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
유채림 지음 / 새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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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고 백없는 서민들은 억울한 누명을 씌이고도 맥없이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뚜렷한 증거없이 정황만으로도 살인자로 내몰리는 현실이다. 그 현실이 소설로 재구성되었다. 작가는 남원에 계신 오쿠바 어르신의 증언이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변호사 이덕열이 1972년 10월 10일 춘천 우두동에서 구속수감된 오쿠바 사건을 조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해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CCTV도 없고 언제든지 주변인들의 증언과 형사들의 강압적인 수사로 죄는 조작될 수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은 불리한 증언에 의해 망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사례는 <그것이 알고 싶다>나 <추척 60분>에서 숱하게 봤던 억울한 사연이다. 


 


오쿠바라는 뜻은 치과의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일본말을 별칭처럼 쓴 말이다. 원래 이름은 정원탁으로 강원도 춘천에서 나고 자랐다.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정원탁은 어느 날 춘천파출소장의 딸 강간살인사건의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짜맞추기 수사와 억지 논리로 하루 아침엔 살인범으로 내몰린다. 단지 정황만으로도 무죄추정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채 1973년 5월 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에서 패소하고 만다. 몇 번의 재심 청구서는 이유없음으로 기각되고 마지막 희망을 건 과거사위원회에서 제출한 청원서는 2011년 10월 27일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종결 맺는다.


 


증거도 없이 진범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쉽게 살인범을 만들려는 안이한 수사행태가 맺은 비극이다. 이 소설은 오쿠바가 억울한 누명을 쓴 시점으로 시작하다 일제 강점기 말부터 그의 일대기를 거슬려 쓰고 있다. 오쿠바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에 대해서다. 그는 제법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사진작가를 꿈꾸었는데 서울에 살면서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녀 목사를 준비하게 된다. 이후 자신의 원래 꿈을 이루고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살지만 첫째 아들을 잃고 만다. 그 슬픔을 잊으려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와 만화가게를 차렸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40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왜 제목을 넥타이를 세 번 맺다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의 법과 권력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놨는데도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사죄나 손해배상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비록 누명은 벗었지만 오쿠바 개인에겐 반평생을 누명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건 소설 속에서 이뤄지는 극히 일부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며 현실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숨죽여 말하지 못하고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진실은 언제가 밝혀지겠지만 다시는 오쿠바처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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