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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고 완벽하게 필자의 팬이 되었다.
필자에게 주로 팬레터를 보내는 세 부류 - 군인과 수인과 아줌마 - 중 세번째 그룹이니
그 많은 3호 그룹의 편지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섞이고 말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좋은 글 감사하다는 편지 한통을 꼭 띄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글이었다.
좋은 글 덕분에 텁텁한 마음이 맑아졌다는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은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 주저리주저리 긴 수다를 풀어놓아도 사람좋은 웃음을 띤 얼굴로 읽어줄 것 같은
편안함에 마음이 더 끌렸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인사를 받아줄 분도, 사람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긴 수다를 참아내 줄 분도 없지만
투정을 하는 듯, 한탄을 하는 듯 친구같고 언니같은 필자의 따스한 글이 있어 위안이 된다.
이 책은 그림작가 선정에서부터 제목, 책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필자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월간 <샘터>에 연재되었던 칼럼 중 골라낸 원고를 필자가 투병 중에 입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짬짬이 손을 보고, 마지막 교정지는 입원 중에 검토했다 한다. 하지만 책의 인쇄가 끝났을때 이미 의식을 잃어 완성된 책을 보지 못한 채 세상과 이별해야 했다고.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필자가 미국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지내면서 겪은 여러 일들, 힘겨운 투병을 이겨내고 겨우 돌아온 일상에서의 기쁨들을 기록한 책이다.
필자의 단골주인공인 제자들의 등장은 여전하지만, 이번 책에선 유난히 안타깝고 가여운 제자들이 많다. 운명의 장난 같은 사랑 앞에 선 제자에게, 자꾸만 불행해지는 제자에게, 마음이 깜깜한데도 빛이 되어주지 못한 제자에게 그리고 삶이 힘겨운 독자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을 되새겨본다.
필자께서는 당신 자루의 흰돌은 다 꺼내고 떠나셨는지 묻고 싶기도 하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저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있다는 구나. 검은 돌은 불운, 흰 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란다. 아마 너는 네 운명자루에서 검은 돌을 몇개 먼저 꺼낸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남보다 더 큰 네 몫의 행복이 분명히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행 혹은 문학처럼 테마가 선명한 에세이는 참 반갑고 부담스럽지 않으나 일상의 기록이라던가
필자의 감정이나 느낌만이 실린 에세이는 부담스럽다. 글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필자의 가치관에 공감하지 않으면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 마냥 내내 껄끄러운, 마음의 무게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필자의 가치관과 사소한 습관까지도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 참으로 편했다. 불만이라면,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습관, 특히 약속시간에 자주 늦는다던가 미리 미리 해두는 일없이 당장 닥쳐야 한다는 습관은 아예 똑!같은데 사회적, 학문적 위치는 실로 천양지차이니 뭔가 아직 감추고 공개하지 않은 일급 시크릿이 있음이 분명하다. ^^
상갓집에 가면 보통 육개장, 송편, 전 등 자금자금한 음식들이 나오고 상추쌈이나 갈비찜 같은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상갓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련을 남긴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이제는 아무리 하찮은 음식일지라도 먹을 수 없는 망자 앞에서 보란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어적어적 먹는 것은 무언의 횡포라는 것이다.
망자 앞에서 입을 쩍쩍 벌리며 상추쌈을 먹는 일은 예의에 어긋나는 무언의 횡포라지만
그의 글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웃음을 터뜨리는 일, 조용히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일은 무언의 찬사라는 걸 알고 계시리라.
영작문을 가르칠 때 나는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E.B.화이트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해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 즉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론이나 일반론은 설득력이 없고, 각 개인이 삶에서 겪는 드라마나 애환에 대해 쓸 때에만 독자들의 감동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가 있어 온도를 재어본다면, 필자의 글은 언제나 36.5도 우리 체온과 같을 것이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딱 우리 몸의 온도만큼의 온기로 독자의 가슴을 데워준다.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것'이라던 필자의 다짐을 읽으며 궁금증 하나가 스르륵 풀리는 소리를 듣는다.
비슷한 습관을 가진 나와는 완연히 다른 그의 빛나는 존재감의 이유는 바로 저 큰 걸음이라는 것을. 저벅저벅 당당한 큰 걸음이 일급 시크릿임을 뒤늦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