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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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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후감 숙제를 할 때 쓰던 버릇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은 후 쓰는 글에는 꼭 교훈이나 앞으로의 다짐, 하물며 그 책의 시사점 정도는 써주어야할 것 같은 압박이 있다. 그런데 종종 그런 걸 찾지 못할 때면 당황스럽고, 허투로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국 "그 책은 삶을 돌아보게 한다"라는 둥으로 급하게 마무리지으며 글을 마친다. 특히 소설이 그렇다.


책에 잠시 등장하는 오르한 파묵(<내이름은 빨강>, <이스탄불> 등을 쓴 터키 작가)은 소설읽기란 감춰진 "중심부"를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83p). 그 과정에서 호기심, 끝까지 읽으려는 동기, 그리고 경탄에 사로잡혀 읽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중심부를 찾기 위해 소설 속의 다양한 재료들을 면밀히 관찰한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는 행위에 대해 무릎을 탁 칠만한 해석이다.


그런데 저자 김영하는 그와 동시에 "중심부"를 찾기가 힘든 소설들도 소개한다.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권의 책"을 실천하고자 했다는 플로베르의 말은 지금까지의 소설읽기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길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선하고 파격적인 조언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사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 ㅡ 102p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 ㅡ 102p


무언가를 크게 깨닫지 않아도 된다. 소설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남겨진 여운, 이러한 내면의 경험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자 독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책에는 길이 없다". 한마디로 무엇을 의도하여 쓴 책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은 독자의 책임이 아닌, 소설의 또다른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헤매기만 해도 괜찮다. 독자들이 더 소설을 읽고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해석이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가 6번의 강연에서 풀어낸 내용을 엮은 것으로 '소설을 왜 읽는가'라는 물음을 핵심 주제로 한다. 작가가 사랑하는 소설들(오이디푸스, 돈키호테, 마담 보바리, 롤리타, 성, 죄와 벌 등)을 소개함과 동시에 이야기와 독서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그저 책이 있으니, 읽고 싶으니 읽었을 뿐인데 이 흔한 행위가 이렇게 심오하고 훌륭한(?) 의미가 있다니' 하는 놀라움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특히 아래의 구절은 예전에 <죄와 벌>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소설은 우리가 '라스콜리니코프' '롤리타' '히스클리프'라고 말함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독선을 해체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 ㅡ 173p


첫째, 당시에 라스콜리티코프의 생각과 행동을 보며, 책을 읽기 전에 짐작했던 살인자의 심리상태와 너무 다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살인을 들키지 않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대체 작가의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었다. 범죄자가 참회하고 자수하는 내용일 거라고 짐작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둘째,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를 비롯한 심리묘사가 소름돋도록 치밀하고 현실적이어서 '혹시 작가가 살인을 해본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인간 심리의 복잡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교훈을 찾기는 힘들었던 이 책에 대해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 있는 괴물을 맞닥뜨리고 불편함을 느끼는 경험 또한 이야기를 읽는 이유라는 것. <읽다>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지으며 <죄와 벌>을 읽었을 때의 의문들이 다소 해소되었다.


"책은 독립적이지만 이야기는 바다처럼 흘러 나눠지거나 합쳐지며 인간의 내부를 가득 채운다. "

'나'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이야기로부터 생성된 부분이 매우 크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바로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은 우리가 계속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야하는 의심할 수 없는 동기를 불러일으킨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 (해럴드 블룸) ㅡ 31p


사람이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혼란을 느끼고, 익숙한 것을 비뚤게 보고, 새로움과 기존의 것 가운데를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러한 작업들이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독서가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 읽어야만 하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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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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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 직설적이고 명확하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인생 이야기이다. 동시에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은 "나는 이러이러하게 달려왔고, 써왔으며, 계속 살아갈 것이다"라는 선별적인  회고록이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달리기라는 행위를 축으로 한 일종의 '회고록'으로 읽어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ㅡ 서문

현재도 달리기를 하고 있고, 지금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1장이 끝나고 2장부터는 달리기를 제대로 시작하게 된 1982년과 그 이후의 달리기 인생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서른 즈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체중조절과 체력 유지를 위해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고 점차 거리와 운동시간을 늘려나가며 아마추어 달리기 선수가 되어간다. 42.195km 마라톤 첫 도전, 한번에 100km를 뛰는 울트라 마라톤 참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한 치밀한 노력 등을 이야기한다.

