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톨스토이에 생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28년 : 8월 28일, 러시아 야스냐야 폴리야나에서 태어났다. 유서깊은 백작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자랐다.

 

1844년 : 열여섯 살 때 카잔 대학에 입학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그 해 가을에 다시 도전하여 동양어 학부에 합격했다.

 

1847년 : 과를 법학부로 바꾸어 다녔지만 대학 교육에 실망하고 자퇴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지주로서 영지의 농민 생활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1851년 : 도시 생활의 향락에 빠져 무절제한 생활을 하던 중 형을 따라 카프카스로 가서 1852년에 군인이 되어 실전에 참전했다. 이 때 군대에 있으면서 <유년 시절>,<동사대인>등을 집필했다.

 

1855년 : 크림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대량 학살 등 전쟁의 부정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세바스토폴 이야기> 등의 작품을 썼다. 1856년에 제대를 하고 고향인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왔다.

 

1859년 : 농촌의 문맹자와 어린 아이들을 위해 농민 학교를 세웠으며, 1860년에는 선진교육을 배우기 위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1863년 : 세계적인 명작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 이후로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허무 등 정신적 동요로 과학이나 예술,그리고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종교 쪽으로 기울었다.

 

1880년 : <교회 신학 비판>과 1882년<참회록>,<교회와 국가> 등 사상적인 글을 썼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타락한 크리스트 교를 배제하고 금주, 금연,채식과 근로를 표방하고 가난한 생활을 주장했다.

 

1885년 : 사회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사유 재산을 부정하여 부인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886년엔 <이반 일리치의 죽음>,희곡<어둠의 힘>등을 집필했다.

 

1899년 : 그리스 정교를 비판한 <부활을>집필했으나, 이 작품으로 인하여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하였다.

 

1910년 : 10월 28일, 가정 불화로 의사 듀산과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함께 가출했다가 11월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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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2013-04-15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이좋으시네여
학교숙제로쓸게여^^
좋은자료감사합니다

아리엘 2014-05-1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학교숙제가 톨스토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영어로 essay 써오는거였는데
덕분에 자세히 쓸수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아인슈타인의 생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79년 : 독일 남부 울름의 유태인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생후 1년이 채 못 되어 뮌헨으로 이사했다.

 

1889년 :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유년 시절에 부모가 걱정할 정도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늦었다.

 

1895년 : 김나지움을 중퇴했다.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 대학 폴리테크니쿰에 입학 시험을 쳤으나 실패하고 이듬해에야 합격했다.

 

1900년 : 대학을 졸업하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임시 교사와 가정 교사일을 했다. 이듬해에는 스위스 시민권을 획득하고, 1902년이 되어 베른의 스위스 특허국을 취직했다.

 

1905년 : <광양자설>과<브라운 운동>,<특수 상대적 이론>등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11년 : 프라하의 독일 대학 교수가 되었고, 1912년에는 모교인 스위스 국립 대학 폴리테크니쿰의 교수가 되었다.

 

1914년 :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인에 대한 선언>이라는 것에 서명을 함으로써 반전과 평화주의의 입장을 표명했다.

 

1919년 : 밀레바와 이혼하고 사촌 동생 엘자와 재혼을 했다.

 

1922년 :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22년에는 양자 역학에 관해 보어와 논쟁을 벌였다.

 

1933년 :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자 명예 시민권이 박탈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이 무렵 미국 프린스턴 연구소에 초빙되었다.

 

1939년 :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 제조를 연구하라고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1955년 : 동맥에 생긴 혹이 파열되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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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 2012-05-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롱

뿌잉뿌잉 2012-09-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땡큐~!
 

안녕하세요 오늘은 맥아더의 생애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80년 : 1월 26일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태어났다.

 

1899년 :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육군 사관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되어 필리핀으로 부임했다. 이 무렵 아버지와 함께 극동 지역을 돌며 정세를 살폈다.

 

1918년 :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모장에 임명되어 무지개 사단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사단장이 되었디. 그 후 독일 라인 지방의 점령군 사령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에는 웨스트포인트 육군 사관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25년 : 나이 마흔다섯 살에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1930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미 육군 참모 총장이 되었다. 대장 승진 때에는 미 육군의 최연소 승진 기록을 세웠다.

 

1935년 : 필리핀 정부의 최고 군사 고문이 되어 필리핀 국민군의 창설을 도왔다. 그러나 2년 뒤인1937년에 미 육군에서 물러났다.

