다. 삶과 죽음을 같이 보고 있지만, 죽음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삶이란 칼 위에서 춤추는 격인데 왜 그리 삶에 열중하냐며 삶에 목매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윤심덕은 꽃다운 목숨을 현해탄에 던졌다(이설(異說)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설을 따랐다).

     

사진의 한문은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춘효(春曉, 봄 새벽)」란 시이다(사진은 한 음식점에서 찍었다).     


봄 잠이라 노곤해 새벽 온 줄 몰랐더니 / 곳곳의 새소리 늦잠을 깨우네 / 밤사이 비바람 거셌거니 / 아, 꽃잎은 얼마나 졌을까 春眠不覺曉  處處聞鳥啼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봄날의 정감을 시각이 아닌 청각을 통해 묘사한 점이 돋보이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를 봄날의 정감을 그린 것이 아닌 다른 각도로 볼 수는 없을까?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우회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2구는 삶, 3·4구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그린 것으로 보는 것. 이 시를 「사의 찬미」와 견줘보면,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지만, 삶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상징하는 거센 비바람에 맥없이 떨어졌을 꽃잎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삶에 우선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역으로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맹호연은 비록 출사하여 부귀공명을 누리진 못했으나 녹문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삶은 죽음의 이면이고, 죽음은 삶의 이면이다. 어느 한쪽을 경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둘 모두를 고르게 바라보고 대해야 한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며 삶을 경시하는 건 자포자기의 태도이고, 삶이 최고라며 죽음을 터부시 하는 건 과대망상의 태도이다(맹호연은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지만 터부시하고 있지는 않다). 과거 인도에선 자녀들을 성가(成家)시킨 뒤 출가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출가란 이해타산의 삶을 벗어나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을 떠나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옛 인도의 출가 풍습은 삶과 죽음을 고르게 대한 고귀한 풍습이었다란 생각이 든다.     


인생 백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에 맞춰 노인을 위한 각종 복지제도가 마련되고 있다. 좋다. 그러나 이런 제도에 앞서, 나이 드는 이들 스스로의 자기 검속(檢束)도 필요할 듯싶다. 삶과 죽음을 고르게 바라보고 출가의 심정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것, 이런 자기 검속이 있을 때 복지도 더 의미 있게 누리지 않을까 싶다.     


여담. 사진의 한시에서 ‘조제(鳥啼)’는 ‘제조(啼鳥)’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운이 맞는다. 원시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글씨 쓰신 분이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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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오래전 한 불교 단체에서 주최하는 심성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주관하는 스님이 프로그램 진행 기간 동안 마음에 새겨야 할 문구가 있다며 저 글귀를 소개했다. 이른바 화두였다. 프로그램이 끝나는 날, 주관했던 스님이 참가자들에게 화두에 대한 답을 내놔보라고 했다. 나는 이런 답을 내놓았다. ‘나는 너다.’ 스님은 답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웃기만 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동안 내가 답했던 말을 되새기며 이를 실천에 옮겨보려 노력했다. 타인의 그릇된 행동을 보면 욕하기에 앞서 나의 그릇된 행동을 타인이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가엾게 보려 했고, 타인의 좋은 행동을 보면 시기하기에 앞서 나의 선한 면모를 타인이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사랑스럽게 보려 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얼마 안가 전처럼 다시 타인의 그릇된 행동을 보면 욕이 먼저 나왔고, 타인의 좋은 행동을 보면 괜한 시기심이 먼저 일었다.


사진은 ‘백화춘도위수향(百花春到爲誰香)’이라고 읽는다. ‘온갖 꽃 봄이 오면 뉘를 위해 향기를 뿜나?’란 뜻이다. 송대의 선승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선시 중 한 구절이다. 원시에서는 ‘백화춘지위수개(百花春至爲誰開, 온갖 꽃 봄이 이르니 뉘를 위해 피는가?)’라고 쓰고 있다. 낙관에 해당하는 한자는 만공(滿空)으로, 만공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불교를 지키고 유신시키려 애썼던 선승이다. 설두중현의 위 문구를 좋아해 서예 작품으로 남긴 것이 있다. 그런데 사진의 글씨는 만공 선사의 글씨가 아니다. 그저 만공 선사가 쓴 것처럼 흉내 낸 것일 뿐이다(사진은 한 버스 정류장에서 찍었다).