 

달리기에 대한 내용만 가득하다면 그 방면에 흥미가 없는 독자로서는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루키는 달리기에서 자연스럽게 작가로서의 삶,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덤덤하게 풀어내 독자를 몰입시킨다.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중략) 창작가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ㅡ 26p


 

책을 통해 독자는 세계적인 작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한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본다. 그를 통해 달리기를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를 보는 듯한 친밀함과 함께 독자 자신의 삶은 어떤지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어느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 중 평균 이하인 것을 27개정도까지 찾아내다가 속상해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이 인간, 나랑 별반 다를게 없잖아'라며 피식 웃을 수도 있다. 그러는 순간 하루키라는 한 인간은 더욱 독자에게 가까워진다. 가진 게 많지 않다며 스스로를 쓰담쓰담하는 모습에서 독자를 무장해제시키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이며,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며, 그것을 철저하게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삶의 태도는 독자를 감화시키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러나 그런 살찌기 쉬운 체질로 태어났다는 것은 도리어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내 경우 체중이 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식사에 유의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중략) 그런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은 운동과 식사에 유의할 필요가 없다.(중략)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중략)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ㅡ 72p


 

마라톤 완주, 기록 단축, 트라이애슬론(달리기, 수영, 사이클을 혼합한 종목) 도전 등 피눈물나게 치열한(?) 달리기 이야기는 내용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들도 책이 술술 읽히는데 한몫한다.  "소설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문장들의 장점은 한 문장 한 문장이 꼭 필요한 의미만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며 이것은 독자를 더욱 집중하도록 돕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작가로서의 삶이나 그의 소설 이야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그러한 내용들의 비중이 크지 않은 데 대해 실망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는 것도 싫고"라는 후기처럼 작가가 사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거나 어색해하는 느낌이 책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최근에 하루키의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풀어낸 글로서는 최초인 산문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을 출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글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있던 독자에겐 환영할 만한 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는 까닭은 달리기 이야기는 그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며, 스스로 가장 우선순위라고 밝힌 '소설가로서의 삶'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ㅡ 126p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 이후에 쓴 소설들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달리기, 글쓰기, 그리고 그의 나머지 삶은 서로를 포용하고 연결하며 조화를 이룬다. 하루키의 문학과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글을 써보고 싶으나 잘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러너들에게는 당연히 추천이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ㅡ 2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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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1 펭귄클래식 74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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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란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 주제를 드러내는 정제된 언어로서 작가의 의도와 고민의 집약체이다. 만일 인물이 제목에 드러난다면 그 인물이야말로 독자가 가장 주목해야하고 그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책의 뿌리이자 줄기, 그리고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제인 에어"라는 인물의 생각을 읽고 그녀가 펼쳐낼 삶에서 독자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대조하기도 하며, 반성하거나 확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인은 독자가 오롯이 소설에 몰입하고 때로는 감동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19세기 영국, 제인 에어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숙모의 집에 얹혀 살며 외숙모와 외사촌들에게 모진 수모를 겪는다. 하녀보다도 존중받지 못하며 억눌려 살던 제인은 못된 행실(제인은 집에서 항상 못된 아이 취급을 받았다)을 고쳐야 한다는 명목과, 집에서 완전히 쫓아내려 하는 외숙모의 의도로 로우드 자선 학교에 입학한다. 금욕적이고 억압적인 교칙에 따라 학창시절을 보낸 후 손필드 장의 가정교사로 새 삶을 시작한 제인은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또다른 시련들을 불러온다.


