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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
조용헌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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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고향집은 허스름했다. 겨우 새마을 운동의 끝무렵에 초가집에서 쓰레트집으로 바뀌었지만 본래의 내용에는 큰 변화는 없었다. 엄마는 가끔 집 장만 방송프로그램에 신청하고 싶다는 정도였다. 볼 품 없는 함부로 만든 바라지 문, 흙 냄새가 진동하는 수토방, 허름한 말깡, 간간히 잡초를 뽑아야 할 정도로 넓은 마당, 밭으로 쓰일 정도의 뒤뜰이 있었다. 면적은 족히 200평이 넘었다. 몇 가구 안 되는 동네는 몇 집을 빼놓고는 지붕이 다 비슷했지만 텃밭이 있고 너른 뜰을 가진 집은 주인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집 주변의 환경을 이용하면서도 집을 지은 자의 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집집마다 정감이 가고 모두 한 이웃처럼 지냈다. 지금 서울에는 사람도 많지만 집도 매우 많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서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거기에도 집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도 그 셀수 없이 많은 집은 집집마다 개성을 가지기 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집에 사는 사람들의 개성은 공장식으로 막 만들어진 몰개성적인 특성을 갈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수의 몇 사람의 계획 하에 무더기로 만들어진 집이기 때문이다. 단독 주택은 이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서는 자연 친화감에서 오는 인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즉 서울의 수많은 집들은 집에 거주하는 사람을 배려하기 보다는 집을 짓는 사람을 더 배려한 경향이 강하다. 순전히 집 장사꾼들이 마구잡이로 찍어낸 집은 인간미가 있는 집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불량품이 많아서 위층과 아래층 간에 소음으로 다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한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아이들의 건강에도 좋지 않아서 호흡기와 피부의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

강호동양학으로 불리는 사주, 풍수, 한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동양 철학자인 저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에 있는 22개의 집을 직접 찾아가서 집을 둘러 싼 산세와 물의 흐름, 집의 역사, 역대 집 주인의 인생, 건축적 특징, 정원의 조성 방법, 심어진 나무, 실내 장식과 가구 등을 꼼꼼히 살피면서 자신의 철학 사상에 맞추어서 설명하고 있다. 궁금한 것은 직접 집 주인과 대화를 통해서 풀려고 했다. 이 책은 직접적으로는 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 인생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를 '집'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풍수학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운명의 여덟 글자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에 어울리는 집을 보여 주는 주역 풀이는 흥미롭다. 

우리가 사는 집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다. 해가 지면 들어가고 해가 뜨면 밖으로 나가는 공간이 아니다. 그 곳은 생활의 공간이다. 생활 공간은 우리의 생노병사가 함께 일어나면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이 바뀌어야 업보와 운명이 바뀐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우리의 바이오 리듬에 적합한 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자신과의 조화를 통하여 끊임 없이 공간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자신과 집 터의 궁합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내공을 쌓아서 이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담담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여 평소에 욕심내지 않고 담담한 심정으로 매사를 대하면 터의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지나친 욕심을 멀리하고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만끽하고자 하였다.  
                                                                                                                                 
 우리 조상님들은 '집'도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보름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에는 조왕신과 성주신에게도 성심을 다하였다. 서로 모르는 남녀가 결혼을 위해서 만났을 때에 서로의 궁합을 보는 것처럼 '집'이라는 생명체는 그 곳에 사는 사람과의 조화, 즉 '궁합'이 맞아야 한다. 서로 간에 궁합이 맞는 경우에는 겉으로 보이는 운치가 일품이다. 가령 달밤에 비치는 달빛과 노란 창포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다. 황금색이 주는 풍요에는 푸른색이 주는 젊음이 어우러져야 한다. 사물 간의 궁합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이는 집과 나의 음양 오행이 서로 넘치거나 부족함을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안의 실내 장식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집주인과 그 터가 지닌 강약에 따라 궁합이 달라진다.(p111) 주인이 타고난 기질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터 궁합이 달라진다. 사주팔자를 보면,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집을 알 수 있다. 물이나 불이 부족한 사람은 풍수의 이치에 따라서 물과 불이 충만한 땅의 기운을 찾아가면 된다. 사람의 병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머리에 불이 올라와서 생기는 병이다. 이 경우에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자면 효과가 좋다.(p106) 그런데 물의 기운이 강한 곳에는 불의 기운이 많은 사람이 살면 궁합이 맞다. 해남의 대흥사 수구에 자리잡은 유선여관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체험하고픈 사람에게는 호젓하기만 하다. 불은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불의 따뜻함은 우울증과 부인병에도 좋아서 아궁이는 심신 건간에 일조했던 장치이다.