‘온갖 꽃 봄이 오면 뉘를 위해 향기를 뿜나’는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화두이다. 화두는 끝 모를 심연(深淵)의 질문과 같기에 그에 대한 답도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그 각양각색의 답이 다 맞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 답을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했거나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했거나 말이다. 화두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의 근기(根機)와 삶의 이력(履歷)에서 나오기에 저마다의 답이 정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화두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 답을 삶을 견인하는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답했다면 그 자신 타인을 위해 향기를 뿜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고,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답했다면 그 자신 자신의 삶을 충실히 가꾸는 게 중요하다. 이를 그럴듯한 말로 바꾸면, ‘돈오(頓悟)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점수(漸修)가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은 실천으로 입증될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고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심성 프로그램을 주관했던 스님이 지은 미소의 의미를 생각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그 의미가 약간 어슴푸레하게나마 이해된다. 그건 이런 의미 아니었을까 싶다. 


“하하, 나도 그 정답을 모릅니다. 그러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요. 그러나 중요한 건 깨닫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말해 봤자 별 소용없어요. 본인이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지요. 그러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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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공자의 이른바 정명론이다.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행동을 할 때 세상의 질서가 잡힐 것이란 주장이다. 원칙상으론 흠잡을 데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원칙대로만 움직이던가. 공자가 당시 유세하던 나라들에서 홀대받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세상은 명실이 상부하기보다는 불상부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신유학이라 불리는 이른바 성리학의 주 텍스트인 『대학』의 첫 구절이다. 『대학』은 원래 『예기』의 한 편이었는데, 신유학의 주 텍스트가 되면서 독립된 경전이 되었다. 그런데 이 경전의 성립 자체가 사실은 유학의 종주인 공자의 정명론을 거스른 행위이다. 대학은 본시 제왕의 학문인데 성리학은 이를 사대부의 학문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이런 면에서 나는 성리학을 희화화하여 신유학이라 부른다). “명덕을 밝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백성을 새롭게”하거나 “(세상을)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분명히 제왕의 목표이자 임무이지 사대부의 목표나 임무는 아니다.      


위 테제의 핵심은 “백성을 새롭게”라는 내용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은 “백성을 새롭게”하기 위한 출발점이고 “(세상을)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백성을 새롭게”한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백성을 새롭게”라는 말에는 사대부의 장대한 이상이 담겨있다. 그런 만큼 계몽적이기도 하다.     


사진의 한자는 ‘신민회(新民會)’라고 읽는다. 여기 ‘신민’은 바로 『대학』의 첫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신민회’를 굳이 번역한다면 ‘백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7년에 설립된 신민회는 비밀결사의 항일단체였다. 그런데 이 명칭에서 나는 당시 이 조직을 만든 이들이 사대부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민(民)을 주체로 보지 못하고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그러나 이해는 된다. 비록 근대라고는 하나 왕조시대와 그리 시간 간격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왕조시대의 조선은 사대부의 학문인 성리학을 기치로 내건 국가였지 않았던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명칭이 현대에 와서도 사용됐다는 것이다. 신민당(新民黨)이 바로 그것. 박정희 정권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대항마였던 야당의 명칭이다. 적어도 명칭만으로 보면 민주주의를 목놓아 부르짖었던 야당이 겉으로는 민주(民主)를 외쳤지만 속으로는 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봤다고 볼 수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여당의 민주공화당이란 명칭이다. 민주공화당에서 ‘민주’와 ‘공화’는 그야말로 민을 주인으로 보고 민과 함께 숙의한다는 명칭인데, 민주공화당의 행태는 이와 반대였기 때문이다. 두 명칭 모두 명실이 불상부했다고 볼 수 있다. (현 여당의 명칭인 ‘더불어민주당’은 ‘민주공화당’의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적폐 청산을 내건 정당이 적폐의 뿌리라 할 ‘민주공화당’의 다른 버전을 사용한다는 것 역시 명실이 불상부한 경우이다.)


예나 이제나 세상에는 명실이 불상부한 경우가 상부한 경우보다 훨씬 많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을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공자가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정명론을 견지했던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런 우직한 면모 때문에 그의 이름이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은 군산에서 찍었다. 카페 이름이다. 근대 문화를 테마로 한 거리의 건물이라 이 명칭을 사용한 것 같은데, 그 굴레를 벗고 ‘새로운 사람들’이란 명칭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훨씬 산뜻하지 않은가? ‘신민’은 ‘백성을 새롭게’란 뜻으로도 풀 수 있지만, ‘새로운 백성(사람들)’이란 뜻으로도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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