평화에 안착하지 못하도록 제인의 삶을 혼돈으로 밀어넣는 사건들의 양상이 그리 독특하거나 신선하지는 않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주인을 사랑하고, 우연히 운명의 상대들과 조우하는 사건들은 우리가 그간 많이 보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몰입하게 하는 까닭은  제인 에어라는 인물의 강인함과 신중함,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용기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차라리 불확실할지언정 전력을 다해 발버둥치며 분투하는 폭풍우 속에 내던져진 삶을 살았더라면, 그리고 거칠고 험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지금 내가 그 한가운데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평온한 삶을 갈망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더라면,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  ㅡ 1권 234p


제인은 그녀 안에서 꿈틀대며 터져나오려는 것들, 자극과 변화를 갈망하는 열정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과감함을 지녔다. 제인의 선택에 따라 마치 한 연극이 끝나고 다른 연극이 시작하듯 새롭게 펼쳐지는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이다. 확신을 갖고 행동하기까지 치열하게 일어나는 그녀의 내적 갈등을 지켜보다보면 어느새 독자도 제인이 되어 같이 고민하고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제인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남성들, 로체스터와 신 존은 마치 드라마 남주와 서브 남주 사이에서 호불호를 가르는 것마냥 둘을 비교하며 응원하는 즐거움을 준다. 특히 여성독자라면 두 남자의 실제 모습을 상상하거나 세 주인공들의 드라마를 독자의 취향대로 꾸며보는 등 마치 연애소설을 읽을 때의 흥분이나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직자인 신 존이 지닌 종교관과 신념, 로체스터의 기구한 삶과 필연적인 비애는 인간의 삶과 죽음, 종교과 우주에 대한 포괄적인 고민과 시대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단순히 멜로드라마 속 상대역 이상의 무게를 지닌 인물들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두 남자의 유일무이한 개성은 제인의 삶과 겹쳐져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인물의 마음이나 자연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들을 음미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온 만물의 존재에 감동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그녀의 시선은 수려하면서도 정제된 시들의 축제를 펼친다.


"나는 그의 고백이 중단됐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새들과 나뭇잎들도 잠시 노래와 속삭임을 자제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ㅡ 1권 406p

"땅거미가 찾아와 별이 촘촘히 박힌 자신의 푸른색 깃발을 격자창에 드리우는 낭만적인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일어나서 피아노 덮개를 열고 그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ㅡ 93p

"한 가운데가 갈라진 나무줄기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둘로 갈라진 각각의 반쪽 동강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단단한 나무 밑둥치와 튼튼한 뿌리가 아래쪽에서 두동강을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해 주고 있었다. (중략) 「이제 너희들에게 기쁨과 사랑의 시간은 끝났어. 하지만 너희들은 외롭진 않구나. 비록 각자 썩어갈망정 옆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동무가 있는 것 아니니.」쪼개진 나무 동강들을 올려다보니 일순간 그 가운데 틈새를 메우고 있던 밤하늘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ㅡ 2권 103p


19세기에 영국에서 태어난 샬롯 브론테는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언니이다. 두 자매는 비슷한 시기에 글을 쓰고 함께 책을 낸 적도 있지만 독특한 개성을 뽐내며 각각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썼다. 샬롯은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얼마간 교사생활을 했으며 가정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제인 에어>는 진정 샬롯 브론테의 삶을 모태로 창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녀가 추구한 삶이 오롯이 드러난 수작이라 말할 수 있다. 작품 속 남성들이 여성을 남성에 예속된 존재로 보는 장면, 제인이 로체스터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철저하게 순응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 등은 그 당시의 시대상과 여성의 지위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종 "프랑스적"인 것을 비판하며 "영국적"인 것이 더 고상하고 훌륭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리는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그당시 영국인들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제인 에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이성적이고 분별있는 판단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제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재미를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으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의 삶이 답답하고 억눌려있다고 느낀다면, 불만족스러운 무언가로 인해 지쳐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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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열정 멘토링 - 기초부터 고급까지 스페인어로 일등 되기, 핵심 문법 60강
전예진 지음 / 러닝터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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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를 새로 시작하거나 손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사람들에게 유용한 스페인어 문법책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잘 설명되어 있고 기본 문법들(접속법, 명령문)이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점 중 하나는 앞표지 뒤에 따로 정리되어 있는 "동사 활용 마스터북"이다. 소책자처럼 붙어 있는데 분리할 수 있다.

 

 동사활용 마스터북에는 다양한 동사들의 변형형이 정리되어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다른 문법책들에게도 다 있는 부분이다.

독특한 점은 아래의 "간편 동사 매뉴얼"부분이다.

