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골렘 ㅣ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키워드: 정신적 신비주의, 판타지, 환상, 몽환, 범죄, 도플갱어, 진정한 자아 찾기
작품 분위기: ETA 호프만, 앨런 포우, 카프카, 단테, 윌리엄 블레이크, 야코프 뵈메
우연하게 도서관에서 뽑아들은 이 책은 내겐 행운이었다.
파워풀하며 괴기스럽고 파격적인 독일 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호프만의 '모래 남자'든가를 읽다가 전반부가 너무 심심해서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나에게는.
독일어권 작가라면 단연, 뒤렌마트를 좋아하며 심취하는 나에게는.
200년 전쯤에 나온, 유럽 괴기 소설, 이른바 '고딕 소설'의 뉘앙스도 좀 살아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솔직히 나는 '판타지' 문학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지나치게 현실을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나치게 리얼리티에 안주하는 한국 문학에도 요즘은 슬슬 매력을 잃고 있지만.
같은 말이라도 '환상 문학'이나 '몽환 소설'은 어감이 틀린 것 같다.
스티븐 킹을 꽤 좋아하지만 가끔씩 그의 젊었을 적 작품 중에서 밀교와 신비주의를 다룬 단편은 웬지 모르게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일차원적 흥미 위주의 신비주의 뉘앙스가 전혀 없진 않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문학적으로나, 신비주의적으로나 괜찮은 작품 같다.
1. 문장이 대단히 시적이고 감각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이 문체에서 제일 두드러진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내가 나의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런 문장이었던 느낌이 든다. 의식이 현실과 꿈 사이의 조그만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 세상을 방황하듯, 그 영혼의 방랑을 표현하는 감각적이고 시적인 문체는 마치 독자 자신이 그런 영혼의 여행을 하고 있는 듯...
2.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대체로 불교의 화두를 떠올린다. 부처의 생애를 떠올린다. 앞 부분의 '돌덩어리'와 '비곗덩어리'에 대한 묘사와 사고는 그렇다. 골렘이 갖혀 있다는 '출구 없는 방'에서 조우하는 '나'의 도플갱어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렇게 영혼의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지속적으로 방랑한다.
3. 등장인물이 매력적이다.
작가는 처음에 120여명의 인물을 생각했다 한다. 그러다 지인의 지적으로 30명 정도로 줄였다 한다.
원래 의도가 창작 과정에 좀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원래 의도대로 창작되었다면 또 어떤 맛일까, 궁금하지만 아마도 그랬다면 최소 3권 이상의 소설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긴 소설을 기피하는 나로서는 애초에 접근해보지 못했으리라. 이 책의 소설 부분은 369P.
제일 눈에 뜨이는 인물은 고물상 주인이다. 무척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된다.
페르나트 - '나'. 미쳐버려 옛 기억을 상실한 남자.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고통을 자처한다. 이후 온갖 몽환과 환상, 꿈을 겪는다.
고물 장수 - 바서트룸
빨간 머리 로지나 - 거리의 여인
정숙한 유태인 처녀 - 미리암
정신적인 지주 랍비 - 힐렐 : 열반으로 향하는 부처
의학 박사 차루세크 - 차루세크: 복수의 화신
사비올라 박사
안겔리나 - '나' 페르나트의 젊었을 적 애인, 사비올라 박사와 불륜 관계
그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흥미롭고 독특하다. 모두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 심지어 강간살인범조차도. 라폰더는 강간살인, 방화를 저지른 인물인데 그는 범죄를 후회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독자로 하여금 열반의 범죄를 저지른 인물처럼 느껴지고, 그를 저주하는 잡범들의 거친 말투가 오히려 저속하게 느껴진다.
페르나트가 감방에 갇혀, 감방 동료들이 그의 혐의를 묻는 부분에서 자지러지는 줄 알았다. 페르나트가 묵묵히 '강도살인'을 말할 때, 잡범들의 그 모습이란. 지하철 승강장에서 그 부분을 읽었는데, 전동차 안이 아니어서 천만 다행. 가끔 가다 마이링크의 탁월한 유머 감각이 나온다. 특히 기득권(경찰, 교도소 관계자, 관청 사람들)을 은근히 비꼴 때 그러하다.
전반적으로, 신비주의(초현실주의)와 다양한 인물들,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소문들 (그리고 골렘 전설), '나'의 정신적 일탈 행위가 적절히 맞물려 판타지 문학의 전범을 이룩한 듯싶다.
한번 읽은 장편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데, 이 작품만은 예외로 반납한 뒤, 인터넷으로 주문할 생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다시 읽을 생각이다. 마이링크의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아, 이 책 번역이 너무 좋다. 독문학 전공자이자 시인인 사람이 번역해서 그런지, 문장과 수사학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그리고 출판사에도 감사하다. 이런 좋고 훌륭한 작품을 다 소개해 주니. 그것도 무척 싼 가격에. 마이링크의 다른 문학도 소개해 주길 바란다.
인상적인 문구:
P265,
차루세크의 말,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음의 암시를 남긴 후, 페르나트 어르신에게 하는 말
"...화가들이 쓰는 용어인 '키치'도 그렇게 형편없는 것만은 아니에요. 키치 역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거짓 눈물이라도 짜낼 수 있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이미 오래전에 극장들은 불과 칼로써 깡그리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감상성에서 우리는 사기꾼을 봅니다. 수천의 불쌍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도 사람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멍청한 농부로 분장한 배우가 무대에서 눈알을 희번덕거리면 사람들은 달을 보고 짖는 개처럼 울부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