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독서가"에서 "수집가"가 되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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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에서 나온 <김동인 전집>(전17권)을 모으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 전부터였는데, 지난 주에 와서야 결국 제15권을 구입함으로써 "완질"을 갖게 되었다. 이거... 생각해 보니 맨 처음 그중 절반 가량을 한꺼번에 구입한 것이 약 10여 년 전쯤 고구마에서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10년 만에 다 모았다고 봐야 하나? 이번에 산 것 말고 가장 최근에 구입한 것은 "감자"가 수록된 제1권 단편집인데, 이건 신촌 숨어있는책에서 샀다. 이거 사던 날 어디선가 술 마시고 들어와 떠들던 어느 손님이 이 책을 보고는 계속 "감자... 감자..." 어쩌구 하고 떠들어 대던 좀 황당한 기억 때문에 유난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왜 하필이면 "조선일보" 판 <김동인전집>이냐고 물어볼 사람이 있다면, 그거야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김동인의 "전집"으로서는 유일한 가로쓰기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동인전집>이란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옛날 세로쓰기판이 있긴 하지만, 나중에 굳이 신국판 가로쓰기 전집이 나와 있는 걸 본 상황에서야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게다가 <이광수 전집>이라면 삼중당 판(20권짜리와 10권짜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먼젓 것을 친다)과 우신사 판(삼중당 판 10권짜리를 재편집한 것으로, 어찌 보면 삼중당을 "계승"한 곳이 바로 우신사인데, 어째서인지 이건 잘 쳐주지 않는 모양이다)이 대표적인데, <김동인 전집>은 조선일보사 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이 책의 "완질"은 이번에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본 셈이다. 다른 데서는 한두 권이 빠진 "완질에 가까운" 묶음이나 낱권은 봤지만 전권이 돌아다니는 경우는 전혀 못 봤다. 또 한편으로 조선일보사 판에 대한 신뢰랄까, 혹은 기대가 없지 않은 까닭은 다들 알다시피 조선일보에서 "동인문학상"을 주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자기네 간판 문학상의 이름을 제공한 김동인의 전집을 펴내면서, 설마하니 두고두고 욕 먹을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다.(뭐, 또 잘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열일곱 권의 책을 모으는 데 10년이라는 무지막지한 시간이, 그것도 그중 열여섯 권을 모으는 데에는 2, 3년으로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맨 마지막 한 권이 7, 8년이나 걸려서 책장에 꽂히게 된 데에는 그간 내 관심이 동인에게서 한참 멀어진 이유도 없지 않을 것이다. 언제였나, 전기를 한 권 펼쳐놓고 한 인물의 생애를 뒤따라 가면서, 그가 남긴 주요 저술을 그때그때 병행해서 읽어나가는 길고 지루하지만 보람있는 일(이른바 "전집 겸 전기 읽기")을 몇 번인가 시도해보다가 아예 재미가 들려서, 그 범위를 국내 작가로까지 확대 적용해 보려던 때가 있었다.(외국 작가의 경우에는 루터와 헤밍웨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물론 두 사람 다 작품이 비교적 많이 소개된 편이어서 가능했겠지만. 루터는 12권짜리 <선집> 말고 단권짜리 <저작권>을 사용했고, 헤밍웨이는 5권짜리 <전집>을 뒤져 보았는데 사실 장편보다도 단편에서 더 건진 것이 많았다. 그 외에도 셰익스피어(예전 휘문 판으로)와 도스토예프스키(예전 정음사 판으로)와 괴테(역시 예전 휘문 판으로)를 시도하기도 했었는데 완독은 못한 걸로 기억한다. 지금처럼 전기나 전(선)집 출간이 비교적 활발해진 상황에서는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가를 다시 시도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맨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춘원이었던 것 같은데, 적당한 전기가 없어서 일단 작품(소품 중심으로)을 읽기 시작했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중도작파하고 말았다. 한 가지 수확이라면 춘원의 "번역" 작품 가운데 카렐 차펙의 RUR, 즉 "로봇"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희곡이 "인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완역은 아니고 부분역과 줄거리 설명 등이었다)된 바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카렐 차펙이라는 이름 대신 "어느 보히미아 작가"라고만 하고, 원제를 밝혀두지는 않았지만 "롯쌈"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차펙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웃기는 사실은 예전에 천리안의 모 통신 동호회에 이 이야기를 "춘원 이광수와 로봇"이라고 썼더니만 당시 SF 동호회 "멋신"에서 활동하던 누군가가 내 글을 가져다가 정말 "거두절미," 즉 앞뒤를 떼어내고 마치 자기가 발굴한 사실인 것마냥 사방팔방에 글을 퍼날랐다는 점이다. 평소에도 여기저기 게시판을 기웃기웃하면서 "쓸만한" 정보는 마음대로 퍼 가면서도 출처나 작성자를 결코 밝히지 않아 짜증이 났었는데, 그렇다고 뭐 굳이 시비 걸 일은 아닌 듯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나중에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는 그 사람 글이 거의 "최초의 전거"로서 권위를 얻게 되며 사방팔방에 인용되는 듯해서 좀 황당했다. 물론 나중에 알고보니 이 사실은 이미 김병철 선생이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에서 지적한 바 있었으니 --- 내공으로 따지자면 결국 김 선생이 최고가 아닐까? 