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 서당 7 - 조선시대 정조편 맹꽁이 서당 7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맹꽁이서당7을 읽고 문체반정과 이주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도데체 문체반정과 이주국은 무엇일까? 알아봅시다 

문체반정 : 조선 시대 정조가 나라를 다스릴 무렵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 등의 문장이 크게 유명했습니다. 정조는 이러한 문체를 잡문체라 칭하며 금하고 정통적인 문장을 모범으로 삼게 했습니다. 이러한 무체의 유행을 막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패관소설, 잡서 등 청나라의 책을 수입금지시켰습니다. 또한 주자의 시와 등 중국의 고전을 간행하고 장려했습니다. 이 일로 왕권과 조정이 문학과 문인들의 창작에 적극 간섭하여 왕성하던 문학 활동이 수그러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하! 나는 문체반정의 문 자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쓰니까 막상 기억이 난다. 그래서 정조는 이러한 문체를 잡문체라 칭하며 금하고 정통적인 문장을 모범으로 삼게 하고, 또 이러한 문체의 유행을 막기 위해서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패관소설, 잡서, 등 청나라이 책을 수입을 금지시켰다니!!!!! 암튼 다음은 이주국이라는 사람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주국(李柱國)에 대하여


1720년(숙종 46)∼1798년(정조 2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언(君彦), 호는 오백(梧栢). 정종의 서자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적(滴)이며, 어머니는 증찬성 구상정(具尙禎)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무과에 급제, 이듬해 선전관에 임명된 뒤 훈련원주부·판관 등을 지냈다.

1748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온 뒤 호조좌랑에 임명되니 이때 처음 호조에 무랑(武郞)이 설치되었다.

1754년 충청도수군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1759년 함경북도절도사가 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장례 때 여사대장(輿士大將)을 역임하고, 1773년 황해도·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남당(南塘)에 성을 쌓는데 모두가 흙으로 쌓자고 하였으나, 남당은 땅이 습지보다 낮으므로 돌로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76년 총융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영조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훈련원도정으로 여사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사군이 소란을 피워 기율을 바로잡지 못한 죄로 파직되고, 다시 총융사에 보직되었으나 군량미를 비축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곧 복직되어 1778년(정조 2)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780년에는 어영대장을 거쳐, 이듬해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782년 북한평창(北漢平倉)의 군량미보관 소홀로 총융사에서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96년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 군제삼사(軍制三事)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첫째 번상(番上)으로 인한 경비의 낭비와 폐단을 고려하여 어영청·금위영의 군자(軍資)로써 경사지민(京師之民)을 모병하여 충원할 것, 둘째 궁궐순찰을 위하여 50칸에 1군포(軍鋪), 1군포에 군 4인을 두어 수직(守直)할 것, 셋째 수군·육군의 지역배치를 고려할 것 등이다.

용모는 건장하고 뛰어났으며, 성품은 강직하여 권세 있고 부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아서 명망이 있었으나 남과 반목한 때가 많았고, 여러 번 문신의 횡포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이 실세한 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성도·궁성 호위의 임무가 주어졌다.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할 때의 모습이 추운 겨울철에도 잎이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 같다고 하여 정조가 오백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였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책을 읽고 꼼꼼히 알아내어서 기쁘다. 그리고 이 맹꽁이 서당이 꽤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도 나는 책을 더욱 더 많이 읽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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