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작가의 이름을 볼 때마다
영화 장면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 책은 엔도 슈사쿠가
예수의 생애를 떠올리며
성경 속에서는 생략되거나
작가가 함축되어 있다고 여기는 의미들을
소설가의 입장에서 쓴 '성경 이야기'이다.
그러니 작가의 말대로
신학적 해석이 없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남편에게 설명했을 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성경에 대한 해석이니
남편이 고개를 갸웃거린 게 이해된다.
그러니 소설을 소설로 읽는게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들려주는 예수의 생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이야기가 매우 생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설민석의 한국사처럼
엔도 슈사쿠의 성경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달까.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던 이야기 속
알려지지 않은 배경,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까지
제자들이 기다리며(!) 가까이 머무른 이유,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부은
여인이 등장하는 장면 묘사 등등
신학적 해석은 아니지만
성경의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소설적 이야기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돌아보면 신부님의 강론 중에서
복음의 표면적인 장면말고
그 뒷 배경을 설명해주는 강론에
눈과 귀가 번쩍 뜨이곤 했었다.
예수의 고민과 그로 인한 행적들을 보면서
나도 역시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그분의 참뜻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
30) 첫 번째, 예수는 당시, 이미 유다 광야에서 생활하던 쿰란 공동체와 접촉했을까? 그리고 이 공동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두 번째, 만일 예수가 에세네파와 접촉했다고 한다면, 성경은 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32)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때를 두른 요한 세례자는 이 엄한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의 분노를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며 경고했다. 요한 세례자가 전하는 하느님은 세계의 종말과 심판을 배경으로 하여 분노하고 벌하는 구약의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하느님의 모습일까?' 예수는 요한 세례자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아마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는 작은 나자렛 마을의 가난하고 비참한 서민의 생활을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흘리는 땀 냄새도 알고 있었다. 또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도리가 없는 이들의 나약함도, 병자나 불구자들의 한탄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는 이러한 서민들이 추구하는 하느님의 분노하고, 심판하고, 벌하는 존재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 예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이러한 하느님의 이미지가 뚜렷이 자리 잡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유다 광야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요한 세례자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그가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산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온화하고 어머니와 같은 신의 모태가 된다.
35) 적어도 이 공동체의 사해 문서에 쓰여 있는 내용으로 볼 때 첫째, 쿰란 공동체의 메시아는 지상의 지배자였다. 둘째, 그들에게는 예수가 생각했듯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관념이 없었다. 셋째, 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끼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자신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말로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였기에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62) '하느님의 사랑'이라든가 '사랑의 하느님'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가혹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더 절실히 느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보다 그분의 차가운 침묵이다. 가혹한 현실에서는 사랑의 하느님보다는 분노의 하느님, 벌하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편이 더 쉽다. 따라서 때때로 구약에 하느님의 사랑이 언급되어 있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나, 울고 있는 이가 아무런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파악할 수 있을까?
72) 한편으로 예수는 현실에서 사랑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불행하고 가엾은 이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이 사랑의 무력함을 깨달으면 자신을 배반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현실을 사는 인간은 결국 눈에 보이는 '효과'를 원한다. 병자들은 치유되길, 절름발이는 걷게 되길, 맹인은 볼 수 있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이 '사랑'은 현실에서 말하는 효과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고뇌가 있었다. 그는 이를 깨닫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기적 이야기'의 한편에는 이러한 예수의 고뇌가 숨어 있다. '기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가 실제로 기적을 행했는가 하는 통속적인 의문보다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사랑이 아니라 표징과 기적밖에 구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분노하였는지를 루카 복음서 4장 28절은 암시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단 한 줄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가 '기적 이야기'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102)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많은 기적 이야기 가운데 복음서가 남기는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서가 남기는 예수의 이 말들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사랑'이 아니라 표징과 기적을 바랐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쓰였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108) 그들은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한 그들이 많은 제자들이 떠나간 후에도 이 비참한 스승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다닌 것은 아마 예수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순수함과 슬픔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종종 어떤 이의 순수함을 생각하면 자신의 초라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일이 있다.
215) 왜 사람들은 예수를 저버렸을까? 그렇게도 환호하며 맞이하던 예수를 왜 추방했으며, 더 나아가 나자렛에서는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까지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한 마디로 답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예수에게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 대해 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하며 그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일까? 미흡하지만 나는 이 점엣 대해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관망해 본다. 갈릴래아에서 사람들은 그를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삼고자 했으며, 반로마 운동의 메시아로 떠받들고자 했다. 이러한 그들의 기대에 예수는 부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산상 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예수에게 기적만을 요구하려 했다. 갈릴래야를 배경으로 한 많은 기적 이야기를 읽어 보면, 우리는 그 '기적'이라는 것이 예수에게서 흘러넘치는 사랑에 비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만을 요구하려 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여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그날부터 예수는 사람들에게 무력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기적도 행하지 않는 예수, 하지만 그들은 무력함 가운데 예수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의 무력함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상당히 많았던 제자들도 하나 둘 떠나가 버리고 몇 명 안 되는 남자와 여자들만이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이다. 그렇지만 수난 사회는 갈릴래야 선교 이야기나 기적 사회와는 달리, 현실에서 무력한 예수를 철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의회의 조롱 앞에서,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서, 그리고 로마 병사와 군중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면서, 예수는 어떤 행동도,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하느님 또한 그러한 그를 돕지 않았다. 수난 사화에서 예수는 자신의 무력함을 명백히 드러냈던 것이다. 피와 땀투성이가 되어, 야윈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향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난 사화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 주며, 그 무력함의 의미를 우리에게 묻는다.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도리어 그가 예수라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