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겨우 20대 초반이던 가장 친한 친구가 한순간에 죽는 모습을 지켜본 래리에겐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눈부신 경제 발전도 희망찬 미래도 중요하지 않게 본 것이다. 돈에 관심도 없고 취직해서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단지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걸까? 이 책엔 약혼녀이자 매력적인 여성인 이사벨과 잘나가는 증권회사를 물려받은 그레이, 이사벨의 삼촌이자 사교계의 신사인 엘리엇, 이사벨의 어머니이자 엘리엇의 여동생인 브래들리 부인, 남다른 감수성으로 시를 좋아했던 소피, 화가들의 뮤즈로 활동하다 전업 화가가 된 수잔 등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저자도 소설 속 작가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현실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완독하고 난 뒤에 보니 정신없이 읽었던 그 시간 동안 소설 속 이야기에 푹 빠져서 다음이 궁금했던 것도 오랜만이다. 다들 각자의 인생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느꼈다. 이사벨은 평균적인 생각을 가진 보통 여자로 대화가 즐겁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래리와 결혼하기엔 지금까지 누려왔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어 약혼을 거절한다. 이후 그레이와 결혼해 딸 둘을 낳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상류층 사회 속에 살아간다. 그의 남편이 된 그레이는 호감형 인물로 이사벨과 딸에게 더없이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빠다. 미국 경제 대공황으로 빈털터리가 되지만 엘리엇으로부터 이사벨이 물려받은 유산과 래리의 두통 치료 덕분에 재기에 성공한다.
여기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은 소피로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과부가 된다. 파리의 어느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충격적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때는 문학소녀였고 시를 사랑했는데 정신적인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곁에 없어서 였을까? 반면 수잔 루비에는 마땅한 직업도 집도 없이 화가들이 사는 집에 얹혀살며 작품 모델이 되어주거나 집안을 도우며 전전하고 다닌다. 사실 누가 보기에도 별 볼 일 없는 일이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세우며 끝맺음도 깔끔하다. 작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끝까지 책임지며 나중에는 자신을 인정한 사람과 결혼도 하고 정식 화가로 활동한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주인공인 래리가 아닐까 싶다. 미국 시카고에서 프랑스 파리로 거쳐 옮기면서 한동안은 도서관 등을 다니며 책을 읽기만 한다. 그러다 프랑스 북부 탄광에서 일하고 거기서 알게 된 동료와 독일로 가서 농장 일을 돕고 나중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인도 등 십여 년간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고 긴 방랑 여행을 다닌다. 20대를 그렇게 보내고 30대 초반에 파리에서 이사벨, 그레이, 작가와 조우한다. 언어 배우는데 소질이 있었던 래리는 독일어도 금방 익히고 인도에 가서도 그들의 언어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나 큰 깨달음은 없지만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가 아닌가 싶다.
다들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될지 모르고 평범하게 살아왔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될지 미래를 다녀온 것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다. 그저 남의 얘기로만 알던 그 일의 당사자가 내가 될 수 있고 앞 일을 쉽게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비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작품, <인간의 굴레에서>, <달의 6펜스>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 중 하나"
이런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고전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고 작품에 빠져드는 순간 헤어 나올 수 없는 소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워낙 스토리텔링이 뛰어나서 지루하다는 느낌도 없이 재미있다. 등장인물마다 애정이 가고 인위적이지도 않다. 마치 그 당시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예스럽지 않고 현대적이다.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고전인데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고 한 번쯤은 이들이 선택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