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시(다른 이의 시구를 모아 지은 시)는 송초에 시작되어 왕안석 · 석연년 등에 이르러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에선 매월당의 집구시가 돋보인다.
일찍이 서거정이 스승인 유방선에게 집구시의 어려움과 쉬운 점에 대해 질의한 적이 있다. 그때 유방선은 이렇게 말했다: “집구시를 짓기란 어려우면서도 쉽고, 쉬우면서도 어렵다.” 서거정이 무슨 말씀이냐고 물으니, 유방선이 이렇게 말했다: “집구시는 왕안석도 어려워한 바인데 고려 때 임유정과 최집균은 모두 이에 능했다. 그들의 집구시를 보면 흡사 평소 시를 지을 때처럼 운에 맞춰 자연스럽게 시를 지은 것처럼 보여 평소 많은 인물들의 시를 수집해 제재별 내용별로 분류해 시작에 대비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서적이 그렇게 많지 않아 이름난 이들의 작품이 대부분 드러나 있는데 위 두 사람의 집구시에 등장한 사람 중에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집구시가 진정한 집구시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또한 두 사람이 집구시에 능통했는데도 정작 그들 자신의 시는 세상 사람들의 입 줄에 오르내리는 것이 한 편도 없으니 이들의 집구시가 제대로 된 집구시라 할런지도 의문이다. 이러니 집구시 짓기가 어려우면서도 쉽고, 쉬우면서도 어렵다고 하지 않겠느냐?” 근자에 영남 사람 전극항이란 이가 집구시에 능하다고 알려졌는데, 그 속에 듣도 보도 못한 이들의 시가 들어 있으니 그의 집구시는 저 임유정과 최집균의 집구시와 같은 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자년(1636)에 나는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병이 생겨 그해 겨울을 병상에서 보낸 적이 있다. 당시 무료하던 차 문천상이 지은 집두시(두보의 시를 집구한 시) 200수를 읽은 적이 있는데, 모두가 뛰어나고 절실하여 흡사 두보가 문천상을 위해 지은 시 같았다. 이에 자극받아 나도 시험 삼아 집구시를 지었는데, 다른 이의 시는 섞지 않고 오로지 두보의 시만을 모아 절구(4구의 시)를 짓고 ‘문산(문천상의 호)체’라 명명했다. 쾌차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계속 지어 총 2백여 수가 됐고, 간혹 장편으로 짓기도 했으며 율시(8구의 시)로 지은 것도 있다. 이 집구시가 잘됐는지의 여부는 자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임 · 최 · 전씨의 작품과 같은 의심은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의 『집두시』후서(『集杜詩』後序)
* 집구시는 요즘 말로 하면 짜깁기라고 할 수 있다. 짜깁기의 핵심은 그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집구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타인의 시구를 조합하여 시를 지을지언정 극히 자연스러워야 성공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유방선의 말을 빌면 집구시의 원작은 많은 이들에게 공개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 같다. 공개된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지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을 때 성공한 집구시로 본 것. 그렇지 않으면 집구의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불투명한 표절보다 투명한 표절을 더 높이 쳤다고나 할까?
* 모방이나 표절은 창작의 기운이 막혔을 때 나오는 궁여지책이다. 일반적으로 송시는 당시에 비해 격이 낮다고 평가받는데, 송대에 집구시가 시작되고 성황을 이루었다는 것도 이런 평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육의 시도, 그의 시를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혹 창발성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