인터넷도 없던 그 시대에! --- 나 역시 감히 최초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이른바 "펌질"에 대한 혐오감이 더 짙어지기는 했다. 어쩌면 그 본인 --- 요즘은 무슨 SF 평론가인 양 행세하는 --- 이야 순수하게 자기가 연구해서 찾아낸 것이라고 주장할런지도 모르지만, 글쎄, 내가 알기로 그 본인은 철저한 "장르 팬"으로 결코 한국 근대문학 "따위"에는 취미가 없었던 양반이었으며, 게다가 "춘원"과 "차펙"의 작품을 두루 섭렵할 만큼 "잡식성" 취향을 가진 독자가 우리나라에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덧붙이자면, 춘원의 "번역"은 사실은 내용 일부를 수록한 "서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육당이 펴내던 <동명>지 --- 나중에 영인본을 보니 거의 "신문" 스타일이던데 --- 에 실린 기고문이었다. 일각에서는 마치 춘원이 이 책을 정식으로 번역 출판한 것처럼 나와 있던데, <동명>까지 가지 않고 춘원의 전집만 뒤져보았더라도 결코 생기지 않았을 오류이다. 내가 이 글을 처음 발견한 직후에 마침 주위에 체코 문학을 전공한 양반이 있어서 전집의 그 대목을 복사해 건네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나중에 무슨 논문인지 발표인지에 써먹겠다고 했는데 워낙 느긋한 양반이어서 나중에 정말로 이야길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한편으로는 다른 국내 작가의 "전집"을 기회 있을 때마다 모으기 시작했는데, <김동인 전집> 말고도 <최남선 전집>(전15권) 가운데 전반부인 1권부터 8권까지를 적지 않은 가격에 구입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현암사 판 전집은 원래 16권인가로 기획되었다가 나중에는 한 권이 줄은 전15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전반부 여덟 권을 먼저 내고 후반부 일곱 권을 나중에 내기까지 적잖은 시간차가 있기 때문인지, 후반부만 구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완질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간혹 나오기는 하는데 케이스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것은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요즘은 거의 권당 2, 3만 원 가량 거래되는 듯.) 예나 지금이나 책 살 돈이 넉넉지 않은 나로서는 (문득 등 뒤에서 집사람이 "얼씨구!"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 누군가가 고이 모셔두었다가 고가에 매각하려는 완질을 기다리기보다는, 여기저기 헌책방에서 한두 권 빠진 "낙질"이라든지, 아예 "낱권"을 눈에 띌 때마다 모으기 시작하는 일종의 게릴라 전략을 시도하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그나마 갖고 있는 몇 권의 "전집" 가운데 "완질"을 소장한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가령 나남 판 <조지훈 전집>은 제1권과 부록이 없는 상태이고, 문지 판 <최인훈 전집>과 <황순원 전집>은 세로쓰기 구판(판형이 작다)과 가로쓰기 신판 모두를 조금씩은 모아 두었지만 아직 "완질"을 구비한 것은 없다. 문학사상사 판 <이상 전집>은 오랫동안 1권 "시"만 갖고 있다가 작년엔가 2권 "소설"을 구해 간신히 "짝을 맞췄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3권과 4권도 있다고 해서 김이 좀 빠져버렸다.(그 와중에 예전에 한 번 놓쳤던 임종국의 <이상 전집>도 구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좀 더 요즘 작가 중에서는 문학동네 판 <최인호 단편전집>이 1권 "깊고 푸른 밤"만 없는 "낙질" 상태로 수년째 버티고 있고, 열림원 판 <이청준 문학전집>은 아무래도 "서편제"와 "병신과 머저리"를 비롯한 다섯 권 이상으로는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도 한 가지 흥미롭달까, 뜻밖의 변화를 겪은 것은 심설당 판 <김기림 전집>인데, 이건 예전에 전권을 몇 번이나 봤음에도 불구하고 구입하지 않고 있다가(그때만 해도 "김기림"이 누군지 몰랐다!) 나중에 우연히 제2권을 어디서 사게 되어 거의 10여 년 가까이 그거 하나만 갖고 있었는데, 최근에 이런저런 헌책방을 통해 1, 5, 6권을 따로따로 구입하게 되었어서, 어쩌면 이러다가 조만간 "완질"이 구비되지 않을까 싶다.(물론 인터넷 헌책방을 찾아보면 3, 4권을 쉽게 구할 수도 있긴 한데... 가격을 워낙 올려쳐 놓았기 때문에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당장 급한 책은 아니니까.) 그에 비해 깊은샘 판 <이태준 전집>은 1-3권에 해당하는 "단편집"만을 갖고 있다가 언젠가는 "완질"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에 이사 하면서 아낌 없이 처분해 버렸는데,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구할 기회가 없었다.
왜 이런 책 자랑 비스무리한 소리를 늘어놓느냐 하면, 요즘 들어서 이런 "전집"의 "짝 맞추기"를 시도하면서 문득 나 자신이 언제부턴가 "독서가"가 아닌 "수집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독서가"가 책을 읽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수집가"는 말 그대로 책을 모으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독서가"는 당장의 필요에 의해 책을 사는 사람인 반면, "수집가"는 당장 필요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완질"을 갖추기 위해 (물론 "언젠가는 읽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긴 한다) 책을 사는 사람이다. "독서가"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수집가"는 이상(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단적으로 말해 "독서가"는 겉표지나 케이스조차 없이 제본이 낡아 페이지가 거의 떨어져나갈 지경이 된 도서관 책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 반면, 수집가는 그야말로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전집 가운데 한 권이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채워넣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사람이다. 