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 민주당 대선 주자 해리슨의 이력은 트럼프와 상반된다. 오늘 읽은 기사에 의하면, 미셸 오바마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해리슨을 지지하면서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go higher, do something." 참여를 통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는 전략이 상상하는 미국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2.

칸트를 떠올릴 때마다 고진이 생각난다. 가라타니 고진은 코뮨을 재구성하려고 칸트 비판철학을 끌어온다. 고진이 생각하기에 코뮨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연합체로서 이타적인 것이다. 맑스도 초기 저작에서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애를 상상했을 것이다. 고진이 세계공화국을 말하는 바탕에도, 자본도, 국가도 초극하는 지점의 연합체로서의 코뮨이 있을 것이다. 이 논리에 대한 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세계가 도덕적 영양실조 상태라는 점에서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다. 


3.

당대의 상황 속에 있는 칸트를 읽어보자 하면서도 내내 걸리는 여러 표현들에 마음이 버성긴다나의 이 부대낌은 어디에서 연원할까칸트는 헤쿠바를 권력에서 내려온 늙고 몰락한 여왕으로 묘사한다헤쿠바를 그렇게 읽어야 할까특수 형이상학의 역운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계몽의 서곡을 연주할 칸트는 헤쿠바가 성숙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인물일 수 있음을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칸트의 은유는 역사 속의 인간을 원인-결과로 묶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인간은 자연 법칙에 따른 연관만으로는 설명되지도 않고예언적 실마리로도 정리되기 어렵고경험적 물음으로도 답해지기 힘겹지 않은가 말이다칸트 자신도 역사적 경험을 사건화 하면서 인간은 일종의 창시자라고 했잖은가자유라는 소질을 가진 존재자가 현상을 일으키고 난 후에야 만들어진 산물이 존재자에게 귀속되어야 할 근거가 있을까몰락한 형이상학이 그렇듯이 헤쿠바의 추방과 고통도 헤쿠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까진리는 현상을 사건화하는 권력과 힘의 배후에 있고 명성은 그 증거라고 말할 참일까.





  • P. 58 『판단력비판』은 칸트의 체계에서 단지 지엽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철학은 이성 대신 “순수 느낌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제삼 비판(『판단력비판』)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1장 기준 없이








  • P. 105 칸트와 소크라테스 모두에 따르면, 비판적 사유란 그것 자신을 “자유롭고 공개된 검토”에 노출하는 것인데, 이는 더 많은 사람이 이 사유에 참여할수록 더 나아짐을 의미합니다.
  • P. 180 『순수이성비판』—여기서 우리는 “판단은 가르쳐질 수 없고 단지 훈련될 수만 있는 독특한 재능이다”와 “이것이 없으면 어떤 학교도 고쳐줄 수 없다”라고 쓴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 4. 헤쿠바를 상품 검색하니 슈미트가 쓴 <햄릿이냐 헤쿠바냐>만 뜬다. 슈미트의 햄릿론은 알겠으나 슈미트의 헤쿠바론이 있는 걸까. 헤쿠바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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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어느 누구에게나, 그가 외롭고 절망에 빠진 자라 할지라도, 동포와 가장 강한 관계를 갖게 한다. 그것도 즉시, 물론 그 겸손이 완전하고 지속적일 때뿐이지만, 겸손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진실한 기도의 말, 즉 경배이며 동시에 가장 굳건한 결속이기 때문이다. 동포와의 관계는 기도의 관계이며, 자신과의 관계는 노력의 관계이다. 또한 기도에서 노력을 위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 아포리즘』



제대로 읽고 쓰라는 둥, 그게 아니라는 둥, 무관심만큼 버거운 반응들에 실망을 한 후에 X에서 열심히 트윗을 날렸다. 화려하게 아릅답게 나답지 않게 트윗을 올리면 다른 길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럴리가 없다. 사람들은 안심할 길을 찾는다. 그래야만 한다. 카프카 아포리즘을 보라. 시종일관 어떤 형태로든 질곡을 만들고 거주해야 완성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진리의 길이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난 지쳤다. 서재 글쓰기가 남긴 후유증은 한동안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모든 사물이 본성적으로 자신의 완전성을 욕구하기 때문이다. 불완전자가 자신의 완성을 욕구한다는 의미에서 질료 또한 형상을 욕구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지성은 그 자체로 고찰했을 때 가능적으로 모든 것이며, 오로지 앎을 통해서만 자신의 현실성으로 이행한다. 『영혼론』3권에서 말하듯 지성은 이해하기 전에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논변대로 하자면, 지성과 자신의 현실성이 맞물려야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완전해진다. 이 논의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다. 내가 찾고자 한 것은 아퀴나스의 전도였으나, 그걸 노력할수록 자신이 우스워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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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사이보그의 현신incarnation구원의 역사와 무관하다."  서구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기대고 있는 기원 설화를, 개인의 발달과 역사의 발달이라는 쌍둥이 신화로 구축하고 있는 서사 장치를 건너뛰고 있다. 사이보그는  해러웨이의 아이러니한 믿음의 이해에서 구축된 이미지다.  사이보그는 에덴동산을 모른다. 사이보그는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지도 못한다. "결국 그들에게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 별반 차이는 없는 듯하다."

