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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개인주의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나 분위기는 사람마다 다르게 감지할 수 있기에,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저자가 주장하는 개인주의에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중략)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 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ㅡ 23p
나만 아는 이기주의, 우리만 아는 배타주의가 아니라 개개인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 그러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저자는 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이다. 재판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재판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폭력성, 그 안에서 억압받는 개인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스스로 "인간 혐오"의 기질이 있다고 하며 "사람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하지만, 저자가 사람을 향해 보내는 따뜻한 시선, 내재된 열정은 책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이 책은 다양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우리 사회를 넘어 범지구적인 차원의 통찰이 담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에서는 다양한 개성, 소수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고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 삶을 끼워맞추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방향점이 제시되어 있다. 2부 "타인의 발견"에서는 재판에서 만났던 사람들, 소외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 등 약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부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로 작가의 시야를 확장시킨다.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들의 역사와 실태, 북유럽과 미국 사회에 대한 통찰, 우리 나라가 수용해야 할 점과 고려해야 할 점 등을 풀어내고 있다. 두 세쪽에서 열쪽 정도 되는 수십 개의 글들을 꿰뚫는 것은 작가의 뚜렷한 문제의식이자 일관된 고집이다. 서로 다른 개개인이 존중받고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그는 사색하고, 행동하고, 글을 쓴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조건 집단이 요구하는 술 잘 먹고 윗분 잘 모시고 분위기 잘 띄우는 씩씩한 전사로 거듭날 것을 강요하는, 그래야 어른 되었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중략)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 ㅡ 57, 58p
이 책은 공동체와 수직적 위계 질서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 하는 독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비판 없이 그저 순응한 것은 아닌지, 나의 개성을 억누르는 것은 아닌지, 고통받는 소수자를 방관하거나 편견을 갖고 대하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고 비문학 지문을 읽듯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판사의 글은 온갖 법률 용어가 가득한 어려운 글일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저자가 겪은 재판 이야기, 그 밖에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저자의 경험이나 이슈가 되었던 사건 등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여, 인문사회 영역의 책을 접할 때마다 '배경지식이 부족한데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불안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저자의 의도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짤막짤막한 글들이어서 더욱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다만 3부의 몇몇 글들은 주제가 다소 어렵거나 전문적인 데 비해 내용이 짧고 결론이 급히 지어진 듯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글의 분량을 유연하게 하여 다소 추상적인 주제의 글은 더 다양한 사례들이나 작가의 배경지식, 논거 등을 포함시켜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더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페터 비에리는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가 사고의 주인이 되는 '자기결정'을 강조한다.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자기 결정의 중요한 행위라고 말한다(<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2015). '으레 그래왔던 것', '당연한 것'들을 돌아보고 그에 대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가 당당히 '개인주의자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으레 그래왔던 당연한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옳은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유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인주의자 선언>은 단순히 저자의 메시지만 전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와 너, 우리가 조화롭게 사는 세상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