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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착각 - 허수경 유고 산문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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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쓰는 시들,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시'에 빗금이 그어져 '글'로 고쳐진 제목의 보랏빛 책을 통해 그를 알게됐다. '아...' 읽으면서 '아... ' 이렇게 바보 도트는 소리를 내면서 여러번 멈춰가며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아름답다가 서늘하다가 또 뜨겁기도했다. 그 전까지 나는 허수경 시인을 잘 몰랐다. 그가 가고나서야 그의 존재를, 그의 시를 알게됐다.

그런 그를 기억하는 또 한권의 책이 나왔다. <오늘의 착각>. 까끌하고 단단한 귤색 표지에 이파리같은 초록 띠지가 감겨 잘 익은 열매 같은 책. 이 책도 말해뭐해. 늦게 빠진 팬심도 섭섭하지 않게 채워주는 사유와 또 내가 몰랐던 시들이 많아서 여러번 울컥이게 했다. '착각'이라는 말이 이렇게 시적이었나. '착각' 하면 '하지마'라는 말이 쉽게 붙어 떠올랐는데, 이 글들을 읽고 나서는 할 수 있다면 좀 더 많은 착각의 순간을 모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해변에 선 인간은 유한했고 바다는 끝을 알 수 없어서 모호했다. 그 앞에 서서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보는 단순한 사유조차 거부하는 막막한 자연이 바다였다. (중략) 바다 곁에서 받는 위로는 우리가 자연에 가까이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p.21) 바다에서 내가 느꼈던 막연한 위로의 뿌리를 알려주는 듯한 이 생각들이 기억에 남는다. 사유와 시가 범벅인 표현들을 잘 주워먹고 꼭꼭 씹어 소화하고 싶어서 밑줄을 꽤 여러군데 치면서 읽었다.

허수경 시인과 나의 만남은 시작부터가 끝이 나있어서 그런지 더 애틋하고 귀하다. 처음엔 왜 그 전엔 몰랐을까 아쉽기만 했는데 지금은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다음에 나올 그에 관한 책들이 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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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홀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김진송 지음 / 난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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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모르게 나무 위에 오르는 사람, 나무를 베어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할 공간을 만드는 사람, 숲을 오르는 사람.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에 천착하는 사람 등 각각 이야기 속 인물들은 어떻게든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목수가 쓴 소설이라 그런가. 선입견일지 모르는 생각을 하면서 자꾸만 그의 직업과 소설을 연결지어 읽어갔다. 그가 나무를 보는 시선을 배우려는 듯이.

수록작 '달팽이를 사랑한 남자' 나 '종이 아이'는 생각지도 못하게 관능적이어서 놀랐는데, 나무와 종이의 감촉 묘사가 생생해서 기억에 남는다. 서사와는 상관없이 인상적이었던 숲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무들은 수많은 곁가지를 만든다. 실상 쓸모가 없어 떨어뜨릴 가지를 열심히 만드는 이유는 나중에 어떤 가지가 햇빛을 받는 데 요긴하게 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필요 없다고 판명이 난 곁가지들은 나뭇잎처럼 때가 되면 떨어지고 만다."(p.57, 달팽이를 사랑한 남자)

시간을 거스르고, 짝수를 잃은 세상에서 혼란스러워하고, 고분을 파헤치고... 과학 소설 같기도 한 이 소설을 뭐라 정의내려야할지 모르겠다. 다만 폭력과 문명의 이기에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이야기가 모여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덧. 책이 참 탄탄하게 만들어졌는데 특히 책등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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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임 - 오은 산문집
오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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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는 걸 좋아한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일을 겪은 이의 얘기를 듣는 것도 좋고, 그 경험 속에서 그가 깨달은 걸 전해 받는 것도 좋다. 앞의 좋음은 낯선 경험을 마주하는 재미이고, 뒤의 좋음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누군가의 지혜를 간편하게 섭취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경험과 깨달음. 쓰고보니 이게 내가 수필을 즐겨 읽는 이유인가보다.