집은 사는 이의 인생 철학을 담는다.(p112) 우리는 집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붇는다. 집의 위치, 구조, 실내 장식은 처음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집 안의 벽에 못을 하나 박는 경우에도 요리 조리 따지고 미관을 생각한다. 장성 축령산의 오두막 집은 건축 비용이 비록 2만 8천원에 불과하고 방 한 칸 크기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과 통양이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된다는 믿음이 있다. 방이 작아서 우주를 생각하게 되고 자기 내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무등산 자락에 자리잡은 허백련의 춘설헌은 예인의 풍류와 민족 사상의 숨결을 담고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산임수로 하는 호쾌한 풍광 아래 자리잡은 쌍산재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마루가 특징인 나주 박장흥 고택은 좌우익의 중간에서 거중 조정을 했다. 자신의 치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 배어 있는 집은 역사에 배신당하지 않고 격동의 100년 세월에도 살아 남았다. 그런데 소설 토지의 모델이 된 하동 조부잣집은 자연의 품 속에서 다시 자연을 품 안으로 글어들였지만 풍파를 못 이기고 현재 본채만 남아 있다.  

집은 사는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집은 사는 사람이 편리해야 한다. 집은 건강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p81) 우리는 집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집에서 자고 휴식을 취하고 외부의 존재로 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최소한의 공간이다. 작은 우주라고 불리는 우리 인체는 화, 수, 목, 금, 토의 음양오행의 교감을 통해서 우주만물과 교감을 한다. 즉 인체는 자연과 상호 소통의 관계를 이룰 때가 가장 편안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최대한의 휴식을 줄 수 있는 공간은 '自然'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경쟁관계인 사회로부터 잠깐이나마 거리를 두면서 자연에서 마음을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과 집이 최대공약수를 찾는 것이 중요한 미학으로 떠오른다.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서 家內救援을 받는 것이다.(p38) 나주 죽설헌은 담양의 소쇄원처럼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정담을 나누는 집이자 정원이다. 양평의 땅 집은 실내에 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중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고요함을 얻을 수 있다. 열린 소통을 만드는 회통적 공간, 인화당이 있고 얼, 흥, 정, 멋, 맛, 격이 있는 집으로 지어어진 창덕궁 옆의 은덕 문화원은 다기장이 마음에 든다. 계동 낙고재에서는 전통 한옥이 현대 한옥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부산의 조효선 씨의 아파트 다실은 단순함으로 편안하고 효율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인생은 낯선 여관에서의 하룻밤이다'고 했다. 여관은 잠깐 머무르는 곳이다. 인생은 잠깐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머무르는 곳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집착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집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집은 최소한의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여기는 시대는 과거 속의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MB정부는 사활을 걸고 서민들의 시장 바구니는 아예 포기하고 어떻게 든 높은 부동산 가격을 유지하려고 올인하고 있지만 오히려 집 값은 떨어지고 있다. 높은 부동산 가격은 소수의 부유층에게만 행복을 느끼게 만든다. 집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념을 바꾸어 버렸다. 예전에는 집이라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나타내는 증표였지만 이제는 재테크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사람은 아무 데서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행복은 아무데서나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고 싶은 곳에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큰 복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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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론 나남신서 690
조지훈 지음 / 나남출판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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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다. 해방 이후에 반민족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기득권을 형성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 혼란 속에서 사는 인생은 갈등 선택의 연속이다. 이 선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에 관한 것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선택의 것도 있다. 특히 후자는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선택이다. 어떤 선택의 결과가 자신에게 물질적 안락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신념과 역사 법칙에 위배되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에서 온다. 