 

1941년 : 제 2 차 세계 대전 중 육군에 복귀하여 극동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퇴각하였다. 그러나 1944년 원수로 진급하고 필리핀으로 탈환되었다.

 

1945년 :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일본을 방문했을때 미주리 군함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를 받아 냈다. 이후 일본의 경제 문화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다.

 

1950년 :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총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해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전세를 역전하였다.

 

1951년 : 4월, 중국군 개입으로 중공과의 전면 전쟁을 주장하다가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의 의견 차이로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1964년 : 여든네 살로 세상을 떠났다. 인천 자유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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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본실의 청개구리 한국남북문학100선 5
염상섭 지음 / 일신서적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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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금은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고 줄거리와 나의 생각과 느낌을 써보겠습니다.

 

배경 중 시간 : (1920년대 3.1운동 직후)

 

배경 중 공간 : (서울-평양-남포-평양)

 

줄거리 : 이름 모를 우울증에 시달리며, 그 때 마다 생물 시간의 청개구리를 해부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먼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여행 중에 남포에서 김창억이라는 광인을 만난다. 김창억은 어릴 때 광인인데도 불구하고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지만 갑작스럽게 어머니,아내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잡혀 간다. 그는 원두막 같은 집을 지어놓고 서양석 삼층집이라고 하며 거기서 살고 있다가 '동서친목회 본부'라는 간판을 달았었다. 그리고 세계평화를 달았다. 그 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후 나는 원두막을 불태우고 난뒤 어디론가 갔다.

 

 

 

내 생각은 나가 중학교 때 생물 시간의 청개구리를 해부를 하는 것을 떠올리곤 했던 때가 우울증이 걸렸을 때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그 사람이 너무 우울증이 많이 시달린것 같았다. 그리고 김창억씨는 어릴 때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광인인데도 그런 소리를 듣니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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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뷔앞영원하라♥ 2012-03-18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줄거리 잘쓰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오늘은 허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46년 : 경기도 김포에서 양반허론의 서자로 태어났다. 스무 살쯤 되어 결혼을 하고, 신분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경상도 산청으로 가서 명의유의태의 제자로 들어가 의학과 의술을 연마하였다.

 

1574년 : 의과 시험에 합격하여, 내의원 의관으로 근무하였다. 어린 왕자의 중한 병을 고쳐, 대궐 안에서 명의로 이름이 났다. 이후 선조 임금과 왕실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며 임금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1581년 : 중국의 의학서 <찬도맥결>을 알기 쉽게 다시 고쳐 쓴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책을 펴냈다.

 

1592년 :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피난할 때, 어의로서 임금을 호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임금의 건강을 돌보고, 병이 난 신하들을 치료하였다.

 

1596년 : 선조 임금의 명을 받고, 내의원 의관들과 함께 새로운 의학서 <의방신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신하들과 다른 의관들이 모두 피난을 떠난 뒤, 혼자 대궐에 남아 선조임금을 돌보며 <의방신서>의 편찬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1598년 : 선조 임금의 명으로 새로운 의학서 편찬을 혼자 맡아, 이후 1610년까지 연구와 집필 생활을 계속하였다.

 

1606년 : 선조 임금으로부터 '양평군'의 작위와 '승록대부'의 벼슬을 받았으나, 천한 출신이라 하여 신하들의 반대로 '승록대부'의 벼슬은 취소하였다.

 

1607년 : 저술 활동에 힘써 <언해구급방>을 완성하였다. 1608년에는 <언해두창집요>와<언해태산집요>를 지었다.

 

1609년 : 선조 임금이 승하하자, 어의로서 그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갔다. 유배지에서 의학서의 집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610년 귀양에서 풀려나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1613년 : 2월, <신찬벽온방>을 짓고, 그 해 12월에는 <벽역신방>을 지었다.

 

1615년 : 일흔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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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퍼가요 2012-01-13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료 잘쓰겠습니다^^

별로네 2012-06-1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ㅉㅉ

별로네 2012-06-1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ㅉㅉ

사탕 2012-08-26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열심히하세요.

케뷜 2014-02-0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loirrhrhh 2014-04-1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rghegwgwg

rhak 2014-04-18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asefasdfawefawfwef

뭐임 2015-04-0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쓰레기

2015-04-0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15-04-0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하 2020-11-04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움 많이 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