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조선 왕조실록 4 - 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
아침나라 편집부 엮음 / 아침나라(둥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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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선을 다스리던 최고의 정치 기구는 의정부였습니다. 의정부는 왕 바로 아래의 기관으로 모든 관리들을 통솔하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6조가 있어 나라의 갖가지 행정을 살폈습니다.  

각각의 육조가 하는 일을 살펴보면 먼저 이조는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였습니다. 병조는 군사 업무와 같은 국방을 책임졌으며 공조는 오늘날의 건설 교통부와 비슷한 기관으로 토목과 건설 에 관한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형조는 형벌에 관한 일을 하였습니다. 의정부와 6조 외에도 정치를 바르게 하기 위한 기관인 삼사가 있었습니다.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불의나 부정이 일어나면 왕에게 간쟁을 하는 사간원,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사헌부, 학문을 연구하며 정치에 학문적인 조언을 하는 홍문광이 삼사에 해당합니다. 

또한 왕의 명령을 전달받고 전달하는 기관인 승정원, 실록과 같은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왕의 명령을 받고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 등이 있엇습니다. 

나는 나중에 의금부 같은 경찰을 하........고 싶지만 내 꿈은 가수이다. ㅋㅋ 그럼 다음으로 고고씽!! 

조선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청계천은 한양의 중심 하천이 되었습니다. 당시 청계천은 아낙네들에게는 좋은 빨래터였고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놀이터였습니다. 

동시에 청계천은 한양의 하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청계천은 조선 시대 내내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청계천 주변에 살고 있는 이들이 더러운 물이나 물건들을 마구 버려 더럽고 냄새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물이 넘쳐 주면 마을들을 덮치기 일쑤였습니다. 최초로 청계천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왕은 태종입니다. 

천계천을 메워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태종은 두 차례에 걸쳐 청계천 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5만여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청계천의 바닥을 파고 주변에 언덕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청계천의 오염과 홍수는 쉽게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세종 때에는 청계천에 대한 대책이 두 가지로 나뉘졌습니다.  

당시 영의정이있던 황희는 백성들에게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을 버지리 못하게 해 청계천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집현전의 교리였던 어효첨은 도읍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청계천이 오염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청계천을 더욱 넒혀 더러운 것들을 머두 흘려보내야 서을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계천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책을 마련했던 왕은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는 대규모 청계천 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청계천 공사에 21만여 명을 동원하고 공사비만도 3만 5천 냥에 쌀 2천 3백 석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공사였습니다. 영조는 청계천을 깊고 넓게 판 다음 하천 옆에 돌로 높은 벽을 쌓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오염이 심하던 청계천이 깨끗하고 정리되고 한양의 주민들은 홍수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가난한 백성들이 공사장에서 일하여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 공사가 있으면 품삯도 주지 않고 백성들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서에서는 동원된 인원 중 6만여 명이 품삯을 받고 일을 했습니다. 

때문에 영조의 청계천 공사는 빈민구제의 목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순조와 고종 시대에도 청계천 공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이르러 청계천의 운명은 다시 바뀌였습니다. 청계천 주변으로 빈민층들이 모여들면서 오염이 심각해지자 일본은 간편하게 하천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지금은 청계천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한양의 중심 하천이었던 청계천을 우리도 곧 볼 수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온것같이 청계천은 영조님 때문에 청계천이 깨끗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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