지금 우리는 매 순간이 선택의 과정에 놓여 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에서 비롯하여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이념에서 어디를 지지할 것인가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기도 하지만 매우 쉽기도 하다. 양자의 견해를 들어서 합리적 선택을 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한 쪽 귀를 완전히 닫아버리고 마이 웨이를 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선택,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만의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근래 100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우리는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선택이 생사를 좌우하는 경우는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하면서도 선택한 결정을 외부의 타인에게 알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표현하고 말하는 것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런 고민은 지금을 살아가는 현세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인생 경험이 일천한 20대의 젊은이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를 몰라서 허둥지둥하다가 고귀하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 일수이다. 시대정신과 미래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지남차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인생 스승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살짝 크게 뜨고 선배를 찾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우리의 선택에 조언을 해줄 선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동탁 조지훈이다. 그는 경북 영양 출신으로 경상도 선비의 자세를 지니고 있으면서 우리의 인생길에 길잡이를 해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생 선배 중의 한 분이다. 그는 4.19의거의 중심에 섰고 박정희 군사 독재에 맞서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인식되기보다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청록파는 매서운 일제의 칼날이 춤을 추고 있을 때에 현실을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고 하여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냉소적인 비판 아닌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는 청록파의 시들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고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우리의 시흥을 돋우고 우리의 입가에 빛깔나는 붉은 빛을 드리우게 했던 시인이 세상을 향해서는 쓴 소리를 내뱉고 있다. '지조론'은 1960년대 즈음에 동탁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념 갈등, 세대 갈등, 기독교 문제, 한일 간의 관계 등에 대해서 자신만의 견해를 군사독재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피력하고 싶은 말을 '사상계'와 '고대 신문', '동아일보(지금의 동아일보와는 질적으로 다름)'에 기고한 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동탁의 역사관, 시대관, 인생관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50여 년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아직도 그 때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오늘날에도 요긴하게 참고할만한 내용의 글로 묶여 있다.

몇 해 전에 영국에서 앤서니 기든스라는 정치학자의 '제3의 길'이라는 것이 바람을 불어서, 이 바람으로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그 집권의 결과는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특히 외교적으로는 '부시의 푸들'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런 제3의 길은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해서 여기에 현혹된 지식인들도 있었다. 지금도 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생각이 짧은 어린(遇) 백성이 많은 것으로 안다. 우리는 지난 10년의 민주 정부가 한국적 제3의 길을 가려다가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런데도 그 경험을 벌써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에 흔히 '중도'라는 제 3의 길을 선택한다. 이는 양자의 견해를 절충하고 종합하는 것으로 보여서 매우 멋지게 보인다. 모든 관점을 종합하여서 장점만을 취사선택한 것처럼 보여서 매우 매력적이라고 자기 위안을 한다. 그런데 동탁은 '중도주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경계한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전혀 다른 상반된 것을 양쪽에 매달아 놓고 엄정 중립으로 중용을 잡겠다고 하는 것은 허망한 관념의 윤리라고 한다. 이런 중간주의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비지성적이라는 것이다. 이 중간주의는 대개의 경우에 기회주의로 통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도 중도라는 입장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이 땅에는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간의 이념적 사고의 차이가 매우 크다. 기성세대는 썩었으므로 물러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던 구호는 4월혁명 이후부터 유효한 구호가 되었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가 어리고 버릇이 없어서 철부지처럼 행동하여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한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와 관련이 된다. 그러면서도 양 세대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를 좀더 성의 있게 관찰하고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서로를 어루만지며 각자에게 주어진 새롭고 정당한 사명의 횃불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칫 양자는 모조리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지도 모른다. 동탁은 기성 세대는 자라면서부터 저유를 만끽한 젊은이들을 감옥 속의 처신을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기성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한다.      