에세이를 읽을 땐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공감하거나 그때의 깨달음이나 느낌에 '나도 이런 적 있어'하고 내 경험을 떠올리며 밑줄을 친다. 이때 재밌는 순간은 다른 경험에서 비슷한 걸 느꼈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만날 때다. 이를테면 숨을 쉬는 것, 호흡에 대해서 '들이쉬고 내쉬는 순간과 과정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감내할 힘이 생긴다'는 느낌을 난 요가를 하면서 배웠지만 다른 사람은 도수치료를 받으며 느꼈다는 것. 이런 걸 알게되는 순간이 반갑다. 다른 경험 속 비슷한 깨달음을 만나면 그때의 내 느낌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좀 더 공인받는 것만 같고, 내 생각이 좀 더 믿음직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늘 숨을 쉬지만 숨쉬는 데 집중하는 시간을 얼마 되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호흡하지만, 나도 모르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잊고 사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호흡이 절실한 때는, 호흡이 빛을 발하는 때는 어떤 고비를 맞이했을 때다."(p.158) 오은 시인은 숨통이 트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도수치료를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지만 이 문장을 읽으면서 그때 그가 느꼈을 느낌과 들었던 생각이 어떤 모양이었을지 알것 같았다.

오은 시인의 산문집 <다독임>을 읽었다. 시인의 일기를 모아둔 것 같은 이 책에는 단어에 대한 고민부터 어떻게 살것인가 삶의 태도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있다. 신문 칼럼에서 보던 그 다정한 태도가 바탕이 된 글들이 다수였지만, 그 안에서 무례한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화를 뱉어낸 에피소드 같이 솔직해서 읽기 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시인의 모습도 만날 수 있어서 더 귀여운 책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들이 투명하게 비치는 솔직한 글들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일을 유심히 보고 그걸 자기 답게 풀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의 단상을 씹어 읽었더니 나도 일상을 한입 한입 잘 곱씹어 남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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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모자람을 알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게 만드는 책!” 띠지에 박혀있던 이 한 줄은 정말 이 책을 꿰뚫는 한 문장이었다. 오래 공부한 인문학자의 산문집이라고 해서 사유의 깊이가 깊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머리말에 ‘자본론’의 확대재생산 표식이 나오고, 그에 대해 로자가 감가상각의 보충은 가능하지만 축적은 불가능하다고 해석했다는 소개와 설명이 나온다. 이 한 줄을 알아먹고 싶어서 머리말을 읽는 데만 해도 꽤 오래걸렸다. 이렇게 책을 읽은 적이 얼마만인지. 오랜만에 아랫배로 읽은 책이었다.

머리말을 낑낑 대며 읽어내고 그 다음에 마주한 꼭지는 ‘독서의 가치’. 따끔한데 기분이 상하지않는 죽비를 맞는 것 같았다.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닌 어떻게 독서를 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얻어낸 지혜를 풀어내고 있었다. “책을 이해하는 능력은 자기에게 필요한 책을 선택하는 능력 또는 맥락을 구성하는 능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중략) 의미는 책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들이 다른 책들과 맺는 무수한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p.30) 측면의 독서, 맥락의 독서. 쓰고 나니 이게 특별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책 밖에 책이 있다’로 정리되는 이 화두는 내게 쿵하고 내려앉았다. 비로소 내 독서습관을 되돌아봤다. 왜 책을 읽는가 고민해봤다. 부끄럽지만 책을 읽으면서 책을 왜 읽는지 고민을 한 적은 사실 별로 없었는데, 따끔했다. 무한한 맥락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를 겸손으로 꼽는 태도의 씨앗을 내게도 옮겨 심고 싶어졌다.

<타인의 자유>는 (사전)투표를 하러 가기 전, 그리고 투표를 마치고 나서 읽은 책이었는데, ‘문제는 계산이다’ 이 챕터는 이 시기에 읽어서 더 크게 와닿았다. 기본소득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는데, 신화가 된 복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 기본소득제 논쟁에서 중요하지만 정작 잘 다뤄지지 않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기본소득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넘어서 “이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말은 ‘먹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소득은 헌법상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p.129)는 말이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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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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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밑줄을 긋다가는 온 데다 다 밑줄을 치겠구나 싶었다. ‘해사하다’ 같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뜻을 정확히 대라면 말문이 막혀버리는 단어들을 자주 만났다. 그 뜻을 찾아 손으로 옮겨 적는 순간이 많았다. 문득 낯설게 느껴지게 하는 것 그래서 더 정확하게 알고 싶게 하는 것. <소란>을 읽는 동안 <소란>이 내게 준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장은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중략)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p.101) 이거다. 편애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당당함이며 그늘마저 화사하다고 바라보는 시선이며 느낌표를 신나게 때려주는 저 문장을 읽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4월. 다가올 사월엔 내가 사랑하는 연초록의 이파리들만큼이나 화사한 그늘을 바라봐야겠다. 그렇게 봄을 담뿍 즐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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