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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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면도날>이 출판된 시기는 1944년으로 저자인 1874년에 태어난 서머싯 몸의 나이 70살이 되던 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기로 전쟁에 끌려간 수많은 젊은이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국민들이 전쟁 포화에 죽어나가며 혼란이 극도로 치닫던 때다. 주인공인 래리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군 복무를 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사건 이후 삶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져 버렸다. 같은 전투기 조종사 래리보다 3살 위지만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는데 그의 후미를 쫓던 적 전투기를 격추시키다 그만 큰 부상을 입고 마는데. 다행히 복귀했지만 래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귀환 후 하릴없이 빈둥대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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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사벨이 그런 래리에게 했던 말들은 그 당시나 지금 기준으로 봐도 평범하게 사는 우리들이 당연하게 여겨온 삶이었다.

"잘 생각해 봐, 래리. 남자는 일을 해야 해. 이건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고. 미국은 젊은 나라이고,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건 남자로서 하나의 의무야. ... 앞으로 미국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1930년쯤 되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거래. 정말 가슴 설레는 굉장한 얘기잖아?"

<면도날> p. 81


하지만 겨우 20대 초반이던 가장 친한 친구가 한순간에 죽는 모습을 지켜본 래리에겐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눈부신 경제 발전도 희망찬 미래도 중요하지 않게 본 것이다. 돈에 관심도 없고 취직해서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단지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걸까? 이 책엔 약혼녀이자 매력적인 여성인 이사벨과 잘나가는 증권회사를 물려받은 그레이, 이사벨의 삼촌이자 사교계의 신사인 엘리엇, 이사벨의 어머니이자 엘리엇의 여동생인 브래들리 부인, 남다른 감수성으로 시를 좋아했던 소피, 화가들의 뮤즈로 활동하다 전업 화가가 된 수잔 등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저자도 소설 속 작가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현실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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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하고 난 뒤에 보니 정신없이 읽었던 그 시간 동안 소설 속 이야기에 푹 빠져서 다음이 궁금했던 것도 오랜만이다. 다들 각자의 인생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느꼈다. 이사벨은 평균적인 생각을 가진 보통 여자로 대화가 즐겁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래리와 결혼하기엔 지금까지 누려왔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어 약혼을 거절한다. 이후 그레이와 결혼해 딸 둘을 낳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상류층 사회 속에 살아간다. 그의 남편이 된 그레이는 호감형 인물로 이사벨과 딸에게 더없이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빠다. 미국 경제 대공황으로 빈털터리가 되지만 엘리엇으로부터 이사벨이 물려받은 유산과 래리의 두통 치료 덕분에 재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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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은 소피로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과부가 된다. 파리의 어느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충격적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때는 문학소녀였고 시를 사랑했는데 정신적인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곁에 없어서 였을까? 반면 수잔 루비에는 마땅한 직업도 집도 없이 화가들이 사는 집에 얹혀살며 작품 모델이 되어주거나 집안을 도우며 전전하고 다닌다. 사실 누가 보기에도 별 볼 일 없는 일이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세우며 끝맺음도 깔끔하다. 작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끝까지 책임지며 나중에는 자신을 인정한 사람과 결혼도 하고 정식 화가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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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주인공인 래리가 아닐까 싶다. 미국 시카고에서 프랑스 파리로 거쳐 옮기면서 한동안은 도서관 등을 다니며 책을 읽기만 한다. 그러다 프랑스 북부 탄광에서 일하고 거기서 알게 된 동료와 독일로 가서 농장 일을 돕고 나중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인도 등 십여 년간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고 긴 방랑 여행을 다닌다. 20대를 그렇게 보내고 30대 초반에 파리에서 이사벨, 그레이, 작가와 조우한다. 언어 배우는데 소질이 있었던 래리는 독일어도 금방 익히고 인도에 가서도 그들의 언어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나 큰 깨달음은 없지만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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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될지 모르고 평범하게 살아왔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될지 미래를 다녀온 것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다. 그저 남의 얘기로만 알던 그 일의 당사자가 내가 될 수 있고 앞 일을 쉽게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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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작품, <인간의 굴레에서>, <달의 6펜스>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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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고전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고 작품에 빠져드는 순간 헤어 나올 수 없는 소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워낙 스토리텔링이 뛰어나서 지루하다는 느낌도 없이 재미있다. 등장인물마다 애정이 가고 인위적이지도 않다. 마치 그 당시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예스럽지 않고 현대적이다.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고전인데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고 한 번쯤은 이들이 선택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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