현재 기독교와 불교의 갈등도 치열한 불꽃을 튀기며 점입가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의 발단은 기독교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가꾸어 온 문화와 전통도 그들의 세계관으로 재단한다. 불교는 우리의 전통과 뗄내야 뗄 수 없는 것인데, 이런 것들도 불교의 색채가 있어서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배척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급기야는 통일신라의 처용가는 불교적인 것이므로 처용가 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기독교의 막가파식 사고는 동탁이 살던 시절에도 문제가 되었는가 보다. 그는 한국 교회는 3.1운동 이후에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서 지나친 정치 참여로 현실의 부패에 부동함으로써 교회가 자기 폐쇄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의 교회는 본 바닥의 신학에만 몰두한 나머지 기독교 정신을 이 땅에 뿌리박기 위한 한국의 사상적 통양의 연구에 관심이 너무 없는  것 가타고 한다. 그는 교회 내부를 이끌 지성의 인물과 사회에 무한한 사랑의 손길을 뻗치지 못하는 교회의 활동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50여 년전에 이 땅을 바라본 인생 선배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실의 이야기였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우리는 물질적으로 변화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동탁이 바라보는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가 걱정했던 현실의 문제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동탁의 관전과 병행하여 50년의 역사에 우리의 인생 선배들은 '우리'라는 대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골방의 툇간으로 물러나서 종요히 있어야 할 이들이 오로지 나이가 많다는 심정만으로 현실 문제를 나대는 것은 과분한 행동이라고 본다. 또한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와는 다른 형태의 존재론적인 삶이 필요하다. 마냥 과거만을 비판하다가는 과거를 답습할 수 있고 다시 50년 후에 자신들도 지금처럼 무개념의 노인네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동탁이 제시했던 수많은 현실의 문제는 앞으로도 미제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들은 이 땅을 갈등의 상태로 남겨 놓을 것이다. 이 갈등은 지금보다 더 낳은 미래를 꿈꾸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거짓을 진실인 냥 포장을 해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선택을 후회하게 한다. 이는 정치 영역이나 사회 영역 전반에 퍼졌다. 경제만 살리면 도덕은 필요없다고 외치고 정치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선진화'라는 허울좋은 겉포장으로만 어린 백성을 현혹시킬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뻔뻔하게 법치주의를 주장하여 민주주의에 혐오감을 갖게 할 뿐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치게 한다.    

