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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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타락이란 건 말이야, 산비탈에서 타이어를 굴리며 내려오는 것과 같더군. 처음에는 내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어느새 타이어 혼자 저만치 앞에서 구르고 있는 거야. 헉헉대며 쫓아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 그러다가 작은 돌부리라도 하나 만나면 텅,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진창에 처박히는 거지. -163쪽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179쪽 
 



처음 시작은 산장에 모인 여섯 명의 사람이었다. 이들 여섯 사람의 공통점이라고는, 모두 연쇄살인마에 대한 인터넷 동호회의 회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동호회의 주인이자,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아있는 ‘악마’의 초대를 받고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각종 희대의 살인마에서부터 살인을 위한 방법 및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것은 일종의 낯선 사람에게 행하는 자기위안과 불안함의 표식이었다. 그렇게 이들의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악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때부터 시작되는 꿈인지 허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사건들이 펼쳐진다. 분명 꿈을 꾼 것만 같은 기억 속 잔상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존재한 채 남아있었고, 이는 서로의 감정과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야 말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보호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위험에 처한 듯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못 서로가 서로에게 엉켜 들어가는 사건과 알 수 없는 진실 공방전이 흥미로웠다. 읽는 내내 나 역시 꿈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멍한 기분이 사로잡혀야 했다.  

 


<여섯 번째 꿈>, <복수의 공식> 등의 네 가지 작품은 자칫 각기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 하지만, 실제 상당한 유기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여섯 번째 꿈에서 나오는 여자아이가 복수의 공식에 나오는 여자아이가 맡은 역할이 되기도 하고, 복수의 공식에 나오는 이가 여섯 번째 꿈에서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읽는 내내 복잡 미묘한 글의 구조와 등장인물들, 각종 심리전으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더불어 그 공황상태에서조차 이 책의 매력에 빠져들어 다시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와서조차 무언가 그 느낌이 좋았던 것이다.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늘 그럴싸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가 없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리만치 ‘죽음’이라는 단어는 불안하고 버겁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 책은 총제적인 ‘죽음’에 대해 때론 익살스럽게, 때론 무미건조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표현해 내면서 사방을 뛰어다녔다. 때문에 종잡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무의식과 내면, 죽음, 살인 등 인간의 본연의 욕구에 대해 때론 담담하게 때론 열정적이게 쏟아 놓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몽환적이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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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한 조각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8
마리아투 카마라.수전 맥클리랜드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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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내전은 수많은 사람과 한창 순수하게 자라나야 할 어린 이들에게도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 주었다. ‘망고 한 조각’은 마리아트 카마라, 바로 그 시에라리온 내전의 한 가운데서 처절한 아픔을 겪었던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에서부터 고스란히 감당하고 인내해야 했을 아픔을 거쳐 용기, 의지와 정신력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버텨 낸 바로 그녀 자신의 믿을 수 없는 인생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과연 이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가슴이 아팠다. 더욱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삶이 멀게만 느껴졌고, 아프기만 했다. 또렷하게 정신이 있는 상태에서 비슷한 또래 반군들에게 팔을 잘리는 광경이란. 어찌 읽고도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그 상태로 살기 위해 숲 속을 헤쳐 나가는 어린 그녀의 의지는, 저절로 고개가 숙연해질 만큼 찡한 것이었다. 그 길 가운데에서 만난 남자에게서 얻은 망고 한 조각. 그리고 그에게 얻은 도움으로 병원으로 가는 길에 다다르고 치료를 받고 다시금 가족들과 재회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남자가 건네준 망고 한 조각은, 어쩌면 그녀에게는 다시금 살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곳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다시금 반군에게 붙잡힐 수도 있었고, 혹은 길을 잃고 지쳐 쓰러져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 한 순간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지만, 그 내전 속에서 그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 글을 비롯해 간혹 이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 때면, 늘 스스로에게 감사하게 되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하지만 이런 마음조차 가지는 것이 지나친 이기심이고 죄스러운 것은, 늘 이 상황에 직면하고 나서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점점 더 큰 곳을 바라게 되고 욕심 부리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한 끼의 식사도 구걸을 해 얻어먹고, 혹은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아파하고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 세상에 수없이 버려지는 음식들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시에라리온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난한 나라들은 더 이상 우리가 방관하고 지켜보기엔 그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나 역시 그런 방관자 중 하나였다. 이 ‘망고 한 조각’의 그녀와 함께 그녀의 인생을 되짚어 걸어오니, 지나온 내 시간의 흔적이 부끄러웠다. 왜 그토록 욕심만 부렸는지, 왜 그토록 의지박약에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쉽게 포기해 버렸는지. 늘 그녀의 인생을 떠올리며 조금은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닌, 그들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지나온 부끄러운 내 인생에 약간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 싶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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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걸 고스트 걸 1
토냐 헐리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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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 속에서 변화하고 사랑 속에서 변화한다

