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오후. “학교 다녀왔습니다~”를 외치며 방문을 와락 열었다. 그러나 평소 반갑게 맞아 주던 어머니는 안계시고 뒷문에 비친 오후의 긴 햇살만이 방안에 드리워 있었다.

 

늦가을 오후. 하숙방에 들어서니 책상 앞 큰 창문을 통해 오후의 햇살이 방안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주인은 집을 비웠는지 안채는 고요했다.

 

한겨울 오전. 거실 유리문을 통해 따뜻한 햇살이 탁자에 쏟아졌다. 식구들은 모두 집을 나갔고, 유리문 앞에선 고양이가 졸고 있었다.

 

사진의 시를 대하면서 떠올린 제 기억 속의 장면이에요. 평온하고 고즈넉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고 슬픈 분위기를 전해줘요.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 그리고 주로 오후라는 시간적 배경 여기에 홀로 있다는 고독감이 빚어낸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진의 시는 향잔숙묵임신첩(宿墨臨新) 일영허창감구시(日永虛窓勘舊)’ 라고 읽어요. 일영허창감구시(日永虛窓勘舊)는 사진에 거의 보이지 않죠? 사진에 보이는 부분만 읽을까 하다 시의 분위기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보완해서 읽었어요. 이렇게 해석해요. ‘향이 남아 있는 갈아놓은 먹으로 새 법첩을 임서하고 / 햇살 긴 텅 빈 창가에서 구시(舊詩)를 매만지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둘째구로 추측해 보건데 가을 무렵이 아닐까 싶어요. 햇살이 길게 뻗는 때는 봄 · 여름 · 겨울에도 있겠지만 여기는 가을의 햇살로 추측돼요.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온 텅 빈 창가 때문이에요. 텅 빈 창가는 봄날의 화사한 꽃그늘이 비치는 창가도 아니고 여름날 통풍을 위해 열어놓은 창가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겨울날의 차가운 북풍을 맞는 창가도 아니고요. 가을날의 창가가 어울려요. 그래서 계절 배경을 가을로 추정해 본 거예요. 아울러 둘째 구 끝부분 내용도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이 가을이란 점을 추측케 해줘요. 화사한 꽃그늘이 비치는 창가에서나 혹은 통풍을 위해 열어놓은 창가에서나 또는 차가운 북풍이 부는 창가에서 과거에 지은 시를 매만진다는 것은 그리 어울리지 않아요. 가을날이 적당하죠.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햇살이 긴 것으로 보면 오후예요. 그리고 시인은 그 계절과 시간대에 홀로 있어요. 시속엔 주변의 기척을 드러낸 내용이 없어요. 이 시는 평온하고 고즈넉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고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기 충분한 조건을 갖췄어요(첫째 구의 내용은 둘째 구에 비해 계절이나 시간적 배경이 추측하기 어렵게 돼있어요. 그러나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충분히 일조하고 있어요. 고요하고 텅 빈 방안에서 글씨를 쓰는 모습은 둘째 구의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운 창가에서 시를 고르는 모습과 짝을 이뤄 이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러한 계절과 시간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라고 모두 슬프거나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는 않을 거예요. 외려 충만한 분위기를 전해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시에서는 충만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은 쓸쓸하고 슬픈 분위기가 강해요. 이것은 객관적 설명이 다소 어려운데, 이 점은 이 시를 지은이에 대한 평가로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주련(柱聯)의 시를 지은 이는 이서구(李書九, 17541825)예요. 실학 4대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죠. 그는 5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어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은 일생동안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어요. 그의 시는 혁신적이거나 현실에만 치우치기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인정이 두텁고 더불어 사색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요(이상 인용문 encykorea.aks.ac.kr. 참조). 이서구에 대한 평가를 배경으로 위 시를 대하면 이 시가 왜 쓸쓸하고 슬픈 분위기를 전해주는지 조금은 납득이 되죠?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부서진뼈 알)(해칠 잔)의 합자예요. 상해를 입었다란 의미예요. 상할 잔. 나머지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주로 에서 의미 연역이 됐죠. 남을 잔.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殘酷(잔혹, 殘飯(잔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수건 건)(차지할 점)의 합자예요. 백서(帛書)에 쓴 표제(標題)란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표제는 일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의미로요. 표제 첩. 탑본(搨本)이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탑본 첩.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標書(표첩), 法帖(법첩)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힘 력)(심할 심)의 합자예요. 두 번 세 번 살펴 정확성을 기한다란 의미예요. 으로 뜻을 삼았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세밀하게 살필 적에는 평범해선 안 되고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함이 요구된다는 의미로요. 헤아릴 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校勘(교감), 戡定(감정, 생각하여 정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부엉이 환)(절구 구)의 합자예요. 수리부엉이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수리부엉이 구. 옛날이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차한 거예요. 옛 구.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新舊(신구), 舊態(구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주련 시가 있는 곳은 한국의 집’ ‘녹음정(綠吟亭)’이에요. 사진은 보다시피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표지 사진이에요. 한국적 분위기를 드러내기 위해 이곳에서 찍은 것으로 보여요. ‘한국의 집에서 찍었으니 표면적으론 무리 없지만 주련의 내용이나 장소가 방탄소년단과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아요. 그들의 활달한 안무와 노래를 생각하면 역동적인 면이 강조된 장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한국은 결코 고요한 은자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서양인들의 눈에 설 비친 모습일 뿐이죠. 고요한 은자의 나라 국민이 어떻게 방탄소년단 같은 역동적인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 냈겠어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9-01-3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탄소년단 사진이 걸려있어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주련의 글귀 내용이 쓸쓸하네요. 이렇게 다소 쓸쓸한 내용의 글귀를 주련에 담는 예가 흔했는지 모르겠어요.
전문을 보니 앞의 두 구절에 버들강아지와 복숭아꽃이 나와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찔레꽃 2019-01-31 14:4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렇군요. 엉터리 해몽을 했네요. 역시 단장취의는 위험해요 ㅠㅠ 다음엔 좀 더 세밀히 자료를 찾아보고 글을 써야 겠습니다. 에두른 세심한 지적,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