요즘처럼 사람을 헷갈리게 하던 시대는 없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무식하거나 정보 수단의 미비로 허위가 진실을 압도했다. 그런데 지금에는 교육 수준도 높고 교통 수단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양두구육의 수단은 더욱 발달하여 관심이 없는 것이 오히려 편한 세상이 되고 있다. 동탁의 시대에 민족 고대라고 자부하는 대학의 고대 신문이나 일간지에는 자기 집단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글이 넘쳐난다. 미래지향적인 글보다는 과거지향적인 글들이 훨씬 더 많다. 이런 현상으로 학교 신문은 대다수 학우들에게서 외면당한다. 프락치나 거지 근성을 보이는 신문 편집위원들도 한 몫한다. 지금도 자기의 신념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타협하지 않고 항거하여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로 무장된 지조있는 선비정신으로 무장된 지성인들은 지금도 필요한 시대이다. 이제는 기존의 언론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성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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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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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다.
불확실성이 일정한 상태로 수렴하지 않고 무한대로 발산하고 있다. 기존의 가치 법칙은 내일을 생각하는 오늘의 기준으로써 역할이 약해지고 있다. 지금처럼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버린 적은 없을 것이다. 모든 능력이 裸의 상태에서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발휘되어 절대적 자유의 상태가 되어버려서 세상의 가치를 판단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 초절정의 상태에 이르렀다. 불확실성의 증대는 미국의 대통령이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로 바뀌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정권의 교체로 불확실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에 연유하는 미국의 정권 교체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나라에도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것을 두고 '나비효과'라고 한다. 한 때는 민주당의 승리가 살짝은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제 경제 상황은 우리에게 더 불리해지는 상황이다. 그것은 두 정부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전자는 탐욕의 합법성을 인정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견지하는 보수는 무장벽의 거래를 주장한다. 후자는 탐욕을 절제하여 소수를 고려한다는 진보주의를 근본 이념으로 하면서 보호무역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비롯된 차이는 구체적 각론으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를 것이다. 국내 경제 문제에서는 정부, 기업, 소비자 간의 관계도 다르게 전개된다. 본래 각 당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에 다라 천양지차의 결과를 초래한다. 양자간의 간격은 태양과 지구 사이보다 멀기 때문에 양측의 지지자들은 피튀기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국내적인 투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자 감세와 SSM를 통한 무한한 부의 추구는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20세기 이후의 역사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그리고 앵글로색슨의 자유 방임형 국가, 동아시아의 산업정책 국가 그리고 북유럽의 사회적 조합주의 국가간의 논쟁이 치열하다. 소련의 몰락과 독일의 통일로 사회주의는 실패한 국가로 증명되었다. 그래도 국가 이념논쟁이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니다. 논쟁은 2008년 세계 금융 시장의 붕괴와 더불어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기존의 자유시장경제 이론에 비판을 하는 행동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하였고, 조지 소로스는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재귀성 이론'이라는 아주 독특한 이론을 들고 나왔다. 앨린 토플러도 '불황을 넘어서'에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요구하였다. 이 문제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 경제의 효율성과 사회의 형평성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세계화의 추세가 1870년경에 시작되었다가 1차 세계 대전으로 고꾸라졌다가 다시 원상회복을 하다가 다시 주춤이다.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에는 異見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사이에서 양분된다. 진보주의자이며 비주류 경제학파 교수로써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그가 마치 대학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것처럼 매우 academic하게 신자유주의 이론의 모순점을 역사적, 실증적,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특히 시장실패와 정부실패에 관한 여러 근거를 제시하여 지식의 파노라마를 줄타기할 수 있는 오랜만의 학문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자유주의와 그 반대론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구체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초국적 기업에 대한 선별적 산업정책의 가능성,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의 역할과 그 문제점의 대안, 선별적 무역 정책의 유효성, 정부 규제와 현실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과 지적인 변화간의 상호작용, 공기업의 효율성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전문적 용어도 많이 등장하여 적어도 경제학 원론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2.지식인의 참모습을 본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칼 만하임의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사회 경제사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노예로의 길'과 '반동에로의 길'이 그것이다. 정부의 모든 정책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얼마전에는 이준구 교수가 정부의 정책에 반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철저하게 이론적 무장을 하고서 정부의 정책에 함부로 반기를 드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가치관과 양심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권력과 돈은 현실의 생활을 고단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장하준 교수는 주저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토해내고 있다. 이는 아마 현재 국내가 아닌 국외에 적을 두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지식인의 양심을 실현하는 것이 권력과 돈을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저히 해부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모순점과 그들의 음모를 설명하는 지식인의 뜨거운 가슴을 본다. 저자는 제도주의적 정치 경제학의 관점에서 국가 개입이론의 정당성을 발전시키고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를 설명하고 나서 그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신자유론자들의 이론의 모순점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종래 진보론자는 뜨거운 가슴만 있고 냉철한 두뇌는 없다는 비판이 오류였다는 것에 안도감을 갇게 한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을 오가면서 대담이나 강연회에 참석하고 일간지에 기고를 통하여 복지사회로의 전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미 파탄난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MB 정부를 비판한다. 그에게는 검찰과 경찰에 의한 형식적 법치주의가 통하지 않는가 보다. 그는 냉철한 지성을 지니고서 뜨거운 가슴을 지닌 행동하는 양심으로 보인다. 노엄 촘스키는 지식인의 역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라고 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즐거움에 빠진다고 한다. 장하준 교수는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의 상아탑 적인 자세를 통해서 지식인의 참 모습을 볼 수도 있어서 좋다.