변화할 때, 우리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변한다. 완전히 변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감정에 맞춰 자신의 형태를 찾아간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맡겨두는 것이 이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만사에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다. 삶의 한 시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으로 변할 기회가 온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326쪽

  
 


학창시절, 누구나 주목받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사춘기를 겪으며 누군가를 좋아하는 순수한 사랑에 날듯이 기뻐하기도 하고, 마치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좌절하기도 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주인공 샬럿 역시 인기인을 꿈꾸던 존재감 없는 소녀였다. 흔히 ‘왕따’로 통할만큼 그들에게 샬럿은 그저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샬럿에게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것도 학교에서 킹카로 알려진 데이먼. 그녀는 데이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하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만다. 그러던 중 기막힌 타이밍으로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킬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샬럿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자그마한 불씨를 키운 듯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녀는 죽어서까지도 그를 포기하지 못한다. 수없이 그의 곁을 맴돌며 안타까운 마음을 키워나간다. 더불어 죽은 이들이 함께하는 유령학교에 들어가게 되지만, 거기에서 조차 적응을 해나가지 못한 채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러다 학교의 인기인이자 데이먼의 여자친구인 페튤라의 여동생인 스칼렛이 자신을 볼 수 있음을 깨닫고 빙의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어찌 보면 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고 바라게 되는 상황이다. 외적인 미가 중요시되고, 왕따인 그녀는 그 어디에도 낄 수가 없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 죽어서까지 인기인이 되고 싶어 했던 절박함. 자칫 진지하게 다가올 법한 죽음과 왕따 등의 문제를 코믹스러운 상황 전개와 간결한 문체를 통해 무겁지 않게 풀어나갔다는 점이 좋았다. 더불어 그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어 아주 유쾌했다. 하나같이 유령학교에 모인 유령들에게는 죽음에 얽힌 사연이 있었고, 그것은 곧 자신의 문제점이었다. 처음 샬럿은 죽음보다 살기를 간절하게 원했고, 무엇보다 데이먼과의 가을파티에 가길 진심으로 소망했다. 결국 그것을 이루기 위해 빙의까지 하게 되고, 다른 유령 친구들의 심기를 건드려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 또한 자신의 진실 된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겪게 되는 좌절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정한 것을 깨닫는 샬럿의 모습과 마지막 그들의 파티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빠르게 읽히는 글이며 동시에 무겁지 않은 글로 누구나 부담 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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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논평전 - Lennon Legend
신현준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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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창조하고 연주한 음악은 다기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과 부단히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존 레논의 삶에서 추출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의 소재들은, 상업적 스타덤으로부터 아방가르드 예술, 혁명적 좌파 정치를 거쳐 페미니즘적 일상생활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즉 특유의 자기고백적 메시지를 강렬한 비음으로 노래한 존 레논의 음악의 가치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대해 복수의 감정과 경쟁적 해석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는 것이다. -17쪽

 

요코와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청년들, 특히 미국의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냉담함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며 모든 게 다 끝나 버렸다고 생각하여 각성제와 헤로인에 젖어서 자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으며 아직 할 일이 많다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263쪽


 

비틀즈, 이미 이름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를 지닌 그들은 어렸을 적 내게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실 순전히 내가 그들을 아름답게 기억했던 것은 그들에 대한 존재 보다 그들의 음악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마음에 와 닿는 멜로디라 늘 흥얼거리던 기억이 난다. 특히 존 레논에 대해 관심이 갔고, 요코라는 여인과의 기묘한 만남 덕분에 더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막연하게 존 레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궁금증에 덥썩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은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총에 맞은 당시의 시대로 시작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복한 하루가 시작됐고, 옆엔 요코가 함께였다. 갑작스럽게 그렇게 총에 맞아 죽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 그의 유년기 시절의 슬픔과 아픔, 음악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비틀즈의 멤버이자 그의 파트너 매카트니와의 만남과 링고 스타, 해리슨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시간의 흐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인지, 꼭 그의 인생을 함께 걸어온 것 같다.

