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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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재발견

 

한나 아렌트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개념은 악의 평범성이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평범해 보이는 이가 악마가 되는 과정을 탐구했다. 이때 도덕적 허용을 넘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할 수 있는데 에는 우매함이 아닌 사유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사유하다란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유작 <정신의 삶>사유’, ‘의지’, ‘판단’ 3부작으로 이뤄져있는데 아이히만의 재판은 본인의 전문분야를 넘어 정신적 활동에 대해 연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같은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정신적 활동에 대해 분석하며 회의한다. 그녀는 사유를 전문가들의 학문이 아닌 모두의 과제로 만들고자 했지만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철학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다가가기에는 까다롭게 느껴지는 건 상당히 아쉽다. 사유한다는 건 외부와의 교류가 아닌 내부의 고독이다. 사유는 현상 세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현상 세계의 이탈에서 시작된다. 이는 사유뿐만 아니라 후에 등장하는 의지와 판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렌트의 의지는 곧 자유의 개념을 묻는다. 아렌트는 의지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의지를 분석했는데(p337) 이전의 철학자들은 의지와 욕망을 혼돈했다. 아렌트는 니체의 의지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개념을 강조했는데 대상들이나 목표들 가운데 선택하는 능력과 시간 속에서 일련의 계기적인 것을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능력(p533)이다. 또한 그녀는 의지의 자유를 역설하며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언급했다. 이는 그녀의 주장이 단순히 철학에 그치지 않는 정치철학으로 뻗어나가길 바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옮긴이의 해제를 먼저 읽고 책을 읽는 편이 어려운 철학서를 정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렌트의 학문을 감히 일독으로 이해하려는 과한 욕심은 접어두더라도 철학서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번역의 아쉬움이 짙게 남는 책이다.

 

활동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녀의 바람처럼, 정신적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꼭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적 탐구와 일맥상통하지 않다는 건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 그녀의 바람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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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왕
김설아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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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부적응자들에게

 

평범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무랄 데 없는 평범한 가장이 하루아침에 고양이가 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결근한 것이 그리 큰 잘못일까. ‘갱생 프로그램이라는 알 수 없는 프로그램에 강제로 참가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고양이가 됐다.

 

아버지는 고양이가 돼서도 평범하게 직장에 출근했다. 사고뭉치일지라도 그는 회사에서 마지막 통보를 하기 전까지 그 무엇도 스스로 박차고 뛰쳐나가진 않았다.

 

갱생 프로그램에 실패했다. 야성에 눈을 뜨고 말았다 (p106).’

 

이렇게 무책임한 한 마디의 통보로 아버지의 본격적인 고양이 생활은 시작됐다. 성실했던 가장이라면 상상도 못할, 본능에 충실한 사나운 야생 고양이가 되어 동네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아버지라는 책임감이 그동안 그를 억눌러왔던 것일까.

 

왜 얌전하게 있지를 못하냐고, 왜 평화롭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를 못하냐고(p115). 울부짖는 외침에도 아버지는 이전과 달리 나를 외면했다.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손하게 구시는 통에 분통이 터질 때도 있었지만 예절과 배려는 인간 사이를 지켜주는 울타리이며, 모든 사람은 귀중한 존재라고 늘 말씀하셨던 아버지(p94)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변화는 우리 가족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나의 학교생활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 외롭던 와중에 아버지가 새로 변한 주리와의 교감은 나를 한층 더 성장시켜 주었다.

 

 

어쩌면 속 마음은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리울텐데,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함께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고양이 대왕>을 읽으면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주인공의 죽음에도 가족들은 애도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에게 고양이로 변해버린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함께하기만 해도 좋았던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면서 곤란함에 처했을 때 이전과 같은 애틋함은 잠시 잊었을지도 모른다.

 

갱생 프로그램의 실패,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세상에 적응하는 걸 실패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세상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남아있지 못할 때 종국에는 사회와 가정 모두에게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꼬집은 게 아닐까.

 

8편의 단편이 수록된 김설아 작가의 <고양이 대왕>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정상의 범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딘가 기괴한 이들을 우리는 부적응자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부적응자는 아니었지만 어떤 사건의 계기로 세상과는 단절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일삼는데 그들의 일탈이 진정 행복을 부르는지 아니면 불행의 전초인지는 나의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한계를 느낀다.

 

고작 병아리에 온 마음을 뺏기는 보통 사람들, <외계에서 온 병아리>의 대단한 전문가들은 그 병의 원인도, 이유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한다. 자신을 이해하는 건 병아리뿐이라는 부적응자들의 외침에도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단지 비정상의 범주에 몰아 갱생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다이아몬드 반지에 마음을 뺏긴 <모든 것은 빛난다>의 주인공 소라, 평범했던 그녀의 일상을 파괴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고서야 비로소 반짝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불행의 늪에 스스로 빠진 그녀의 어리석음을 지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오죽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기에 반지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동정심을 느껴야 할까.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보니 주인공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달의 친절사원>의 주인공 유리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보통 사람이 되고픈 그녀의 열망이 오히려 공감이 갔다. 엄연히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튀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의 고뇌는 보통사람들의 고민이다. 세상이 바라는 모습에 맞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그녀에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적응아 새미의 존재는 걸림돌 그 자체다. 사실 고작 말단인 유리나에게 새미를 맡긴다는 것부터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닐까.

