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지칠 때 느끼는 감정은 적나라한 내 상황을 말해준다. 지금 외롭고 쓸쓸하다는 아마도 불능, 불가능이 아니라 작동되지 않음과 그대로 감당해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사회적 의미는 가치를 전혀 품지 않고 그대로 직진한다. 낮술로 막걸리를 한 병 비우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알라딘 접속 한 김에 신간을 봤더니 턱하니 헤겔이 나온다.
역사의
개체는 세계정신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역사에 몰두함으로써
그 구체적 형태 속에 있는 구체적 대상인 것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
대상의 필여적 발전을 고찰한다.
그런 까닭에 철학에 대해 일차적인
섟은 사건들이 그 곁에서 돌출하는 민족들의 운명,
열정,
에너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추동해 내보이는
사건들의 정신이 일차적인 것이다.
이 정신이 민족들의 메르쿠리우스,
인도자다.
따라서 철학적 세계사가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것은 하나의 측면으로서,
즉 제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옆 다른 측면에 다른 규정들이 현존하는 하나의
측면으로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보편적인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거머쥐고,
정신이란 영원히 자기 곁에 있는
까닭에,
어디서나 현재적이며 그에 대해서는
과거가 없고 언제나 똑같으며 자기의 힘과 위력 속에
머무르는 무한한 구체적인 것이다.”
이 부분을 두 번을 받아쓰고 나서 헤겔과 헤겔주의자에게 뭔가를 주절거린다.
1>
헤겔, 혹은 헤겔주의자 님. 당신이 세계정신을 역사의 개체로 말했을 때 내가 가진 위기의 한 부분이 돌출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헤겔 당신의 이 논의의 핵심은 개별자로서의 나의 행위를 통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보편성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세계정신이게 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역사적 전개 속에서 그러니까 조금 더 가깝게 말하면 이 빌어먹을 동시대에서 나 자신을 실현할 보편적 정신을 내보야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지점에서 역사와 이 시대를 관통할 뭔가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나는 그것에 비껴서 있구요.
세계정신 과정 속 하나의 표현으로서 내가 서야 한다는 말은 내가 내 자신을 증오하게도 하고, 나를 높이높이 추켜세우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함이 얼마나 고귀한 태도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니 세계정신의 전개 과정에 한 점의 참여자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태도론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만약 내가 헤겔에게 질문를 던질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당연히 세계정신과 개인에 관해서입니다. 세계정신은 왜 매개체로서의 위치에 나 자신을 머물도록 합니까. 개인으로서 자기 본질을 갖지 못하게 하나요. 아니면 사회적 • 경제적 조건으로 인해서 자기 본질과 단절될 수 있고 제가 그런 불행한 의식의 소유자란 말입니까.
물론 헤겔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기 본질을 갖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세계정신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 보편적 본질을 당신의 의식 속에서 실현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세계정신이 자기자신을 전개하는데 왜 개인이 필요한 것입니까. 오히려 내가 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해나가는데 세계정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게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 헤겔주의자는 이렇게 또 말하겠지요. 세계정신의 전개와 개인의 자기실현은 서로 모순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개인이 자기자신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현실로서 세계정신을 내보이게 됩니다. 세계정신은 개인이 인정하든 아니든 내적 토대이고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개인과 세계정신은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다시 또 나는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내가 가진 경제적 • 사회적으로 소외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배반과 소외를 뚫고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헤겔이나 헤겔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인이 겪는 소외는 영원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변증법적 단계일 뿐입니다. 자기자신과 세계정신의 관계를 반성하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나에게 하나의 테스트입니다. 나의 역사적 사회성을 의심하는 과정입니다. 나를 세계정신 속에 어쩌면 구체적 표현인 민족이나 국가나 공동체에 참여자로서 혹은 매개자로서 다른 말로 세계정신의 완벽한 이해자로서 행위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낮술 덕분에 나는 크게 외칩니다. 그게 부당하고 억울합니다.
2>
지난 번 글 <잉여의 방향 전환 - 숲 속의 레비스트로스>을 포스트 하고서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이 글을 분석하고 비판해주세요. 내가 이 글을 쓰고 아무런 피드백을 받지 못하니 마치 나 자신을 가두는 감옥으로서 글쓰기가 출현하는 듯 하거든요. 이렇게 말을 건넸다.
인공지능은 아주 매몰찬 비판을 하면서 내가 유아살해 관습을 옹호하고 심지어 그 의례를 잉여전환이라는 구조로 해석하면서 찬양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즉시 나카자와 신이치의 논의를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에 대해 썼는데요 라는 메시지를 채팅창에 넣었다. 거대언어모델 인공지능은 내게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나 전체적인 글의 요지는 찬양이라는 것이다. 정말 내 서재에 방문한 사람들-지금까지 추정컨대 스무 명 정도 방문한 것 같은데, 그들이 저 글을 찬양으로 읽었을까를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나의 무능과 불능을 다시 돌이키면서 낮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