 올해 다시 해러웨이를 읽으려고 책을 꺼냈다. 모든 동일성이 사라지려고 할 때 차이의 동일시는 내게 상당한 타격을 준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사유가 <있음이라는 길 위를 찾아가는 방법이나 도구>라면, 사이보그라는 사유는 무엇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영영 궁금한 문제다. 이걸 납득할 때까지 해러웨이를 읽어보겠다.




"나는 윤리적 채식주의가 필요한 진실을 체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가 갖는 극단적인 잔인성에 대한 결정적 증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리가 인간예외주의의 근거가 되는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양육하기와 죽이기를 필멸의 운명을 진 반려종 얽힘의 불가피한 일부로서 대면하게 하는 명령인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수종 공동의 번영은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진실들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 4장 검증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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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9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4-03-20 23:13   좋아요 0 | URL
절 무한냥으로 부르지 말아 주세요. 어색해서 발꼬락에 힘이 들어가네요.

잘 지내시나요. 감사해요. 무진장 아주 많이 거대하게 땡큐합니다.
근데 어쩌나요. 저 메일 못 열어요. 이십 번도 넘게 시도했는데 비번이 아니랍니다.
네이트 머시기 없어지고는 들어가질 않아서요. 거기에 남겼던 글도 꽤 되는데 모두 날아갔지요.
뭐 아쉽지는 않은데, 오늘 커피 쿠폰이 거기에 있다니 참...

그 마음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둘려주세요. 제가 성공해서 유명해지면 꼬옥 찾아갈게요.
같이 커피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고 꽈배기 들고 산책도 해요.

2024-03-21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4-03-21 07:58   좋아요 0 | URL
잠시 반성합니다. 어제 밤에 공익광고를 봤어요. 아이에게 친절하게 접근하는 어른을 경계하고 따라가지 말라는 내용이었죠. 온라인에서도 그렇죠. 어른이라고 예외는 아니죠. 갑자기 같이 커피 한 잔 하자고 해서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부드러운 말로 속이고 속는 세상이니까요. 저야 저를 알지만 온라인 너머의 사람들은 저를 모르니까 어여쁜 ㄱㅈㅈ님에게는 흑심을 품은 늑대일수도 있지요. 제가 옛날 사람이라서 ㄱㅈㅈ님을 막 대했나봐요. 미안해요. 진심은 밝히지 않을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2024-03-21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야기로 말해지는 것들은 말하자면 존재한다기보다는 발생한다. 즉 각각은 계속 진행해가는 활동의 순간이다. 한마디로 이것들은 객체가 아니라 이야깃거리이다."

"정주민은 장소를 점령한다. 반면 유목민은 점령에 실패한다. 하지만 행려는 실패한 점령자나 주저하는 점령자가 아니라 성공한 거주자이다. 그들은 사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때때로 상당히 먼 거리를 폭넓게 여행하고, 이 움직임을 통해 그들이 지나간 각 장소의 계속되는 형성에 기여한다. 요컨대 행로는 장소가 없는 것도 장소에 묶인 것도 아니라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





"메를로퐁티는 그 이유에 대해 그것들의 분열이 종결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온다”라고 말을 잇는다. 우리는 놀랍게도 반짝이는 별이 우리 자신의 눈이라는 사실, 즉 우리가 별을 그저 볼 뿐만 아니라 별과 함께 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고흐가 그린 것은 천체 투영관에서 흔히 상영되는 총체로서의 하늘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화가가 본 것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로 열리면서 폭죽 세례처럼 폭발하는 듯한 시각의 탄생을 선과 색으로 상연한다. "

"이것이 바로 삶의 독특한 점이다. 매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있는지를 해결해야 하므로 어떤 지점에서도 과정은 최종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 달성은 언제나 연기되고 언제나 ‘아직 아니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항상 인간이 되어 가고 있으며 그 진전과 함께 자신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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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포지토의 <임무니타스>는 면역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면역성이란 뭐랄까 일종의 내부적인 한계에 가깝다. 면역성은 공동체에 일련의 경계를 부여함으로써 공동체가 구축적인 동시에 해체적인 형태를, 정확히 말하자면 해체하는 동시에 재구축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내부의 한계 안으로 접어들게 만든다. 

이러한 부정적 변증관계가 특별히 부각되는 곳은 법률 언어의 영역,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체계 전체에 대한 면역장치로서의 법적 권리가 논의되는 곳이다. 루만의 주장대로 18세기부터 서서히 확장된 면역의 의미론이 근대사회의 모든 영역을 파고들었다는 것은 곧 면역 메커니즘을 더 이상 법적 권리의 기능으로 간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법적 권리를 면역 메커니즘의 기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과 폭력의 관계를 읽어내는 이 단락에서 에스포지토는 기울어지지 않는 시선을 지닌 듯 보인다.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법이 한다고 해서 공동체가 폭력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여전히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장치 속에 흡수된다." 폭력을 막는다는 장치의 작동은 폭력의 이면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자연스레 이데올로기 자체가 되고 있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닌데,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일도 거기서 시작되고 숙명이라는 ...껍데기 구도에 ...말이 사라지곤 했다.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읽기도 간신히 하고 벌렁거리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이 시간도 이런 상태를 끌어내려는 작은 시도다..

하여튼 면역성을 논하면서 법과 폭력의 관계처럼 '사적이고 탈취적인' 글쓰기를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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