 

책 초반에는 부적응자들을, 뒤로 갈수록 보통 사람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서로의 관점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몽환적인 환상 속에 빠져사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고약함이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 그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하는 동료라면?

 

기준을 만든 세상을 탓해야 하는가, 넓지 못한 아량을 탓해야 하는 것인가.

세상에 억눌리고 억눌려 부적응의 행동을 보이는 이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소설로 느껴지지 않는 건 훗날의 우리가 겪게 될, 어쩌면 현재의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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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공포증
배수영 지음 / 몽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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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공포증이라니~ 사람이 햇빛 없니 살 수 없는데 말이죠!! 미리보기 업데이트 되기만을 기다리는 책인데 빨리 완전체로 만나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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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을유사상고전
묵자 지음, 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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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예수이자 큰 마르크스라 불린 묵자를 만나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상가들을 배운다. 하지만 유가, 도가와 달리 묵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때는 널리 알려졌지만 묵자 사후 묵가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 공자 이후 뛰어난 학자들이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유가에 비해 묵가는 저명한 학자가 없는 것이 학문 소실의 원인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통치자들이 묵가를 외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통치자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사실 너무 간단하다. 그들의 구미의 맞지 않는 것이다. 묵가를 읽다보면 참 서민적인 느낌을 많이 받는다. 실제로 묵가의 저자 묵자(묵객)가 노동자 계급의 장인 출신이다 보니 고고함보다는 소박함과 정겨움이 느껴지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통치자가 어떻게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하는지, 어떤 인재를 어떻게 선발해야 하는지는 묵가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일반 사람들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한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거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자신에게는 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내용도 묵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요즘 공자의 논어도 읽고 있는데 4대성인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자뻑이 심한(?) 공자님의 말씀에 그 이미지가 조금 깨는데 묵자님은 참 한결같이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이것(부역과 세금)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과다하게 부역을 시키고 그들로부터 지나치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p70). 과한 허례허식의 폐해를 상당히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런 말은 본인이 직접 노동자 계급에 속해있기 때문에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만약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두루 서로 사랑하게 한다면, 나라와 나라는 서로 공격하지 않으며, 도둑은 없어질 것이고, 임금, 신하, 아버지, 자식은 모두 효순하고 자애로울 수 있을 것이다(p231). 묵자께서 남을 사랑하라고 권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

 

묵가의 겸애편을 읽다보면 이게 중국의 사상인가 기독교의 사상인가 조금은 갸우뚱하게 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 왜 그를 작은 예수라 명명하는지, 묵가의 근본 사상이 무엇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묵가를 읽다보면 재밌는 편이 있다. 아니 무슨 귀신 논쟁을 이리도 치열하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귀신은 아니겠지만.... 고작 귀신이 뭐라고 싶을 만큼 귀신을 주제로 엄청나게 심도있는 토론의 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토론의 결말은 귀신은 결국 신분고하를 막론한 권선징악을 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에서 상당히 사이다가 팡팡 터진다.

 

귀신이 현명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포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릴 수 있음을 마땅히 믿어야 한다는 것, 또한 귀신이 벌을 줄 때에는 아무리 큰 세력이라도 반드시 벌을 준다는 말이다(p526).”

 

비성문편에서는 병법에 능한 묵자도 볼 수 있는데, 어떻게하면 전쟁 속에서 자신의 성을 지킬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장인 묵자를 만나볼 수 있다.

 

유가를 대표하는 공맹자라는 분과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회의 중심 학문으로 자리잡은 유가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걸 돌려까는 느낌이다.

 

누구의 학문이 더 뛰어나다 우열을 가리는 건 한자도 제대로 읽지 못해 역자의 해설본을 읽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공자의 논어를 읽을 때는 그 고상한 군자 너나 하세요였다면 1200페이지에 달하는 묵가를 읽으면서는 서민적인 느낌에 마음이 편해졌다. 뭔가 이해받는 느낌이랄까.

 

유가 사상을 담은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반박하고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사람이라면 묵가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각광받지 못했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느낌을 주는 묵자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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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20
조지 오웰 지음, 박준형 옮김 / 별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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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1949, 조지 오웰은 35년 후의 세상을 예고한 <1984>를 발표했다. 이념갈등이 극에 달했던 그 시기, 국가로부터 모든 것을 통제당하는 전체주의를 비판한 그의 소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고전으로 손꼽힌다.