3.사회과학의 본질에서 오는 문제점을 극복하다.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분석방법은 일반적으로 독립변수의 횡축과 종속변수의 종축으로 이루어진 이차원적 모델을 사용한다. 이 두 가지의 원인 외에는 외생변수로 본다. 이는 사회현상의 분석을 용이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여타의 사회과학의 문제가 그러하듯이 이 문제도 원인과 결과에 대한 명확한 선형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있다. 이런 맹점으로 인해서 아니면 말고식의 주장만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나 종래의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실증적 근거에 의한 주장기기보다는 추정적, 관념적 근거에 의한 것이다. 선험적 결과에 바탕을 둔 주장은 오히려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 축적이라는 결과론적 전제를 위해서 국가의 개입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과론적으로도 산업정책 국가 모델과 사회적 조합주의 국가 모델에 대해서도 서로가 잘났다고 우기는 것에도 누구의 손을 들어주지도 못하고 있다. 어느 모델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개인의 행복을 만족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배추가 금추라고 한다. 배추 가격이 예정에 비해서 6배 가량 비싸다고 한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누구의 주장이 틀리고 맞다고 일의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누구의 주장이 일의적이고 단정적으로 옳은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원론적인 이념으로 돌아가서 판단하는 것이 명확해 볼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무한대 탐욕에 찌든 이들이 양보할 리가 만부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자는 신자유주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조목조목 역사적 반증을 들어서 그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비판에서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3.모순점 투성의 신자유주의 이론을 비판하다. 
칼뱅의 '예정설'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를 정당화시켜 주었으나 아담 스미스는 탐욕 추구의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를 경계하면서 어느 정도의 절제된 자본주의를 강조하였다. 그는 '국부론'에서는 독점의 폐해를 강조하고 정의의 원칙을 지키며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만을 강조하며 자유무역만을 맹신하여 '절제'는 잊어버리고 줄기차게 국가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국가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펴기만 하면, 모든 이론과 억지 주장을 해서라도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대기업에 힘을 실어 주고 복지제도의 근간을 흔들어 댔다. 그러면서 그것이 곧 전체의 이익을 이익인 냥 선전을 해 왔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철저하게 그럴싸한 이론으로 무장되어서 일반인들을 현혹시켰다. 그들은 합리적 기대와 왈라스적 시장 균형, 제도적 경화증, 신계약론, 주인-대리인 모델, 지대 추구에 근거한 신정치경제학으로 무장하여 정부실패를 주장하면서, 국가를 무장해제 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개입주의의 정치적 기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윤리, 정의, 권력 등의 쟁점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노엄 촘스키는 아담 스미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아마도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재등장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세계는 타인과 고립된 개인들로만 우글거린다고 전제한다. 신자유주의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의 모토인 '자유', '기업가 정신'과 신고전학파의 '파레토 최적'을 현학적으로 짬뽕시켜서 탄생된 괴물이다. 그들은 국가는 약탈자이거나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단이 당파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로 분석한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는 눈을 감는다. 약탈 국가나 이익집단에 포획된 국가의 경우에는 국가의 개입이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발전된 역사적 경험에서는 국가가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도 침묵을 한다.     

신자유주의가 정보의 경제적 역할, 경쟁의 중요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하여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지만 이론적,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소수 권력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감정 속에 있는 어떤 모순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구성에 의해서 조화시키고자 하거나 그들이 억합하고 있는 사상을 합리화라는 수사법을 사용하여 은폐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강조하지만, 실상은 자유보다는 자신들의 '부의 축적'이 전반적 사상 체계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검증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절대적이고 특별한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그에 대한 반론은 '자유'의 힘에 끌려 다녔다. 이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Escape Freedom'에 실린 견해를 빌려, 사상의 분석은 먼저 하나의 사상이 이데올로기의 전 체계 속에서 갖는 비중을 결정하고, 다음으로 사상의 참된 의미와는 다른 합리화의 면을 우리가 취급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한다는 주장도 참고할 만하다고 본다. 