 

존 레논은 유난히 아픔이 많은 사람인 듯 하다. 부모님의 이혼, 학교의 공부에 대한 거부감, 이모의 손에 키워지면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 등 어려서부터 이미 그에겐 많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던 중 엄마와의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럽게 맞이한 엄마의 죽음까지. 어린 나이에 그는 견디기 힘든 많은 슬픔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지 그는 비틀즈의 멤버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때에도 늘 가슴 속에는 어둠을 간직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늘 그의 속에서는 울음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그의 아픔이 음악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진실된 감정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것만큼 진실 되며 와 닿는 음악이 어디 있을까. 그는 그렇게 가슴으로 음악을 한 것이다. 그 마음 속 모든 것을 음악으로 표현해 냈다. 어쩌면 그에게 음악은 그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그의 또 다른 영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존 레논을 순전히 천재 음악가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반대, 인종차별 및 평화운동에 상당히 주력한 인물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올바로 하기 위해 자신을 버려가며 희생한 것이다. 더욱이 요코와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그에겐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 동시에 평화운동에 힘쓸 동반자가 생긴 것이었다. 더더욱 그가 존경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는 평화를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사망한 지 30주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은 우리네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여전히 인기를 받고 있다. 그것만큼 놀라운 일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오래도록 사랑 받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존 레논이 남긴 우수한 음악들뿐만 아니라 부르짖었던 사랑과 평화에 대한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었다. 존 레논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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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편지 - 제2회 네오픽션상 수상작
유현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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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씩씩한 걸음을 보며 정진우는 희열을 느꼈다. 심장이 뛰고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설레었다. 시간은 우리 모두의 편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전진하라고 속삭인다.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의 길 앞에는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낯설다는 건 어쨌든, 즐거운 일이다.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뿐이다. -455쪽

 

나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사투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결론을 끌어내거나 그저 그런 희망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쓰는 동안 내 의도는 번번이 빗나가서, 엉뚱한 장면이 길어지고 분노나 사랑 따위의 단어들이 추가되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과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왜 죽였는가. 이 피비린내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게 세상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457쪽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기존 좋아하는 작가 분들의 작품이 아닌 이상, 표지도 눈여겨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꾸밈에 불가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 살핌과 제목에 집중한다. 이 작품 역시 ‘살인자의 편지’라는 다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제목만 보아도 추리소설과 스릴러라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사실 예전에만 해도 추리소설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너무 편협한 독서를 해왔더랬다. 그러던 중 몇 편의 추리소설을 접하면서 묘한 흥미를 느꼈다. 주로 일본 작가들의 추리소설을 접했던 것 같다. 일단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단 한 번도 내게서 흥미를 거둬가지 않았고, 시선을 빼앗기게 두지 않았다. 그 만큼 흥미진진했다. 나는 일단 추리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강하게 압도하고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함께 추리를 해 나가는 장치의 재미 역시 빠뜨릴 수 없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독자를 그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작품은 영흥시의 한 쇼핑센터 창고에서 남예진이라는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묘한 것은 단순한 자살로 치부하기에는 교수형 매듭으로 이루어진 장치였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단서로 보았을 때 살인이라 단정 짓고 수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다른 곳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교수형 매듭으로 이루어진 살인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단순해 보였던 사건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로 변경된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남예진의 사건을 수사하는 류머티즘 병을 앓고 있는 형사 정진우와 그 밖의 다른 몇 형사들, 살인자를 추리해 나가는 피해자심리전문요원 박은희, 범죄분석관 서영혜, 남예진의 어렸을 적 친했던 고등학교 대장 김경만, 기자 유제두 등 각양각층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보여준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하는 동시에 다양한 관점에서 추리를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양한 등장인물들로 자칫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뒤엉켜 난해하고 지루함을 줄법한데도 전혀 그렇지 않다. 외려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객관적이고도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놀라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 속에서도 말하고 있듯, 인간은 누구에게나 급소가 있다. 한 가지쯤은 아픔을 지니고 있고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슬픔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는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져 어떻게든 방출하고 싶은 욕구로 돌변하기도 한다. 충동적 살인이나 그 밖의 사건들 역시 이런 연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작품 속 연쇄살인과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행적에서 어쩌면 나는 그것들에 더 많은 신경을 쏟았던 것 같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아픔과 직면하고 맞서야 한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싶기도 했다. 그것이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내겐 어떤 급소가 있었던가. 물론, 없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작품 속 박은희처럼 그것을 꽁꽁 싸매고 굳건하게 벽을 쌓아 올리려 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졸한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싸하게 감춰두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쓸데없는 자만심이었는지도.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의 슬픔과 응어리를 토해내고 마주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마음속에 꽁꽁 쌓아 놓다가는 언젠가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어 폭발해버리고 말지도 모르니 말이다.
 


요 근래 읽은 작품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여러 연쇄살인사건들 속에서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를 쫓다보니 어느덧 작품은 중반부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의 후반부에 다다를 때쯤엔 나 역시 범인을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작품은 흥미를 잃지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쫓고 쫓기는 자 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담아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쫓고 쫓기는 자들을 느꼈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고 삶이었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마주보는 일이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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