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며 죽은 이를 보내는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백남기씨 시신을 두고 부검을 주장하는 경찰을 보며 문득 떠오른 『맹자』의 한 구절이에요. 유족 측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반대하는데도 경찰은 기각된 부검 신청을 재신청하려고 한다는군요.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돌아간 것이 명명백백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검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비등(沸騰)할 수 있는 경찰의 과잉진압 여론을 사전에 무마하려는 거겠지요.
애도와 재발 방지 약속을 다짐해도 모자랄 판에 시신을 놓고 꼼수를 부리는 이런 처사는 유족들과 국민들에게 한(恨)을 심어주는 거예요. 경찰의 공권력 행사가 정권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상정할 때 경찰의 처사는 곧 정권의 처사라고 할 수 있어요. 유족들과 국민에게 한을 심어주는 정권, 결코 좋은 정권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민중은 개명천지한 현대에도 이렇게 무시를 당하니 과거에야 더 말할 나위 없었겠죠? 여기에 사회 격변기까지 겹치면 민중은 그야말로 치지도외(置之度外)였을 거예요.
치지도외의 무시 속에서 민중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구책(自救策)' 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겠죠(지금도 그렇잖아요?).
사진은 당진에 있는 안국사지(安國寺址)의 매향비(埋香碑) 일부예요. 매향은 바닷물이 드나들던 지점에 향나무를 묻는 불교의식의 하나로 미륵불이 강림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에요. 매향비는 이런 매향 장소를 기록해 놓은 비석이고요. 보통은 비석에 표시를 해두지만, 사진처럼, 바위에 새겨 놓기도 했어요. 매향은 종교에 의지하여 곤고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한 민중의 자구책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어요. 현재 발견된 매향비는 여말선초의 것이 대부분이에요. '매향 = 사회격변'을 확인시켜주는 셈이죠.
사진의 각자는 '경오이월일(庚午二月日) 여미북천구(余美北天口) 포동제매향(浦東際埋香)'이라고 읽어요. '포동제매향'은 잘 안보이죠? 뜻은 '경오년(1390) 2월 아무 날 여미 마을 북쪽에 있는 천구 포구 동쪽 가에 향나무를 묻었다.'예요(1390년은 여말선초를 감안한 추정 연도예요). 매향은, 소극적이긴 하지만, 다분히 현실저항적인 의식이에요. 따라서 공공연하게 치뤄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의식에 참여한 소수만 인지하고 비밀을 유지했고요. 위 매향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래서 매향비가 발견된게 그리 많지 않고 또 발견되었다해도 정확한 매향 장소 파악이 쉽지 않아 매향된 향나무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 안국사지 매향비에 언급된 향나무는 발견이 됐어요(1975년). 수령이 1300~1500년된 향나무였고 높이와 둘레가 각각 2m 였어요. 현재 이 향나무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어요. 최초 발견자가 민간인이었고 그가 현 소유자에게 매매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매향비가 문화재로 지정이 돼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향나무는 개인이 소유할 물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태어 민중의 염원을 담았던 의식물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지요. 공공기관이 인수하여 전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싶어요. (이상 매향비 관련 내용은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553 을 참고했어요.)
사진의 각자(刻字)를 뜻과 음으로 읽어 볼까요?
庚午二月日 余美北天口 浦東際埋香(일곱째천간 경/ 일곱째지지 오/ 두 이/ 달 월/ 날 일/ 나(남을) 여/ 아름다울 미/ 북녘 북/ 하늘 천/ 입 구/ 물가 포/ 동녘 동/ 가 제/ 묻을 매/ 향기 향)
浦, 際, 埋가 좀 낯설어 보이는군요. 자세히 살펴 볼까요?
浦는 氵(물 수)와 甫(씨 보)의 합자예요. 물 가라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甫는 음을 담당하면서(보→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남자의 미칭인 '씨'처럼 물 가의 땅은 비옥하고 좋다는 의미로요. 물가 포. 浦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浦口(포구), 萬里浦(만리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際는 阝(阜의 변형, 언덕 부)와 祭(제사 제)의 합자예요. 언덕과 언덕이 맞닿는 지점이란 의미예요. 阝로 뜻을 표현했어요. 祭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신과 인간의 뜻이 상통하고자 하는 의식인 제사처럼 언덕과 언덕이 맞닿은 지점이란 의미로요. 사이 제. '가'라는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사이'는 가장자리 부분이 만나는 지점이란 의미로요. 際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國際(국제), 天際(천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埋는 土(흙 토)와 里(마을 리)의 합자예요. 땅에 묻었다는 의미예요. 土로 뜻을 표현했어요. 里는 음을 담당해요(리→매). 埋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埋葬(매장), 埋伏(매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浦 물가 포 際 가 제 埋 묻을 매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葬 ( )口 國( )
3. 풍문으로 들은 옛 비밀 장소가 있으면 소개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