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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모험 - 세상에서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하버드 경제 수업
미히르 데사이 지음, 김홍식 옮김 / 부키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세상에서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하버드 경제 수업 <<금융의 모험>> 미히르 데사이, 김홍식, 부키, 2018.8.20
하버드 경영대학원 금융학 교수인 동시에 법학대학원의 법학 교수인 저자 미히르 데사이(이하 데사이)는 직함에서 보여지듯 지식을 쫓는이고, 이로 인한 지식의 유희를 아는 사람이라 접근하기 어렵겠다는 선입견이 먼저 들 것이다. 이 책을 읽게된 것도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중 하나인 간접경험, 과연 세계 최고의 대학 하버드의 경영대학원 교수가 이야기 하는 금융과 경영, 경제에 대한 강의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강의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 강의를 청강함으로 내게 전염되는 경제, 경영, 금융관련 바이러스는 무엇일까 기대하면서 책을 읽었다.
사실 경제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다면 아마 좀 더 이해가 풍성해 질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지식이 있는 나로서도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다른 ‘결’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꽤나 큰 수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단순 표면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배경을 조금이나마 엿본다면 ‘뭐지?’하는 반응에서 ‘아하!’하는 반응으로 전이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학자의 식견은 대단하다. 통섭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 통섭이 아닐까? 한국의 최재천 교수가 생각난다. 금융분야에 대한 논문과 이론에만 집중할 줄 미리 짐작했었는데 어설픈 선입견은 어줍잖은 지식과 배경을 가진 나를 한 번 되돌아보고 항로를 변경하게 만든다. 그만큼 여러분야, 그 중에서도 인문학은 물론이요, 세상의 현상을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것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그리고 그것을 금융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설명의 훌륭한 교보재로 재 해석하여 활용하는 다양성(?, 표현의 한계) 즉 폭넓은 지식의 마인드 맵 가지와 거미줄을 단편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쉽게말해 만화영화에서 지금도 읽혀지는 고전은 물론이요,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프리즘이 다양, 광범위하게 언급되어지고 있다.
식자들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지금이 덜하지만 초기에 너무 자신의 지식을 진열대에 진열하듯 나열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것은 다른 외부요인이 아니라 내 안의 내부적인 요인에 더 쉽게 기인함을 느꼈었다. 즉 나도 내 자녀가 되는 친구들에게 무언가를 물어왔을 때 설명을 해 주려면 나름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 친구가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설명해 주어야 하는 어찌보면 암묵적인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은퇴한 교수의 경우는 오죽했겠는가 하는 그리고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나의 부족과 무지로 결국 비교도 안되는 질투를 하고 있었음을 부끄럽지만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주위에 그러한 분도 있어 너무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지식의 폭은 어디까지일까? 혀를 내두른 경험이 있었다. 저자 또한 무척이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단, 사전지식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존재함을 확인했다. 비근한 예로 보험의 두 가지 문제,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 <심슨가족>과 <이중배상>을 예로 들어 설명해 놓은 부분(60~68)이 있는데 이해하기 위해 두어번 더 읽어봤지만 예로 사용되어진 두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음으로 좀 더 쉽게, 그리고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거기까지로 멈춰지는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물론 이야기 하고자 하는 부분은 나름 이해했다. 그러나 조금 더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1738년, 280년전 연금이 현재도 유효하여 1.2유로라는 금액이 현재도 계약자의 후손에게 지급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프랑스 정부가 무너져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지급이 중단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바흠의 일꾼은 삽을 들고 주인이 누울 무덤을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180센티미터에 딱 맞는 길이로 파서 그를 묻었다.”
과연 인간의 욕심의 한계! 욕망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눈쌀 찌프리게 만드는 모습이 아니라 일개 소시민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의 제목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톨스토이의 글에 수정을 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 기준에 나는 어디에도 내 흔적을 남겨놓고 싶지 않다. 최소한 악마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지금 나를 부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