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 - 그리스도인의 묵상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서명옥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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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는 1905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났고, 1929년에 예수회에 입회, 193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를 만나 영적으로 교류하다 1945년에 함께 재속 수도회를 설립했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추기경에 서임했지만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했다.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는 묵상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책에서 밝히듯 묵상에 이르기 위한 준비법을 소개하지 않는다. 발타사르는 침묵을 근간으로 하는 수동적이라서 적극적인 묵상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묵상법이라 역설한다. 특히 '성모 마리아는 모든 묵상과 관상의 원형'이라고 밝히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묵상 안에서 따라야 할 본보기가 바로 성모 마리아라고 한다. 얼마 전부터 비로소 알게 된 묵주기도의 은총과 성모님의 순명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책에서 성모님의 삶(태도)처럼 묵상하라는 대목을 만나 새롭게 또는 다시금 성모님에 대해 묵상해 보고 싶어졌다. 덕분에 망설였던 <완독 챌린지>에 참여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마침 10월에 함께 읽는 책이 <철학자, 믿음의 여인을 묵상하다>로 성모님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묵상 중 일어나는 세상에 관한 생각들을 떨쳐내려고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함을 알린다. 세상사에 대한 사회나 나의 판단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묵상 중에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계획을 알아차리는 것이 또한 묵상 중 침묵이 필요한 이유다. 아마도 내가 침묵하여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자하는 갈망이 클 때, 그때가 그분이 말씀으로 활동하기 가장 좋은 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눈을 감고 고요하게 머무를 때 한동안 풀리지 않았던 고민과 무거운 마음이 한 말씀으로 스르륵 풀렸나 보다.

"곧 자신의 모든 지상적인 것을 아버지로부터의 사명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그분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기도 안에서 그분과 관계를 유지하는, 신인의 내적 자세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마치 커튼이 올라가듯이, 이 단계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중심을 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필수이다. 멈추는 것! 커튼이 올라간 것은 은총이며, 그 본 것을 파악하고 그것이 자신을 꿰뚫게 하라는 초대이다. 이는 그것으로 성취되길 바라는 갈망(결코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의지가 아닌)이 열리는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에게 이것이 허락된 것, 우리가 진열창을 통해 과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보고", "시식"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 심지어 압도적인 기쁨일 수 있다.(87쪽)"

묵상하며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궁금한 이들, 무엇을 청해야하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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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그리스도교적으로 요구되는 침묵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믿는 이(신자)는 자시닝 들어가야 할,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는, 조요하고 숨겨진 "골방"(마태 6,6)을 언제나 이미 자신 안에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 안에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아마도 철부지 "작은 이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는"(마티 18,10),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43) 그리스도인으로서 묵상하는 이는 오직 그에게 선사된 신적인 영을 통해서만 하느님 말씀의 광대함을 깨달을 수 있다. 그에게 전달되는 하느님의 영을 통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내면이 무엇이닞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1코린 2,10 참조)?

이것은 묵상하는 이가 묵상하고자 하는 장면으로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자주 반복된 묵상 지침을 고려할 때 즉시 명확해진다.

66) 묵상하는 이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 도덕적 적용을 하기 위해 일찌감치 예수님에게서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더 잘 보고,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자기 상황의 변화 또한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변화는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나,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곧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시는 분의 시선에서]......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12-13 참조)

79)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러저러한 "기도의 단계"에 올라섰다고 "어떤 교만이나 허영심에서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두드릴 수 있고 또 두드려야 하지만, 우리가 두드린다고 해서 반드시 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두드림에는 그러한 마법적인 힘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러한 말씀의 외견상의 침묵은 세 가지 관점 모두에서 집중적인 가르침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는 점, 그리고 [감각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1베드 1,8) 속에서도 그 "변용"은 주님께 달린 것이라는 점, 그런 다음에는 이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87) 곧 자신의 모든 지상적인 것을 아버지로부터의 사명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그분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기도 안에서 그분과 관계를 유지하는, 신인의 내적 자세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마치 커튼이 올라가듯이, 이 단계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중심을 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필수이다. 멈추는 것! 커튼이 올라간 것은 은총이며, 그 본 것을 파악하고 그것이 자신을 꿰뚫게 하라는 초대이다. 이는 그것으로 성취되길 바라는 갈망(결코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의지가 아닌)이 열리는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에게 이것이 허락된 것, 우리가 진열창을 통해 과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보고", "시식"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 심지어 압도적인 기쁨일 수 있다.

134) 묵상에 세상을 포함시키는 것은 결코 산만함의 성격이 아니며,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집중에 속하는 일이다. 바로 그분의 계시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집중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중은 우리가 묵상 가운데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할 때만 일어난다. 세상이 그 자신을 보는 방식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한 방식도 결코 묵상에 알맞지 않다(그것이야말로 정말 산만함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알맞은 방식이다. 곧 세상이 하느님에게서 달아나려고 하는, 하느님으로부터의 멀어짐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행위로 세상을 되찾아 오시는, 그분의 칠밀함[하느님과의 가까움] 안에서, 바로 그분 아들의 파견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묵상에 알맞다. 삼위일체이시며 당신 사랑의 삶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그분 안에서""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사도 17,28)한다. 내가 모든 이["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 마태 25,40 참조)에 대한 그분의 헌신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하느님의 헌신을 묵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묵상과 나의 일상적인 세상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전제 조건이다.

161) "따라서 그리스도교 묵상은 온전히 삼위일체적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인간적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성에 등을 돌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기 위해 모든 이는 성령 안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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