독서가면 어떻고 수집가면 또 어떠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날 이때까지 나 자신을 "수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종종 "수집가스러운" 열망이 솟구칠 때도 종종 있었고, 나 역시 은연중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처럼 나 자신에 대해 "수집가"라는 인식이 든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어쩌면 요즘 날이 갈수록 책 한 권을 "느긋하게" 완독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이런저런 책을 그저 "주마(관)산" 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일은 많아진 것 때문은 아닐까? 물론 모든 책을 완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끔은 훑고만 지나가는 책이 있어도 나쁠 것이야 없겠지만, 그만큼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건 문제다. 머리는 자랄 대로 자라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많고, 주워들은 것도 많으니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오거나 하는 책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그걸 다 붙들고 앉아서 머릿속에 구겨넣을 수가 없으니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물론 <김동인 전집>을 비롯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책들 대부분은 "독서가"로서가 아니라 "수집가"로서 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동인의 전집을 "완질"로 갖추기 위해 걸린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내 관심사는 이미 한국 근대문학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시간이나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않는 한 열일곱 권이나 되는 그 책을 완독할 기회는 "여간해서" 찾아올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어차피 모으기 시작한 책이니..." 또는 "언젠가는 한 번 볼 날이 오겠지..." 하는 "수집가"의 마인드로 책을 구입하게 된 셈이다. 사실 관심사가 바뀌는 대로 책 구입 행태까지 바뀐다면, 나로선 더 이상 한국사나 국문학, 또는 인류학이나 고고학 관련서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책을 구비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그쪽 분야의 책을 보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각 분야의 "원전"이나 "명저"를 중심으로 해서 조금씩은 책을 기회 있을 때마다 구해 두는 걸 보면,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아닌 "수집가"의 마인드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수집가"라고 해서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은 "수집가"를 "책도 읽지 않는 게으른 작자" 정도로 생각하게 마련인데, 사실 어떤 면에서 수집가는 독서가보다도 더 부지런해야 하는 사림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읽은 책, 또는 읽을 책뿐만 아니라, 심지어 읽을 것 같지 않는 책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수집가야말로 "서지사항"과 "도서목록"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고, 거기에는 "책 중의 책"인 도서목록에 대한 도착적인 매력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수집가"라면 자기가 원하는 책을 손에 넣고 나서의 "환멸"보다는, 도서목록을 뒤적이며 자기가 간절히 원하지만 아직 얻지 못한 책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느끼는 "희열"을 더욱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집가"는 필연적으로 한때의 "독서가"일수밖에 없다. 독서가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집가가 되는 사람은 드물고,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또 다른 "독서가 출신 수집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뭔가를 "수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 못지않은 노력과 지식을 요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수집가"에 대한 "독서가"의 비아냥은 오히려 부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도 없지는 않다. 최근에 내가 느낀 것처럼 "독서가"와 "수집가"의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독서가"가 "수집가"로 변모되는지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다는 점 때문이다. 