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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김영숙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물도 나를 본다>의 주제로 시작하는 첫 장부터 시선을 끌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거닐다 쇼윈도나 차창에 비친 내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잦다. 나는 어둡게 윤곽을 드러내는 내 자신을 확인할 때마다 어쩐지 낯설고 어색한 동시에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는 더 나아가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나 ‘사물들’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온통 날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물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현재 바로 내 옆에 쌓여 있는 다양한 책들 또한 그러하며, 반듯하게 세워진 달력도 그러할 것이다. 문득 그런 시선을 느끼거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늘,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던 것이다. 또한 지하철이나 길거리를 지나다 주시하는 시선을 의식해 바라봤을 때 마주치는 낯선 시선 역시 그러하다. 주위에 모든 것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선 폴 세잔의 어긋난 원근법에 대한 그림을 이야기하고 싶다. 폴 세잔의 어긋난 원근법은 어긋났다는 말을 증명하듯 정확하게 어긋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진정 사랑하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이다. 사랑이 개입된 시선이야말로 그 상대의 진짜 모습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폴 세잔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세심한 시선으로 그 사물을 바라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바라본 그것을 그림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군갈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많은 것을 담아내려 악착같이 시선을 보낸다. 그렇게 사랑이 개입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상대의 진정성을 알아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평소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유명한 작품인 <도라 마르의 초상>처럼 고정 관념을 뒤엎는 작품들이 참 매력 있다. 늘 틀에 박힌 고정된 순간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상상력으로 꿈꾸게 한다. 늘 그의 작품은 호기심과 깨달음을 동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은 늘 새로운 장난감을 만지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던 것이다.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피카소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피카소처럼, 난 늘 틀에 박히지 않은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말했다. 그림이 사진과 같을 필요가 있느냐고.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은 사진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진의 매력이지, 그림의 매력은 아닌 것이다.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위에 무언가 색다른 상상력이 가미되었으면 싶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지겹도록 보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의 딸? 어떤 직장의 직원? 누군가의 친구?… 우리는 늘 그 무엇의 존재로 살아간다.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의 이름이 붙고, 그 존재의 이름은 어떤 존재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을 때. 있지 않은가? 존재의 틀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부여되기 보다는 태초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존재 말이다. 그것만큼 진정한 자유가 어디 또 있을까. 그래서 인지 저자가 말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에 큰 동질감을 느껴야 했다.
잭슨 폴록의 <번호 1>. 미치광이와도 같은 모습의 잭슨 폴록의 작업 사진. 그의 작품은 뒤엉킨 선의 아름다운 교차로 복잡 미묘한 색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구상성을 제거하고, 심리적 교감을 유도했다. 그런 그의 작품은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러한 작품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하고, 단순하게 치부될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이러한 작품을 바라볼 때면 흥분, 떨림, 고뇌, 슬픔 등 모든 감정이 들끓고 일어나게 된다. 즉 모든 감정을 다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정해진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감상하는 이 마음대로면 그만이다. 그대로 바라보고, 그대로 느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너무나 좋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작년에 성곡 미술관에서 관람한 장 미요트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그의 작품은 무의식의 발로이며, 내면의 몸짓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작품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으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때의 그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정말 이해 못 할 이 예술 사기꾼들의 행위나 결과물에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과감히 붙이고, 직접 갤러리를 찾아가는 발품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 유머러스하고 때론 가학적인 고백을 보면서, 우리네 삶 자체가 이미 사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알면서도 계속 속고, 계속 속다보면 또 다른 ‘앎’을 알아가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 수단이 똥이어도 소중하다. 부연하자면, 똥도 예술이다. 혹은 예술도 똥이다.”
추상회화는 뭘 그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인간에게는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그런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으로 가득 찬 추상회화가 좋다.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라는 작품도 참 좋은데, 이는 절망이나 고독과 같은 심정을 담고 있다. 보통 표현주의 화가들은 대상을 그리되, 차라리 심정을 그리는 일에 치중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심정을 그리는 일에 치중하다. 그것만큼 아름다운 미술 작업이 또 어디 있으랴. 그리고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작품이지만, 루초 폰타나의 <공간 개념, 기대>라는 작품도 신선했다. 캔버스에 일직선으로 나 있는 칼로 흠집 낸 작품은 침묵으로 일관되어 있는 여백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돋보였다. 텅 빈 마음과 복잡 미묘한 감정을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추상 표현주의에는 이렇게 감정의 다양성과 진정성이 함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정신 병동에서 사람 관찰하기를 좋아했던 프란시스코 고야와 장 루이 테오도르 제리코. 장 루이 테오도르 제리코의 <도박에 중독된 여인- ‘정신병자의 초상’ 연작 중>은 인간이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의 처절한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미 그 정신병자가 화가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색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미국의 여류 사진작가인 신디 셰먼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했다. 자신의 표정과 행동에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여성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거리를 거닐 때에도,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지하철에서 목적지가 다다르기를 기다리면서도. 늘 이 세상 속에 홀로 놓이는 공간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타인을 의식한다. 저자의 말처럼 마치 <트루먼 쇼>라는 영화처럼 삶 자체가 하나의 리얼리티쇼가 되는 상황인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트루먼 쇼>는 굉장히 신선했고 충격적이었다. 내 삶의 전부를 많은 이들이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는 상황! 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 일일까. 결국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의식에 지배되지는 말자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의 인생에 타인의 시선까지 부여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예술가는 ‘보편’보다 ‘개별’에 남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획일화 된 사회 속에 살지만, 그 안에 각자가 다 다른 존재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마지막 시도가 현대 예술가의 고뇌이자 의무인 셈이다.”
현대 미술은 저자의 말처럼 어렵기만 하다. 현대 미술은 정해진 틀 안에서 놀지 않는다. 그리고 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경과 환상을 깨부수려 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노력들로 인해 우리가 좀 더 예술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대학로를 지나거나 홍대 거리를 지나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예술과 마주친다. 이미 우리는 예술가들이 즐비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 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그것은 이미 우리들 또한 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거리를 지나거나 흔히 주위를 둘러보면 스스로를 자유롭게 내보이는 동시에, 다양한 행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다. 나는 그들 모두가 현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현대 미술, 예술. 그것이 뭐 별것인가. 함께 즐길 수 있고 끊임없이 사유할 수 있고, 꿈꾸게 할 수 있고,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다 예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