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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ㅣ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20
조지 오웰 지음, 박준형 옮김 / 별글 / 2019년 7월
평점 :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1949년, 조지 오웰은 35년 후의 세상을 예고한 <1984>를 발표했다. 이념갈등이 극에 달했던 그 시기, 국가로부터 모든 것을 통제당하는 전체주의를 비판한 그의 소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고전으로 손꼽힌다.
전쟁은 곧 평화이고
자유는 노예를 만들어내며
무지는 힘이 된다.
소설 속 등장하는 당은 위와 같은 슬로건을 내세워 전쟁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자유를 천시하고 무지를 장려한다. 당 정책에 반발하는 이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과한 호기심은 독이 되고 생각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은 모든 말과 행동을 감시당하며 잠깐의 흔들림도 사상범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쓴다. 이 책의 주인공 윈스턴은 기록국의 직원으로 일한다.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노동자계급 프롤보다는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당원이지만 이 세계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반항감에 그는 법령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사상범으로 몰릴 수 있는 공책을 구매해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기까지 용기 내기는 힘들었지만 더 큰 일탈을 행동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이전의 신문을 수정하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쉽게 지우고 다시 작성할 수 있는 가변적인 기록(p67)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행위에 그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당연한 그의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현재 그가 속한 오세아니아는 전쟁 중이다. 그런데 전쟁과 동맹의 상대가 시시각각 바뀌는데 그 이외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통제되는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그들이 이상한 것인지 도통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 당의 정책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소설국 직원 줄리아와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큰 일탈이다. 어쩌면 작은 행동, 공책에 일기쓰기를 시작했기에 그녀와의 관계도 이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갈 수 있는 사상경찰을 두려워하면서도 당 정책에 반하는 그들의 사랑은 거침없다. 그들의 사랑이 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거라는 걸, 원스턴과 줄리아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사랑을 멈추게 한다면 그게 배신(p255)이라는 사랑의 맹세도 지독한 고문으로 인한 고통 앞에선 부질없어진다. 인간으로 남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인간다움이 무엇일지, 이길 수 없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
지극히 당연한 의문, 정말 우리는 과거보다 더 살만한가?를 알고 싶던 원스턴의 작은 호기심은 자신처럼 당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사 오브라이언과의 만남을 통해 확신이 된다.
이해하겠지만 자네들은 어둠 속에서 싸워야 하네. 언제나 어둠 속에 있을 걸세. 이유도 모른 채 명령을 받고 거기에 복종해야 하네. 나중에 내가 책을 보내주겠네. 그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짜 본질을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파괴하려는 우리 전략을 알게 될 걸세. 책을 읽고 난 다음 자네들은 명실상부한 브라더후드가 될 것이네(p267).
그는 이 세상이 과거보다 더 살만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제 이름 석자가 훗날 남지 않더라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것에 주저치 않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구체화 시킨 오브라이언이 전해준 책을 읽으며 그는 비정상적인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을 다시금 깨닫는다. 만약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프롤 계급에 있을 것이다(p328)!
공포와 증오, 잔인성 위에는 문명을 세울 수 없다(p493)는 원스턴의 고귀한 이상은 고통 앞에서 무너진다. 반복되는 고문과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쥐의 공격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가치마저 앗아간다. 당은 원스턴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도록 인간을 극도로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순응과 체념으로 산송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권력이고 정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무려 70년 전에 발표 된 이 소설이 지금에도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의 해석은 무궁무진하지만 지금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철저히 감시당하는 삶이라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요지는 이념의 갈등이며 파시즘과 공산주의같은 전체주의를 비판한 것이 우선이라 보기도 하지만 21세기에 이념갈등이 얼마나 실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진다. 이 책에서 기득권이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도 결국 적당한 적을 만드는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전쟁 상대가 유라시아인지 이스트아시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싸워야 할 상대를 만들어주는 것, 사실 우리의 정치행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야당, 여당을 떠나 정권을 잡았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정당이 있던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똑같다. 그렇기에 나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빅데이터’란 이름으로 나도 모르게 나의 정보를 헌납하는 우리의 행태를 꼬집고 싶다.
스스로를 감시라는 감옥에 가두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조지 오웰이 상상하던 최악의 세상은 개인의 자유를 국가에게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는 자유롭다 생각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지 않다.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해당하지 않지만,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에 대해 너무 손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감시당하는지도 모른 채 자발적으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다만, 사상범이라는 죄를 적용시키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가질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세상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 21세기 세상의 순리는 자유민주주의였지만 이전보다 국가가 개인에게 관여하는 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념의 갈등이 정말 실재할까 의문을 가지지만 세계의 흐름을 보면 과거의 나의 행적이 언젠가는 사상범이 되어 발목이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는 점점 더 나의 정보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상납할 것이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마음만 먹는다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편리함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내 정보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섬뜩해진다.
두 말이 필요 없는 세계 명작이다. 1949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과거의 소설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정보’가 가진 무서움을 깨닫게 한다. 조지 오웰이 현대에 살았다면 어떤 책을 썼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언어가 왜 중요한지, 생각하는 능력이 왜 필요한지, 너무도 공고히 서술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