내 경우만 봐도 가령 내가 <김동인 전집>의 맨 마지막 한 권을 "짝맞춘" 바로 그 시간부로 "수집가"가 되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전집>을 짝맞춰 들여놓자고 작정했던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이미 "수집가"가 되었는지는 선뜻 판단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있어 그런 성향이 분명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독서가 겸 수집가"일 수도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균형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게 문제다. 이러다가 정말 "독서"는 뒷전으로 미루어 둔 채 오로지 "수집"에만 전념하는 때가 오는 것은 아닐까? 이는 어쩌면 모든 "독서가"들의 악몽이거나, 또는 기우인지도 모른다.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그런 가능성 자체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아닌 "수집가"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도 없지 않다. 이건 나도 최근에야 깨달은 것인데, 수집가는 책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약간 머쓱하지만 일종의 "책 지킴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급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예로 들어보자면, 그 대부분은 수많은 이용자들의 손길에 시달린 나머지 원래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잔뜩 훼손된 상태다. 단적인 예로,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은 초판 100부를 찍고, 거기다가 추가로 30부를 "특제본"(표지 글씨를 일일이 수놓아서 만들었다고 한다)으로 만들었는데, 일반 제본으로 된 책은 비교적 흔히 보인 반면 특제본은 구경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미당 사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한 부가 소장되어 있다고 해서 확인해 보니, 이미 일반 이용자들의 손길에 의해 무참히 제본이 망가져서 특유의 "도서관 하드커버"로 장정을 새로 해 놓은 지 오래였다는 것이다. 물론 미당이 훗날 그렇게 유명한 시인이 될 줄 알았다면 고이 간직해 두었겠지만, 도서관이 점장이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쳐도, 일단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의 경우에는 겉표지나 케이스 등의 부속물을 모조리 없애버리게 마련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지학적 가치나 사료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책의 원형, 또는 원래 모습 그대로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결국 어느 "수집가"의 서재에서 기대해 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렇게 보자면 "수집가"는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좋은 책을 독차지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지나친 손길로부터 책의 원형을 보호하는 사림이라고 보아도 틀릴 것이 없다.
한편으로 내가 시간이 갈 수록 "독서가"에서 "수집가"로 변모하게 되는 데에는 뭔가 외적인 요인도 없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이른바 "절판본"이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10년, 또는 20년 전에 딱 한 번 나오고 만 책들이 많아서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며 간신히 한 권 구해 놓거나, 또는 운 좋게 미리 사 두고서 10년, 또는 20년 넘게 그거 한 권만으로도 만족했는데, 요즘에는 어째서인지 한 번 절판된 책들의 "개정판"이며 "증보판"이며 "신판"이 줄줄이 나오기 때문이다. 단순히 구판의 내용 그대로를 판형이나 편집만 약간 바꿔 다시 내놓은 것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내용이 대폭 개정되었다거나, 오역이 크게 바로잡혔다거나, 구판에서는 빠졌던 원주와 참고문헌이 신판에는 포함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이유" 앞에서는 구판이 있어도 신판을 사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구판과 신판 사이의 시간적 간격도 크게 줄어서, 가령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경우에는 (물론 오역이니 뭐니 하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불과 10년도 지나기 전에 구판과 신판 두 가지가 나와 있는 실정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말이 좋아서 "개정판"이고 "신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내용이나 편집이나 판형 등등이 "구판"보다도 못한 경우가 없지 않아서, 그럴 경우에는 차마 기존에 갖고 있던 구판을 선뜻 내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가령 "갈보리"를 "창녀리"로 바꿔놓은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신판이라든지, 구판의 오역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 같은 책이 그런 경우다.)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신판"이 나왔다 하더라도 "구판"과의 인연을 차마 끊을 수 없어 "두 권 다" 소장하는 무리를 범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졸지에 똑같은 책이 두 권, 또는 세 권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 집에는 한때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가 무려 다섯 권이나 있었는데, 왜냐하면 내가 결혼하기 전에 갖고 있던 것 세 권(하나는 "초판본", 하나는 "저자 서명본", 하나는 "밑줄 친 것")과 집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갖고 있던 것(하나는 "새 것" 또 하나는 "밑줄 친 것")을 서로 버릴 수 없다고 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일종의 타협을 봐서 내 것 가운데 "초판본" 하나와 집사람 것 가운데 "새것" 하나는 헌책방에 처분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똑같은 책이 세 권이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로선 요즘 출판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이런저런 책의 "개정판"과 "개역판"과 "수정본"과 "신판"을 내놓는 처사가 적잖이 못마땅하다. 