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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 직설적이고 명확하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인생 이야기이다. 동시에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은 "나는 이러이러하게 달려왔고, 써왔으며, 계속 살아갈 것이다"라는 선별적인 회고록이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달리기라는 행위를 축으로 한 일종의 '회고록'으로 읽어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ㅡ 서문
현재도 달리기를 하고 있고, 지금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1장이 끝나고 2장부터는 달리기를 제대로 시작하게 된 1982년과 그 이후의 달리기 인생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서른 즈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체중조절과 체력 유지를 위해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고 점차 거리와 운동시간을 늘려나가며 아마추어 달리기 선수가 되어간다. 42.195km 마라톤 첫 도전, 한번에 100km를 뛰는 울트라 마라톤 참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한 치밀한 노력 등을 이야기한다.
달리기에 대한 내용만 가득하다면 그 방면에 흥미가 없는 독자로서는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루키는 달리기에서 자연스럽게 작가로서의 삶,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덤덤하게 풀어내 독자를 몰입시킨다.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중략) 창작가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ㅡ 26p
책을 통해 독자는 세계적인 작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한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본다. 그를 통해 달리기를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를 보는 듯한 친밀함과 함께 독자 자신의 삶은 어떤지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어느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 중 평균 이하인 것을 27개정도까지 찾아내다가 속상해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이 인간, 나랑 별반 다를게 없잖아'라며 피식 웃을 수도 있다. 그러는 순간 하루키라는 한 인간은 더욱 독자에게 가까워진다. 가진 게 많지 않다며 스스로를 쓰담쓰담하는 모습에서 독자를 무장해제시키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이며,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며, 그것을 철저하게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삶의 태도는 독자를 감화시키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러나 그런 살찌기 쉬운 체질로 태어났다는 것은 도리어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내 경우 체중이 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식사에 유의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중략) 그런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은 운동과 식사에 유의할 필요가 없다.(중략)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중략)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ㅡ 72p
마라톤 완주, 기록 단축, 트라이애슬론(달리기, 수영, 사이클을 혼합한 종목) 도전 등 피눈물나게 치열한(?) 달리기 이야기는 내용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들도 책이 술술 읽히는데 한몫한다. "소설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문장들의 장점은 한 문장 한 문장이 꼭 필요한 의미만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며 이것은 독자를 더욱 집중하도록 돕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작가로서의 삶이나 그의 소설 이야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그러한 내용들의 비중이 크지 않은 데 대해 실망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는 것도 싫고"라는 후기처럼 작가가 사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거나 어색해하는 느낌이 책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최근에 하루키의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풀어낸 글로서는 최초인 산문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을 출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글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있던 독자에겐 환영할 만한 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는 까닭은 달리기 이야기는 그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며, 스스로 가장 우선순위라고 밝힌 '소설가로서의 삶'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ㅡ 126p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 이후에 쓴 소설들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달리기, 글쓰기, 그리고 그의 나머지 삶은 서로를 포용하고 연결하며 조화를 이룬다. 하루키의 문학과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글을 써보고 싶으나 잘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러너들에게는 당연히 추천이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ㅡ 25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