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붓다의 수행법 2 - 위빠싸나.환.정
무산본각 지음 / 유토피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제 점점 많은 것의 윤곽이 분명해진다. 왜 북방불교가 그랬는가 하는 점 말이다. '혜능'의 불교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무산본각님은 진정한 6조가 '신수대사'였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보조국사 지눌'을 위빠사나 관점에서 새롭게 인용한다. "깨달았다고 손쉽게 여기는 바로 그 순간이 위험하다"고 말이다. 이 점을 지눌 국사도 지적하셨다. '돈점논쟁'은 그러니까 논점에서 벗어난 일종의 '언론 플레이' 비슷한 것 아니었겠는가.

 
중국 '선'의 신화형성과  근본불교의 왜곡 

무산본각님도 그의 이 책에서 '돈점논쟁'의 허구성을 밝혀낸다. 신회의 '작업'에 의해 6조 혜능이 '높여졌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창작된 얘기들이 염화미소의 '전설'이라 했다. 무산본각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회를 높이 평가하니 좀 이해가지 않는다. 신회는 7조가 되려고 그렇게 애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 혜능을 6조로 올려 놓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이런 '목적'이 작용하여 '염화미소'의 신화 같은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애초 '법의 계승'이라는 것 자체가 불교의 기본 정신에 비추어 말이 안되었다.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왜 6조 혜능이 40세 이상이 되도록 '사냥꾼들과 숨어' 지내야만 했을까라는 것이다. 부처님시대 석가족을 '멸족' 시키러 간 바두바두 당시 코살라 왕도 '출가'한 부처님 포함 석가족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 '수행자'를 해친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법난'의 시점에는 문제가 발생하나 대개 '법난'이 속세적 소유의 문제나 재산문제가 겹쳐져 벌어지니 청정수행자와는 무관한 사태이다. 가령 일타스님의 외삼촌이었던 '법진스님'은 평생을 걸어 다녔는데 이런 분들이 '법난'에 관련이나 될까? 일타스님의 말씀이 없었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긴 김현준 이분의 노력이 없었으면 나는 그런 스님의 존재를 알 리 없다. 그 만큼 이런 스님은, 가령 시내버스고 시외버스고 기차고 아무것도 타지 않고 걸어 다녔으며 절과 절 사이를 오갈때 오직 구걸로 연명했다는 이런 '수행자'가 무슨 원한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아무튼 6조 혜능은 사실 신수의 시를 '뒤집어' 엎으면서 단 한구절의 천명으로 '6조'가 되었는데 바로 "본래무일물"이었다. 이후 문학적 직관을 가진 수행자들에 의해 이 구절은 오랫동안 즐겨 인용되고 암송되던 명구였다.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이란 신수의 것을 '뒤집은'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최신의 위빠사나 관점에서 해석하면 신수의 시 자체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만일 '신수대사'가 9차제정을 성취하고 입정과 출정을 자유롭게하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었다면 그의 시 말이 된다. 그래서 문제는 '본래무일물'이 되는데 물론 여기도 폭발적 쟁점이 함의되어 있다. 각묵스님이 '금강경 결제'를 할때 여러 '논자'들이 기존의 '믿음'이 부서지는 것에 공포심을 느끼면서 논박하려 했던 것 처럼 말이다. 당시에는 '성품'이나 '마음'이나 '여래장' 이런 것들에 '불성'까지 무너져 내린다 싶어서 그러했다. 지금부터 6년전의 일이었지만. 

그리하여 무산본각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여리작의'로서 '알아차림'을 개입시켜서 개념화 작용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의 '여리작의'는 사미디에 들어가는 과정이 아니다. 연방죽 선원에서 말하듯, '사마타'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 '집중'이라는 의미로 뭔가 강력하게 '억누른다'는 이런 것이라면 위빠사나 수행속에서는 이런 '집중'이 있어서는 안된다. 순일하고 평화로운 마음상태에서 진행된다는 것인데 부처님의 전기에서는 사선정에서 나와 지극히 순수한 마음상태를 상정하고 여기서 '사띠'를 챙기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분명 부처님께서 두 스승에게서 얻었던 사마타 선장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발견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매우 단순한 얘기다. 두 스승에게서 얻은 '선정'이 모두 '사마타'에 한정되었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어린시절' 농경제때 나무그늘에서의 '초선' 체험을 반추하시면서 제 사선까지 이룩하신후 '출정'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기서 사띠를 강화하고 알아차림을 강화하여 하룻밤동안 깨달음으로 나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정체험과 반야를 적절히 조합하여 '공'사상 위에 세워진 '선'만으로 절대 미흡하며 지관쌍운중에서 특히 '관'법 수행을 통해 통찰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 이 뿐 아니라 '닙빠나'까지 논의하며 성숙명지와 도 과의 지혜까지 강설한다.

'빠빤챠'의 완화  개념화 작용의 진정과정으로서 위빠사나 수행  

나는 이런 과정을 '자극'과 '반응'으로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누구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여기지 '생각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행위한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다. 아침에 동쪽을 향했다가 저녁에 서쪽을 향하는 해바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나 중요한 지점!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결여되면 사실 무슨 '의지'를 가지건 상관없이 결국은 '반응'의 영역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지' 자체도 '반응'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놀라운(!) 결론이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하건 다 '업'이 된다. 단지 마음챙겨 알아차림이 성성하면 '업'이 안될 수 있다. 허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락인과'는 아니고 '불매인과'이다. 

말하자면 반응과정은 무엇이건 다 생물학적 적응과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디엔에이와 더불어 '최초의 정보'에서 비롯된다. 그, 사몰심과 이것의 연결로서 재생연결식 이 두가지이다. 몸과 마음이 디엔에이 정보와 재생연결식 두가지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다름아닌 '우치' 즉 삼독 중에 '어리석음'아니겠는가. 이것으로부터 '탐'과 '진'이 파생되고 그리고 각묵스님 말씀하시듯 끊임없는 생멸의 흐름속에서 삶이 지속된다.

이러한 생명체의 끊임없는 번성 과정을 무산본각님은 하늘목장의 젖소들이라고 비유했다. 아주 적절하다. 거듭 태어나면서 우유생산과 공급을 지속하도록 '칩'이 내장되었다고 한다. 누가 어떤 의지로 무엇을 행하건 모두 이 '침'의 프로그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것을 개입시켜서 매 순간 깨어 있을 때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부처님은 이런 것을 발견하신 분이다. 정말 '속지 않기'가 어렵다. 자극이 있을때 반응이란 이렇듯 '자동화' 과정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격을 넓히는 사람이 집중력이 높은 사람에 해당된다. 그 최후의 구경이 사마타 선정일 것이다. 허나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되며 매 순간의 '깨어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마음챙겨 알아차림이다. 이것을 '사띠'에 의해 실현할 수 있으니 수행의 첫걸음과 맺음걸음 모두 사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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