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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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출간 후 많은 논쟁거리 된 작품 <이방인>의 번역 과정을 소설 형태로 담은 책 <까뮈로부터 온 편지>. 이미 전 세계 101개 국가에서 번역되어 수천만 부가 팔렸고 우리나라에도 여러 출판사를 통해 <이방인>은 서로 다른 번역가의 손을 거쳐 나온 상황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은 번역을 얼마나 정확하게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 인물설정, 독자들의 이해도가 각각 다를 수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번역서가 거의 직역에 가까워 잘 읽히지 않은 책이 많았다. 분명 한글로 번역된 책임에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작품의 몰입도는 제2의 창작이라는 번역에서 결정되는 게 아닐까? 일반 독자들이 관련 언어 전공자나 유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원본과 대조하며 읽을 사람이 있을까? 그저 번역된 것으로만 이해하고 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문학소설을 고를 때도 출판사와 번역자에 따라 각각 느낌이 다르다는 걸 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만 해도 출판사마다 문체가 전혀 다르다. 친절한 부연설명이 추가될 수 있겠지만 독자들이 작품을 읽고 받아들이는 느낌 자체에 차이가 생긴다는 점이다. 



저자로서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미 불문학계의 대가인 김*영 교수가 번역한 <이방인>을 건드리는 일은 출판계의 특성상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어 원본과 영문 번역본, 김*영 교수 번역본을 서로 비교해가면서 번역의 오류를 지적해내고 있다. 단어 하나에도 쓰임새가 다르며 그 차이들이 번역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미 새움출판사에서 2014년에 펴낸 <이방인>의 역자노트에서 제기된 부분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새움출판사에서 최근에 번역한 <어린왕자>처럼 <이방인>도 가독성이 좋았다. 가독성이 좋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보면 읽은 직후 머릿 속으로 상황이 그려지면서 이해하기 수월하다는 점이다. 개정, 재개정, 개정3판 등을 하면서 같은 번역가가 한 책을 새롭게 완역하는 이유를 되짚어 보면 결국엔 그간의 문법적 오류와 시대적 반영을 포함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저자도 비교했지만 같은 책이라도 번역가에 따라 문장이 각각 다르게 표현된다. 세계문학이라는 것이 손실은 적고 기본적인 작품에 대한 안정성 때문인지 시중에는 서로 완역본이라며 출간된 책들이 많다.



독자들은 제대로 번역된 책을 읽고 싶을 뿐이다. 이왕이면 원 저자의 문체를 잘 살렸으면 좋고 의미가 명확하면 좋겠다. 몽 페르, 므시외, 몽 피스, 기요틴처럼 원문을 한글 발음 그대로 옮긴 것 말고 뜻을 적확하게 해주었으면 한다. 혹자들은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일이 역자의 오역과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보면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인 이유도 있을 듯 싶다. 어느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카뮈로부터 온 편지 한 통으로 인해 블로그에 <이방인> 번역을 연재하기까지 출판사에서의 일들도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진실과 노력보다는 권위에 기대는 성향이 많다. 권위만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는 생각이다. 분명 오역이 눈에 보이는데도 번역가의 명성에 기대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겨버린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면서 더 나은 번역을 위해 애써도 모자른데 말이다. 어차피 판단과 선택은 독자들의 몫이다. 번역가의 수고로움은 무엇으로 말할 수 없지만 김정용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이를 계기로 문학계가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했으면 좋겠다. 고전 번역부터 바로잡는 노력이 선행된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문학을 접할 기회가 더 많아지는 이유에서다.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을까? 레몽은 정말 악한인걸까? 어쩌면 사회의 통념과 편견으로 인해 한 사람의 살해동기를 등식화시키고 뫼르소는 필연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모든 일들이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이더라도 결과론적으로 쉽게 판단하기 때문에 시대의 희생양으로 단두대에 올라가야 했다. 살인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고정관념과 사람에 대한 모순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지 겉으로 드러난 일로 생사여탈권이 결정되는 일이 안타까울 뿐이다. 참 논쟁이 많았지만 <이방인>이 명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고전에 더 관심을 갖고 많이 읽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었을까? 이 책은 기존 번역문단의 권위주의와 기득권에 도전하는 그 과정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출판사의 대표로 번역가로 바쁘게 보낸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번역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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