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
서산시 부석면에는 유명한 냉면집이 있어요. 사계절 내내 냉면만 파는데 가격도 싸고(5,500원) 맛도 좋아 항상 문전성시를 이뤄요. 이 집과 대조를 이루는 곳이 바로 사진의 '맛집'이에요. 사람들의 출입이 뜸해서 항상 문이 닫혀 있지요. 하도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 폐업했나 싶었는데, 이따금 집앞에 소주병들이 나뒹구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은 듯 싶더군요.
며칠 전 냉면집에 들렀다 집에 가는 길에 사진을 한 장 찍었어요. 낡은 건물과 푸른 하늘이 대비를 이루니 이상하게 더 쓸쓸한 느낌이 들어 처연(悽然)하기까지 하더군요.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시가 이용악의 '낡은 집' 이었어요(머리 부분). 이용악의 '낡은 집'이 식민지의 고단한 삶을 상징한 것이라면, 이 낡은 '맛집'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고단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자괴감이 들려주는 소리 -- '이 사람아, 그러면 자네라도 좀 들려서 팔아주지 그랬어. 안타까워만 하지 말고.' '그러게요, 저도 생각만 앞섰지 행동은 뒤따르질 못했네요.' 조만간 이 맛집에 들러 매상 좀 올려줘야 겠어요. 이 맛집의 메뉴는 추어탕과 족탕이에요.
님, 언제 시간내서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 ^
한자를 읽어 보실까요? 味는 맛미, 啖은 먹을담이에요. 합치면 '먹는 맛, 혹은 맛있게 먹다' 정도의 의미가 되겠네요. 익숙하지 않은 말이라 혹시 조어(造語, 억지로 지어낸 말)가 아닌가 싶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조어는 아니더군요. 다만 일상적인 의미 -- 음식을 먹는 맛, 혹은 음식을 맛있게 먹다 -- 보다는 문학적인 비유 -- 대화하는 맛, 혹은 의미있게 대화하다 -- 로 사용하더군요. 만일 이 음식점의 주인이 味啖이란 상호를 이런 일상적인 의미와 문학적인 의미의 중의(重意)로 사용했다면 평범한 주인은 아닐것 같아요. ^ ^
한자를 좀 자세히 알아 볼까요?
味는 口(입구)와 未(아닐미)의 합자에요. 다양한 맛이란 의미에요. 맛은 입을 통해 감지되기에 口로 뜻을 삼았고, 未는 음만 담당해요. 味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調味料(조미료), 吟味(음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啖은 口(입구)와 炎(탈염)의 합자에요. 불꽃과 불빛이 뒤섞여 타듯 음식물을 뒤섞어 저작(咀嚼, 씹음)하여[口] 삼킨다란 의미에요. 啖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상적인 예는 찾기 어렵고, 啖嘗(담상, 맛봄) · 啖食(담식, 게걸스럽게 먹음) 등 드문 예만 들 수 밖에 없군요.
오늘은 정리 문제를 아니내겠습니다. 대신에 '외딴 집'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어 보도록 하시죠. 내일 뵈용~ :)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 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거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