쌩초보가 아니라면, 스페인어 동사가 변형되는 수많은(?) 형태, 가령 불완료과거, 단순과거, 미래형, 접속형 등의 어미를 외우는 것도 깜깜하지만, 과거, 불완료과거, 현재완료, 과거완료 등의 상황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스터북의 첫페이지는 이 형태가 정확히 언제 쓰이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찾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목차.
​1,2,3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또 하나의 장점은 가독성이 좋다는 것이다.

적당한 여백, 정리된 표, 쉽게 들어오는 그림이나 사진 등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 긴장이나 부담을 덜해준다.


 

꽤 많은 예문들이 제시되어 익힌 것을 복습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함께 들어있는 CD에는 교재의 내용(스페인어 독음)이 mp3로 실려있다.


사실 입문서와 mp3 파일만으로 언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입문할 때는 학원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정답은 없고 개인이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으로만 시작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동영상 강의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더 많이 듣고, 집중하고, 소리내어 말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선물받은 책인데, 스페인어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동사 마스터북이나 챕터의 구성 등을 볼 때 다른 문법서와 차별점을 두기 위해 저자가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처음 스페인어를 시작하는 학습자가 알아야 할 기본 문법이 충실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기존 학습자들이 선행지식을 잘 떠올릴 수 있도록 '한 눈에 잘 들어오"게 정리된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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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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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나 분위기는 사람마다 다르게 감지할 수 있기에,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저자가 주장하는 개인주의에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중략)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 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ㅡ 23p

 

나만 아는 이기주의, 우리만 아는 배타주의가 아니라 개개인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 그러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저자는 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이다. 재판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재판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폭력성, 그 안에서 억압받는 개인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스스로 "인간 혐오"의 기질이 있다고 하며 "사람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하지만, 저자가 사람을 향해 보내는 따뜻한 시선, 내재된 열정은 책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이 책은 다양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우리 사회를 넘어 범지구적인 차원의 통찰이 담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에서는 다양한 개성, 소수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고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 삶을 끼워맞추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방향점이 제시되어 있다. 2부 "타인의 발견"에서는 재판에서 만났던 사람들, 소외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 등 약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부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로 작가의 시야를 확장시킨다.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들의 역사와 실태, 북유럽과 미국 사회에 대한 통찰, 우리 나라가 수용해야 할 점과 고려해야 할 점 등을 풀어내고 있다. 두 세쪽에서 열쪽 정도 되는 수십 개의 글들을 꿰뚫는 것은 작가의 뚜렷한 문제의식이자 일관된 고집이다. 서로 다른 개개인이 존중받고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그는 사색하고, 행동하고, 글을 쓴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조건 집단이 요구하는 술 잘 먹고 윗분 잘 모시고 분위기 잘 띄우는 씩씩한 전사로 거듭날 것을 강요하는, 그래야 어른 되었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중략)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 ㅡ 57, 58p

 

이 책은 공동체와 수직적 위계 질서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 하는 독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비판 없이 그저 순응한 것은 아닌지, 나의 개성을 억누르는 것은 아닌지, 고통받는 소수자를 방관하거나 편견을 갖고 대하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고 비문학 지문을 읽듯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판사의 글은 온갖 법률 용어가 가득한 어려운 글일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저자가 겪은 재판 이야기, 그 밖에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저자의 경험이나 이슈가 되었던 사건 등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여, 인문사회 영역의 책을 접할 때마다 '배경지식이 부족한데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불안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저자의 의도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짤막짤막한 글들이어서 더욱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다만 3부의 몇몇 글들은 주제가 다소 어렵거나 전문적인 데 비해 내용이 짧고 결론이 급히 지어진 듯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글의 분량을 유연하게 하여 다소 추상적인 주제의 글은 더 다양한 사례들이나 작가의 배경지식, 논거 등을 포함시켜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더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페터 비에리는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가 사고의 주인이 되는 '자기결정'을 강조한다.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자기 결정의 중요한 행위라고 말한다(<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2015).  '으레 그래왔던 것', '당연한 것'들을 돌아보고 그에 대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가 당당히 '개인주의자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으레 그래왔던 당연한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옳은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유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인주의자 선언>은 단순히 저자의 메시지만 전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와 너, 우리가 조화롭게 사는 세상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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