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독후감 숙제를 할 때 쓰던 버릇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은 후 쓰는 글에는 꼭 교훈이나 앞으로의 다짐, 하물며 그 책의 시사점 정도는 써주어야할 것 같은 압박이 있다. 그런데 종종 그런 걸 찾지 못할 때면 당황스럽고, 허투로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국 "그 책은 삶을 돌아보게 한다"라는 둥으로 급하게 마무리지으며 글을 마친다. 특히 소설이 그렇다.


책에 잠시 등장하는 오르한 파묵(<내이름은 빨강>, <이스탄불> 등을 쓴 터키 작가)은 소설읽기란 감춰진 "중심부"를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83p). 그 과정에서 호기심, 끝까지 읽으려는 동기, 그리고 경탄에 사로잡혀 읽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중심부를 찾기 위해 소설 속의 다양한 재료들을 면밀히 관찰한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는 행위에 대해 무릎을 탁 칠만한 해석이다.


그런데 저자 김영하는 그와 동시에 "중심부"를 찾기가 힘든 소설들도 소개한다.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권의 책"을 실천하고자 했다는 플로베르의 말은 지금까지의 소설읽기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길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선하고 파격적인 조언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사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 ㅡ 102p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 ㅡ 102p


무언가를 크게 깨닫지 않아도 된다. 소설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남겨진 여운, 이러한 내면의 경험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자 독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책에는 길이 없다". 한마디로 무엇을 의도하여 쓴 책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은 독자의 책임이 아닌, 소설의 또다른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헤매기만 해도 괜찮다. 독자들이 더 소설을 읽고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해석이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가 6번의 강연에서 풀어낸 내용을 엮은 것으로 '소설을 왜 읽는가'라는 물음을 핵심 주제로 한다. 작가가 사랑하는 소설들(오이디푸스, 돈키호테, 마담 보바리, 롤리타, 성, 죄와 벌 등)을 소개함과 동시에 이야기와 독서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그저 책이 있으니, 읽고 싶으니 읽었을 뿐인데 이 흔한 행위가 이렇게 심오하고 훌륭한(?) 의미가 있다니' 하는 놀라움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특히 아래의 구절은 예전에 <죄와 벌>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소설은 우리가 '라스콜리니코프' '롤리타' '히스클리프'라고 말함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독선을 해체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 ㅡ 173p


첫째, 당시에 라스콜리티코프의 생각과 행동을 보며, 책을 읽기 전에 짐작했던 살인자의 심리상태와 너무 다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살인을 들키지 않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대체 작가의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었다. 범죄자가 참회하고 자수하는 내용일 거라고 짐작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둘째,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를 비롯한 심리묘사가 소름돋도록 치밀하고 현실적이어서 '혹시 작가가 살인을 해본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인간 심리의 복잡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교훈을 찾기는 힘들었던 이 책에 대해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 있는 괴물을 맞닥뜨리고 불편함을 느끼는 경험 또한 이야기를 읽는 이유라는 것. <읽다>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지으며 <죄와 벌>을 읽었을 때의 의문들이 다소 해소되었다.


"책은 독립적이지만 이야기는 바다처럼 흘러 나눠지거나 합쳐지며 인간의 내부를 가득 채운다. "

'나'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이야기로부터 생성된 부분이 매우 크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바로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은 우리가 계속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야하는 의심할 수 없는 동기를 불러일으킨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 (해럴드 블룸) ㅡ 31p


사람이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혼란을 느끼고, 익숙한 것을 비뚤게 보고, 새로움과 기존의 것 가운데를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러한 작업들이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독서가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 읽어야만 하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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