그중에는 정말 표지와 판형만 슬쩍 바꾸고 가격 올려치기만을 도모한 듯한 경우도 없지 않고, 또한 새로 바뀐 표지와 판형만 보면 오히려 꼴불견인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이건 나중에 가서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그렇게 보자면 "수집가"란 책을 "독서 이외의 목적"으로 소유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독서가"라면 헌책이건 파본이건 오역투성이 번역본이건 간에 일단 "읽은 수 있는 상태"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때는 그런 식이어서 가령 헌책방에 돌아다니는 책들 중에서 상당히 "파손"되어 싼 값에 팔리는 것들을 많이 사기도 했다. 가령 지금은 그런 경우가 적은데 신문사에 증정본으로 들어갔다 나온 책들 중에서 예전에는 책 표지 사진을 "찍는" 대신 아예 책 표지를 싹둑 잘라내고 알맹이는 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가 한때 소장했던 제임스 글릭의 <빨리빨리>라든지, 기린에 관한 이야기인 <자라파 여행기>가 바로 그런 이유로 싸게 산 책이었다. 그 외에도 어디선가 "불에 그을린" 듯 비닐코팅 표지에 우툴두툴한 "거품"이 올라와 눌어붙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2, 3권이라든지, 누군가가 "냄비받침"으로 사용했는지 둥글게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의 도성> 제3권이 있고, 하드커버인데 겉표지가 분실되어 싸게 살 수 있었던 책이라든지, 중간에 한두 장 낙장이 있어서 헐값에 가져온 책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단 그렇게 해서 한 권 "갖고 있는" 책이라 하더라도,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깨끗한" 것, 또는 "겉표지와 케이스까지 완비된" 것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도서수집가는 단지 지금 자기가 가진 어느 희귀본에 "겉표지"가 없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수만 달러를 들여 가며 또 다른 책을 하나 구입하기도 했다는데, 물론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나마 "적절한" 상황이라면 나 역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책을 "더 나은 상태"의 다른 책으로 교체하고픈 충동을 종종 느끼고, 실제로도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기도 했다.(가장 최근에는 솔에서 나온 카프카 전집 가운데 "서한집"을 그렇게 바꿔치기 했는데, 이전에 내가 헌책방에서 운 좋게 산 책은 알고보니 그중 몇 페이지의 글자가 부옇게 "번져" 있어서 읽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아마도 인쇄 과정에서 종이가 슬쩍 움직였거나 해서 그 면 전체가 그렇게 되어 있었는데, 굳이 참고 읽으라면 읽지 못할 것도 없어서 그냥 두고 있었지만, 최근에 다행히도 또 다른 헌책방에서 같은 책을 멀쩡한 것으로 싼 값에 구할 기회가 있어서 "얼른" 교체하고 말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물욕"인지도 모르지만, 사실 책을 소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태"에 집착하는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찍이 어느 미국의 고서상 겸 수집가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처럼 말이다 : "고서수집에 있어서는 다음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째는 '상태'다. 둘째도 '상태'다. 셋째도 역시 '상태'다."
물론 한평생 훌륭한 "독서가"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그런 꿈이 불가능하다면 훌륭한 "수집가"가 되는 것도 나름대로는 보람 있는 일일 수 있다. 어제 집사람과 밤늦게 동네 단골 커피점(핸드드립 하는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이 문득 어디선가 들은 김우창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즉 그 양반이 젊은 시절에 누가 집에 가 보니 학생 신분에 이미 "교수" 급에 버금가는 양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책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미 "읽은" 것이었다는 점이었다나. 하긴 지난 번에 이사하면서 느낀 것인데, 사다 놓기만 하고 결국 읽지도 못한 채 다시 헌책방에 내놓을 책을 골라내면서 처참한 기분이 든 것 역시 그런 "독서가"가 아닌 "수집가"로서 나 자신의 모습을 은연중에 인식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날 책을 박스에 담으면서 읽은 것과 안 읽은 것의 비율을 대강이나마 눈대중으로 짐작해 보고, 책이 담긴 박스의 숫자를 세어가다 보니 솔직히 좀 죄스러운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대충이나마 계산해 본 내 책의 권수가 하필이면 그날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던 현금의 액수와 "상당히" 유사했다는 상황 앞에서는 정말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참고로 그날 이사에 필요한 모든 현금은 내가 아니라 집사람이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