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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편지 - 제2회 네오픽션상 수상작
유현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아이의 씩씩한 걸음을 보며 정진우는 희열을 느꼈다. 심장이 뛰고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설레었다. 시간은 우리 모두의 편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전진하라고 속삭인다.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의 길 앞에는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낯설다는 건 어쨌든, 즐거운 일이다.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뿐이다. -455쪽
나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사투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결론을 끌어내거나 그저 그런 희망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쓰는 동안 내 의도는 번번이 빗나가서, 엉뚱한 장면이 길어지고 분노나 사랑 따위의 단어들이 추가되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과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왜 죽였는가. 이 피비린내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게 세상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457쪽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기존 좋아하는 작가 분들의 작품이 아닌 이상, 표지도 눈여겨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꾸밈에 불가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 살핌과 제목에 집중한다. 이 작품 역시 ‘살인자의 편지’라는 다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제목만 보아도 추리소설과 스릴러라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사실 예전에만 해도 추리소설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너무 편협한 독서를 해왔더랬다. 그러던 중 몇 편의 추리소설을 접하면서 묘한 흥미를 느꼈다. 주로 일본 작가들의 추리소설을 접했던 것 같다. 일단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단 한 번도 내게서 흥미를 거둬가지 않았고, 시선을 빼앗기게 두지 않았다. 그 만큼 흥미진진했다. 나는 일단 추리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강하게 압도하고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함께 추리를 해 나가는 장치의 재미 역시 빠뜨릴 수 없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독자를 그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작품은 영흥시의 한 쇼핑센터 창고에서 남예진이라는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묘한 것은 단순한 자살로 치부하기에는 교수형 매듭으로 이루어진 장치였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단서로 보았을 때 살인이라 단정 짓고 수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다른 곳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교수형 매듭으로 이루어진 살인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단순해 보였던 사건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로 변경된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남예진의 사건을 수사하는 류머티즘 병을 앓고 있는 형사 정진우와 그 밖의 다른 몇 형사들, 살인자를 추리해 나가는 피해자심리전문요원 박은희, 범죄분석관 서영혜, 남예진의 어렸을 적 친했던 고등학교 대장 김경만, 기자 유제두 등 각양각층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보여준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하는 동시에 다양한 관점에서 추리를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양한 등장인물들로 자칫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뒤엉켜 난해하고 지루함을 줄법한데도 전혀 그렇지 않다. 외려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객관적이고도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놀라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 속에서도 말하고 있듯, 인간은 누구에게나 급소가 있다. 한 가지쯤은 아픔을 지니고 있고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슬픔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는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져 어떻게든 방출하고 싶은 욕구로 돌변하기도 한다. 충동적 살인이나 그 밖의 사건들 역시 이런 연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작품 속 연쇄살인과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행적에서 어쩌면 나는 그것들에 더 많은 신경을 쏟았던 것 같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아픔과 직면하고 맞서야 한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싶기도 했다. 그것이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내겐 어떤 급소가 있었던가. 물론, 없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작품 속 박은희처럼 그것을 꽁꽁 싸매고 굳건하게 벽을 쌓아 올리려 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졸한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싸하게 감춰두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쓸데없는 자만심이었는지도.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의 슬픔과 응어리를 토해내고 마주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마음속에 꽁꽁 쌓아 놓다가는 언젠가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어 폭발해버리고 말지도 모르니 말이다.
요 근래 읽은 작품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여러 연쇄살인사건들 속에서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를 쫓다보니 어느덧 작품은 중반부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의 후반부에 다다를 때쯤엔 나 역시 범인을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작품은 흥미를 잃지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쫓고 쫓기는 자 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담아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쫓고 쫓기는 자들을 느꼈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고 삶이었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마주보는 일이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