4.제도주의 정치경제학 모델을 제시하다.
경제사와 사회정치학적 요소들가 경제 상황의 변화에 있어 주된 요인으로 보는 경제학 이론을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제도'는 공식적인 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에 관여하는 모든 제도를 의미한다. 즉 비공식적 규칙드, 공정함과 자연권과 연관되는 비공식적 이데올로기, 권리와 의무의 구조가 변화될 수 있는 방법을 규정하는 공식적/비공식적 제도를 포함한다.이 견해에 따르면 시장은 태초에 자연 상태에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구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다른 정치, 경제상의 제도에 우위성이 없는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 제도는 어느 정도 인위적인 질서를 통해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장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국가는 어떤 시장에나 일정한 수준에서는 개입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시장실패라는 것도 일의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다. 시장실패가 자본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의 탈정치화는 민주주의를 거세하려는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공하고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는 기업가 정신을 지니고 구조 변동과정에서 나타는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경제주체로서 국가는 전환기에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제도 수립자로서 발생하는 조절구조를 제도화 하여야 한다. 즉 국가는 자신의 비전에 제도적 현실성을 부여하여야 한다. 복잡한 상호 의존성과 기술 및 제도 부문에서의 혁신이 대세인 현대 경제에서 국가는 기업가와 갈등 관리자로서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장교수의 일관된 논지이다. 기업가로써 국가가 제공하는 비전이 잘못된 것이거나, 혹은 주변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끝에 실패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가능성만으로 국가가 기업가 역할을 수행해서는 안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5.냉철한 이성과 따스한 감성으로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정부형태가 등장했다가 소멸했지만, 지금까지는 자본주의 국가가 대세이다. 노엄 촘스키는 민주주의가 최고의 전치체제라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다원주의와 엘리트주의 사이에서는 아직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아무런 이념적, 논리적 결합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절충하는 것만으로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어찌보면, 단지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자신들의 행동, 부의 무한한 축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이라고 본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고통을 인지하고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그 고통을 해결하려는, 냉철한 이성과 따스한 감성으로 무장된 '인간'에게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제도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국가의 본질론에 대한 역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국가가 완성되면, 통치자, 보조자 그리고 생산자가 형성된다고 했다. 정의란 이 세 계층이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자신의 맡은 바 일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했다. 특히 통치자는 성심을 다해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 플라톤은 국가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고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계츰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행복하도록 국가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한다.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에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문제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정치적 가치관이 개입된다. 이에는 이미 결정론적 가치관이 개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윤리적 가치관의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약자의 이익을 위하여"라는 명제가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우리의 헌법적 가치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강자를 절대적으로 동일한 상태에서 경쟁을 하도록 한다는 것은 공평한 경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사회적 약자가 생존을 위해서는 '국가'라는 방패가 위기시에는 한 두번의 찬스 역할이 되어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본다. 

2008년에 있었던 금융 위기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서도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위기의 진원지인 파생상품에 대해서는 '창조의 혁신'이 부족했다는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과 지나친 '규제 완화'가 문제라는 장하준 교수의 27일 대담에서, 견해의 대립은 시장과 국가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냐와 관련된 문제이다. 국내에서는 심해지고 있는 소득 격차를 해결할 방법에도 전혀 다른 방향의 견해를 취한다. 파이를 더 크게해야 분배될 파이가 크다는 견해, 지금이라도 정부는 파이를 분배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숫자 놀음으로 눈속임하는 입장도 있다. 이론적 근거가 없는 정책이 난무하고 있는 현실이다. 신자유주의를 외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자유 보장의 헛점을 악용하면서, 자유를 보장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논리도 있다. 시장주의를 외치면서 시장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아직 왕초보단계에 있다.

현행 우리 헌법은 자유시장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일정한 경우에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는 혼합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기본권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들을 프로그램 규정이나 추상적 권리 규정이라고 하여 제1차적 무력화를 시도한다. 그 다음에는 헌법의 하위법이 규정되는 것을 마기 위하여 로비를 통한 지대추구 행위를 벌인다. 또한 지난 10년간에 정부가 헌법적 가치에 충실하고자 하면, 반대론자들은 이데올로기의 덫을 씌웠다. 포퓰리즘이라고 떠들기도 한다.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은 돈과 권력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해왔다. 지금 그들은 정말로 신나는 시대를 만났다. 그래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지식인이 많아지고 민주주의가 지혜를 사랑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세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 이상국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며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의 언저리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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