 

전쟁은 곧 평화이고

자유는 노예를 만들어내며

무지는 힘이 된다.

 

소설 속 등장하는 당은 위와 같은 슬로건을 내세워 전쟁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자유를 천시하고 무지를 장려한다. 당 정책에 반발하는 이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과한 호기심은 독이 되고 생각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은 모든 말과 행동을 감시당하며 잠깐의 흔들림도 사상범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쓴다. 이 책의 주인공 윈스턴은 기록국의 직원으로 일한다.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노동자계급 프롤보다는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당원이지만 이 세계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반항감에 그는 법령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사상범으로 몰릴 수 있는 공책을 구매해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기까지 용기 내기는 힘들었지만 더 큰 일탈을 행동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이전의 신문을 수정하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쉽게 지우고 다시 작성할 수 있는 가변적인 기록(p67)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행위에 그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당연한 그의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현재 그가 속한 오세아니아는 전쟁 중이다. 그런데 전쟁과 동맹의 상대가 시시각각 바뀌는데 그 이외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통제되는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그들이 이상한 것인지 도통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 당의 정책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소설국 직원 줄리아와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큰 일탈이다. 어쩌면 작은 행동, 공책에 일기쓰기를 시작했기에 그녀와의 관계도 이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갈 수 있는 사상경찰을 두려워하면서도 당 정책에 반하는 그들의 사랑은 거침없다. 그들의 사랑이 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거라는 걸, 원스턴과 줄리아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사랑을 멈추게 한다면 그게 배신(p255)이라는 사랑의 맹세도 지독한 고문으로 인한 고통 앞에선 부질없어진다. 인간으로 남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인간다움이 무엇일지, 이길 수 없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

 

지극히 당연한 의문, 정말 우리는 과거보다 더 살만한가?를 알고 싶던 원스턴의 작은 호기심은 자신처럼 당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사 오브라이언과의 만남을 통해 확신이 된다.

 

이해하겠지만 자네들은 어둠 속에서 싸워야 하네. 언제나 어둠 속에 있을 걸세. 이유도 모른 채 명령을 받고 거기에 복종해야 하네. 나중에 내가 책을 보내주겠네. 그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짜 본질을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파괴하려는 우리 전략을 알게 될 걸세. 책을 읽고 난 다음 자네들은 명실상부한 브라더후드가 될 것이네(p267).

 

그는 이 세상이 과거보다 더 살만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제 이름 석자가 훗날 남지 않더라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것에 주저치 않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구체화 시킨 오브라이언이 전해준 책을 읽으며 그는 비정상적인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을 다시금 깨닫는다. 만약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프롤 계급에 있을 것이다(p328)!

공포와 증오, 잔인성 위에는 문명을 세울 수 없다(p493)는 원스턴의 고귀한 이상은 고통 앞에서 무너진다. 반복되는 고문과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쥐의 공격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가치마저 앗아간다. 당은 원스턴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도록 인간을 극도로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순응과 체념으로 산송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권력이고 정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무려 70년 전에 발표 된 이 소설이 지금에도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의 해석은 무궁무진하지만 지금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철저히 감시당하는 삶이라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요지는 이념의 갈등이며 파시즘과 공산주의같은 전체주의를 비판한 것이 우선이라 보기도 하지만 21세기에 이념갈등이 얼마나 실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진다. 이 책에서 기득권이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도 결국 적당한 적을 만드는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전쟁 상대가 유라시아인지 이스트아시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싸워야 할 상대를 만들어주는 것, 사실 우리의 정치행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야당, 여당을 떠나 정권을 잡았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정당이 있던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똑같다. 그렇기에 나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빅데이터란 이름으로 나도 모르게 나의 정보를 헌납하는 우리의 행태를 꼬집고 싶다.

 

스스로를 감시라는 감옥에 가두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조지 오웰이 상상하던 최악의 세상은 개인의 자유를 국가에게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는 자유롭다 생각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지 않다.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해당하지 않지만,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에 대해 너무 손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감시당하는지도 모른 채 자발적으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다만, 사상범이라는 죄를 적용시키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가질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세상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 21세기 세상의 순리는 자유민주주의였지만 이전보다 국가가 개인에게 관여하는 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념의 갈등이 정말 실재할까 의문을 가지지만 세계의 흐름을 보면 과거의 나의 행적이 언젠가는 사상범이 되어 발목이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는 점점 더 나의 정보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상납할 것이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마음만 먹는다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편리함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내 정보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섬뜩해진다.

 

두 말이 필요 없는 세계 명작이다. 1949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과거의 소설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정보가 가진 무서움을 깨닫게 한다. 조지 오웰이 현대에 살았다면 어떤 책을 썼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언어가 왜 중요한지, 생각하는 능력이 왜 필요한지, 너무도 공고히 서술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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