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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 - 퇴직금으로 세계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이동호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1월
평점 :
책을 펼치기 전에 표지에 씌어있는 부제를 보고 나는 한참 생각에 젖었다. 부제가 뭔고 하니 '퇴직금으로 세계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때 '퇴직하고 여행 떠나기'가 유행처럼 번질 때가 있었다. 서점에 가면 여기 저기에서 '나 퇴직하고 여행 다녀왔어요~!', '나 퇴직금으로 여행 다녀왔어. 부럽지?', '너 아직도 그 직장 다녀? 나처럼 그만 두고 멋지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때?'라고 말을 거는 듯한 책들이 가득하던 때가 있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괜히 그 책들의 저자가 위대해 보임과 동시에 나는 한없이 초라해 보여서 애써 그 코너를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이 좀 자랐는지, 나이가 들었는지 이 책의 표지를 보는데 예전의 그런 옹졸한 마음은 사라지고 없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표지 사진의 시원함에 일단 눈을 뺏겼고, '퇴직금으로 세계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이라는 부제에 마음까지 빼앗기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나이쯤 되었을 때 내릴 수 있는 '퇴직금'의 정의는 '온 가족이 나눠써야 하는 생활비'인 반면 '퇴직금이란 나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돈'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는 저자의 젊음과 패기, 용기가 한없이 부럽고 멋졌다. (feat. '왜 나는 그 시절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저자는 10년간 직업군인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군을 떠났다.
" 내 나이 스물여섯. 마음속엔 이제 나도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조바심이 분다. 지난 10년, 울타리가 되어주고 많은 배움을 주었던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길을 나선다. 지금의 현실에 머무는 것은 정착이라는 느낌보다는 퇴보라는 강렬한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끝없이 솟구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군대에서의 삼십 년을 상상해 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도 서글프고 내가 진정 원하는 나의 삶이 아니었다. (중간 생략) 내 안에서는 새로운 만남과 배움,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막연하지만 분명히 욕망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광활한 평원, 쏟아지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느낌이 다른 햇살 아래를 한없이 걷는 나를 꿈꾼다." - 본문 48~49쪽 인용 - |
저자는 뒤늦은 성장통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사춘기 시절 1차 성장통을 앓은 후 2차 성장통이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랬던 그가 존경스럽다. 대다수의 사람들도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하며 점점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그러나 현실과 타협하고, 애써 핑계거리를 찾으며 익숙한 현재의 모습에서 굳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사는거지 뭐."하며 현실속에 주저앉을 때가 많다. 나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저자는 인생의 변화를 시도하며 그 출발점으로 배낭여행을 택한 것이다.
" 이 여행이라는 산 너머에 내일의 내가 있을 것이다. 그곳을 향해, 지금 만나러 가고 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한국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므로." - 본문 49쪽 인용 - |
결국 전역을 말리시는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하고 전역 통보만 알려드리게 되는데 그 이후로 아버지와 멀어지게 되었단다. 누구의 지지와 격려도 받지 못하던 그 때 저자는 유서를 써두고서는 배낭을 메고 러시아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여기 저기를 여행하며 보낸 시간이 무려 297일이라고 한다. 1년에서 68일 모자라는 일수이다. 거의 1년을 집밖에서 생활한 것이다. 여행사를 통한 편안한 여행도 아니요, 몇 개월에 걸쳐 공부하고 준비한 알찬 자유여행도 아닌 그야말로 일상에서의 '도피'같은 여행을 떠난 셈이다. 이 무렵 저자는 무척이나 두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행이라는 게 즐겁고 유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고독했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외로움을 이겨내는 과정이었다.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끊임없이 나를 잃어야 했다. 매일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나를 새롭게 만들고 정의해야 했다. 울타리를 넘어가 미지에 맞선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를 잃게 되는 건 아닌지, 아무것도 아닌 여행이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이 무엇인지 몰랐다. " - 본문 8쪽 인용 - |
그래도 저자는 귀한 선물을 이미 받은 상태였다. 정작 당사자들은 뭐라고 말할 지 모르겠으나,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저자는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 '영제'와 함께 여행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업고 가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삶의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출구도 없어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지친 내 어깨를 토닥여 주고, 힘 빠진 손을 살며시 잡아주며 그 어두운 터널을 함께 지나가주는 그런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저자는 그런 '영제'와 늘 함께 했으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 오랜 시간을 함께 여행할 친구가 있는 저자가 몹시도 부럽고 또 부럽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로부터 의문의 1패, 2패, 3패 등 계속 패할 정도로 저자를 참 많이도 부러워했다.
저자는 많은 나라들을 다녀왔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해서 캄보디아, 태국, 인도, 이란, 이집트, 에티오피아, 그리스 , 베트남, 몽골 등 수많은 나라들을 다녀왔으며 단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기는 여행만 한 것이 아니라 '공정여행'에 관해서도 생각하는 제법 속깊은 여행자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 내가 만난 캄보디아의 현실. 5달러씩 주고 사 먹었던 밥은 현지인은 비싸서 사 먹을 수 없는 밥이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내가 먹은 밥은 뭐라고 불려야 하는 걸까. 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밥을 먹으며 했던 내 여행은 과연 무엇일까? 맛집을 찾아가 먹을 생각만 했지 음식을 만든 요리사의 삶은 나의 관심 밖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궁색한 형편을 나는 알지 못했다. 시장에서 물건값 깎을 생각만 했지 그 수공예품을 만든 장인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짜 알맹이는 없는 그런 여행이었다. - 본문 36쪽 인용 - |
저자는 여행을 다녀온 후에 후회를 했다고 한다. 더 겸손하게 그들 삶의 깊숙한 부분을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었다. 저자소개에 나와있는 사진속의 웃는 모습을 보고 참 선하게 생긴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음은 더 예쁜 총각이다. 정말 여행은 산교육이 맞나보다.
본문은 시종일관 간결하고 산뜻한 말투로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진행된다. 그러나 절대 가볍지 않은 저자의 말투에는 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 끝에 곰삭은 '인생의 여행자'만이 풍길 수 있는 진한 사람냄새가 묻어있어서 좋다. 그리고 어디서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젊은 귀농 총각의 인상적이고도 신선한 표현들이 오래오래 머릿속을 맴돈다.
'꿈을 꾼다' 그건 우리가 미래의 우리에게서 꿈을 꿔(Barrow)온다는 말이다. 하루하루 충실히 빚을 갚아 나간다면 미래의 우리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다녀온 나는 나를 만났을까? 물론이다. 그리고 새롭게 갚아야 할 빚이 또 생겼다. 넘어야 할 산도 생겼다. 만나고 싶은 내가 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만나러 가고 있다. 미래의 나와 지인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지금, 만나러 간다. - 본문 49쪽 인용 - |
책을 읽기 시작해서 한 자리에 다 끝내버릴 정도로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뒤에 더 남은 게 없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서운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넘기는데 세상에~!!!!! 'QR 코드로 보는 여행'이라는 부록이 있는 게 아닌가?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열어 보니 저자가 유튜브에 올려둔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본문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동영상으로 재생되니 더 반갑고 또 하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깜찍한 독자선물 같았다. 아직 구독자는 얼마 안 되는 유튜브 채널이긴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구독자도 점점 늘어나리라 믿는다.
이번 겨울방학은 큰딸 뒷바라지 하느라 어디도 못가고 방콕해야하는데, 저자가 남겨준 이 QR 코드들 덕분에 심심할 때나 여행이 몹시도 가고 싶을 때 나의 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 저자에게 무한 감사를 보낸다. 남은 방학동안 두어 번 더 읽고 동영상도 보면서 여행의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