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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과 정의 - 대법원의 논쟁으로 한국사회를 보다 ㅣ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약속을 지키는 세상이라면 말이라는 건 이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할 것"이고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며 이에 따라 약자들은 정치가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못하고, 법률에도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p84 by 쉬피오)
<판결과 정의>는 '김영란법'의 발의자로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김영란 전 대법관이 퇴임 후 선고된 대법원의 전원 합의체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는 진통의 민낯을 파헤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법은 과연 정의로운가?
아마 이 물음에 무조건적인 긍정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법은 사회가 요구하는 메세지에 발맞춰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는데 법관들의 사고는 세상이 변하는 만큼 획기적으로 변화하지 못한다. 물론 그래서도 안될 일이긴 하다. 다만 어떤 부분에서는 세상의 생각보다 너무 진보적인 경향성을 나타내기도 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앞 장에는 가부장적인 사회 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우리 사회의 유래부터 미약하게나마 그 가치가 변화하고 있는 현재의 판결을 들여다보며 '남성'과 '여성' 을 넘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 법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계약과 법'의 우선순위를 논하는 중장의 내용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통상임금, 철도노조 등 갑과 을은 평등하지 않음에도 평등한 것처럼 여기는 법의 모순을 꼬집는다. 형식적 평등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쪽을 유리하게 보호하면서 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p111)는 책 속의 문장은 절대적인 갑의 시선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것 같은 법관들도 을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내포하여 안도감이 들게 했다.
과거사 청산편은 가슴 아팠다. 아니 오히려 법을 아는 놈들이 더 하다는 생각에 사법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국가에 의한 피해자들에게 공소시효라는 말 장난으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버리는 황당한 일이 일어났으니. 소제목 그대로 '세상 모르는 판사'들이 빠진 함정(p167)인지 정치적 판결인지는 아둔한 나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에필로그의 외침이 더욱더 가슴에 와닿는다.
법률가들이 법규주의의 왕국에서 나와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그리고 더 나아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법의 지배를 사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포기해서도 안 될 일이라(p226)는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법률가들만의 역할이 아니다.
당장 나 조차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대법원에서 어떤 판결을 내렸으며 어떤 가치를 수호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내심 대법원까지 갈 만큼 중대한 판결은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판결과 정의>를 읽으며 내가 법원의 판결에 무관심할수록 그 비용은 가장 약자인 내가 지불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진 제 식구 감싸기식 내용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후임 판관들에게도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르는 펜의 강함을 실감했다. 김영란 대법관이 재임 시절 내렸던 판결들을 되짚어보는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