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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놓치고, 기차에서 내리다
이화열 지음, 폴 뮤즈 사진 / 현대문학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이화열 - 배를 놓치고 기차에서 내리다
솔직히 에세이는 오랫 동안 피해왔습니다. 아무리 문체가 좋고 멋진 분위기의 책도 저를 홀리지 못했고 몇 장 읽다보면 어떤 책들보다 오롯이 저자를 어떤 간접 장치 없이 그대로 접하는 에세이는 제게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내 생각을 갖추고 남의 말을 들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나름의 고집이 작동했던 듯. 아직 내 철학을 갖추진 못했지만... 얼마전 재불 작가 목수정 씨의 강연을 듣고 그녀의 책을 사게 되었고 이화열님도 우연히 알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패미니스트에 정치 활동까지 한 진보적인 목수정씨는 우아하고 설득력있는 목소리와 말투로 부드럽게 보이며 지적이면서 넉살도 참 매력적이였습니다. 버거운 에세이를 새롭게 만난 매력적인 재불작가와 비슷하리란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목과 표지는 우울하고 침작되고 허무한 느낌을 줍니다. 보통 크기에 무겁지 않아 휴대성이 좋았고 줄간도 넉넉하고 글씨 크기도 적당해 가독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여유로움이 가득해 프랑스의 정취와 인생을 즐기는 저자의 발자취에 느리고 여유로운 기차를 탄 듯 리듬에 흔들리며 즐길 수 있었습니다. 배고픔 없이 넉넉한 여유로움으로 가득합니다. 배고픔과 절실함은 요 근래 느껴보질 못했지요. 하지만 한 번 씩 극기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책을 읽을 때면 지적 배고픔으로 무장한 절실함으로 읽곤 했습니다. 절실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책은 오랜만인 듯 합니다. 그래서 초반엔 뜻하지 않은 죄책감으로 기분이 언짢기도 합니다.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책을 읽을 때면 회초리로 후려 맞는 마조히스트였던가 봅니다. 나를 채찍질하며 괴롭히며 읽어야 안심할 수 있었다는 걸 죄책감을 느끼고 깨달아 갑니다. 이런 자기 강압적인 독서가 어느 정도 변태적이지만 효과는 확실하지요. 그래도 꾸준히 하는 건 피해야겠다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
느긋하고 부유한 분위기에 점점 물들어 갈 즈음 나직하게 말하고 있지만 저자의 남편이 심장병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도 살짝 나옵니다. 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위기를 이겨내셔서 이렇게 힘을 뺀 채로도 독자를 집중하게 하는 서정적인 글이 나온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힘이 팍팍 들어간 글은 확실한 문체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 책처럼 힘이 빠진 문체는 뒤에 뭔가를 더 숨겨진 듯해 그 음흉함에 물들까 피했던 거 같아요. 저자의 말투에서는 그런 음흉함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잘 정돈되고 비질 잘 된 정갈한 정원을 거닐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몸의 고난은 마음도 힘들게 하는 법, 힘든 일을 이겨낸 사람들이 내는 힘이 없지만 내공 가득한 가벼운 말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회 깊숙이 스며든 저자의 모습이 외지 사람이 그 사회를 보는 느낌이 아니라 독특했습니다. 인종과 국경의 경계없이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관찰하고 사람과 문화를 독자들이 엿볼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전지적 작가시점의 소설을 보는 듯 하지만 작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독자의 생각의 여지를 남겨둔 채 우아하고 짧게 말합니다.
<7막 7장>의 홍정욱씨는 미국의 상류층 사회에 빠져 보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거기가 좋았다면 빠져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대략 냉소적이지만 이해는 한다는 식의 관찰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프랑스 사회에 스며들었고 그만큼 깊이 독자들이 프랑스 내부 깊숙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이 빠지지 않았다면 볼 수 없을 것들, 깊이 있는 프랑스 사람들의 습성과 문화를 알 수 있어서 놀라웠습니다. 프랑스에 사는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에 좋은 재료였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어가지 않을까 싶은 분의 이야기에는 흠뻑 빠져 내가 아닌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다급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아도 독자의 가슴에 깊이 닿을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소 에세이는 속독으로 페이지를 후루룩 넘기던 저였지만 정독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짧은 한 두가지 에피소드로 이뤄진 이야기가 마치 옆집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마냥 재미있게 즐기면서 생각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주위 사람과 나, 프랑스와 한국,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소소한 일상에서 . 총 3부로 이뤄져 있고 각각은 철학적인 제목으로 각 10여개의 짧고 깊이 있는 이야기들로 각 주제를 조금씩 천천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에 읽기 좋은 글들이였습니다. 제목은 처음 느낌처럼 허무하지 않은 뜻을 담고 있나 봅니다, 본문에서도 에필로그에서도. 제목 하나에서 크게, 이런 일 저런 일 모두 다 일어날 수 있으며 세상은 새로운 매력으로 가득차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잘하게는, 남의 사색과 생활을 엿보는 건 우리가 은연중 갈망하는 것들이지요. ^^ 이를 통해 나 자신과 내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