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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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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따질 것은 따지고 넘어가지요. 출판사 측의 주장은 분명히 오류가 있습니다.


   “1979년 을유문화사 판(민회식 옮김)으로 출간되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절판된 상태로, 현재 국내에 소개된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완역본은 이 책이 유일하다”라고 소개가 되어 있지만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완역본은 아닙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5서까지 있는 데 이번에 번역된 것은 1서와 2서 뿐이니까요. 물론 3-5서는 1,2서에 비해 재미도 덜한데다 특히 5서의 경우 위작 내지는 후인의 가필이 의심되는 사례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을 횡격막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나눠두고 ‘머리나 심장 같은 중요한 부분은 다 이쪽에 있으니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대충 이 정도로 불평은 마무리하도록 하지요. 왜냐하면 이런 ‘사소한 과장’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의 발간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의 인문학이 쇠퇴해 가고 있다는 주장은 여러 사람들이 누차 주장해 왔던 바이며, 그 해결책은 인문학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 또한 식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적 토대는 결국 다양한 서적을 통한 자양의 공급으로써 확보된다는 것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견 황당무계하고 교육적 요소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려운 듯한 (심지어 외설적인 요소도 있는) 이 책의 소개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는 법은 다양합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처럼 작가의 상상에 빠져들어 즐길 수도 있고, 위마니즘의 특질을 찾아보려는 접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술주정뱅이의 만담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당시의 지적 풍토의 일단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의견도 가능합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의 명성을 이루게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예전의 을유판을 가지고 계시지 않고, 라블레의 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시라면 주저없이 구입하셔도 좋을 책입니다. 


추기 1 : 1, 2서에는 각각 464개와 497개의 역주가 붙어 있습니다. 결코 적은 수의 주해는 아니지만 이 책에 포함된 지식의 방대함, 번역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라블레의 글쓰기 방식 등을 감안하면 주해를 조금 더 붙여주었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을유판에는 조금 더 자세한 주석이, 조금 더 많이 붙어있다는 사실도 유감스러움을 늘리고 있네요.


추기 2 : 원래는 을유사 판과 이 책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몇 개 놓고 비교해 보려고 하였으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생략합니다 (을유판에 있던 생트 뵈브의 글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날아갔습니다 -.-;). 혹시 절실히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능력껏 타이핑을 쳐보겠습니다만 가급적 그런 시련에 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추기 3 : 어차피 소소한 지적을 시작한 바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제1서의 6장 가르강튀아의 탄생에서 (67페이지) 횡경막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횡격막 (橫隔膜, diaphragm)의 오기입니다. 후에 재판을 찍게 되면 바로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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