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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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고 거기에 보조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울한 역할이었다. (p27)

고양이 애호가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의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를 주제로 쓴 그녀의 세 권의 책을 하나로 엮어낸 산문집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와 고양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존재의 사라짐에 무감각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귀한 도시 고양이를 모시고 산 런던에서의 생활까지. 고양이와 함께할 여유가 없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그녀의 삶은 고양이로 가득했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글을 맛깔나게 잘 쓰는 집사가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고양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본 관찰 일기랄까. 여기까지만 보면 한없이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때론 잔인해 져야 할 때도 있다. 도리스는 고양이를 키우며 느꼈던 괴로운 감정까지도 담백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그녀의 희로애락이 더 진솔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세상에 그 누가 악역을 자처하고 싶을까. 아프리카에 살았던 유년 시절. 잘 관리받은 도시의 고양이와 달리 길들어지지 않은 야생의 고양이는 인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손수 개체 수를 조절해야 한다. 도리스의 집안에서 악역을 자처하는 사람은 집안 대소사를 관장하는 어머니였다. 사실 글 시작부터 상상하면 너무 잔인한 이야기라 페이지를 계속 넘겨야 하나 잠시 고민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고양이의 목숨이 파리 목숨인 이 상황을, 고양이의 시체로 산을 쌓았을 폐우물을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도리스도, 그녀의 아버지도 여전사 같은 어머니가 탐탁지 않았으리라. “자연은 다 좋아. 제 자리를 지키기만 한다면(p27).” 이런 속 좋은 소리나 하며 자연 예찬을 하는 아버지에 질려 중재자의 역할을 어머니가 포기하자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백 마리의 고양이에 둘러싸인 집에 살 게 된다. 심지어 근친교배로 인한 기형 고양이가 득세하고 이는 아버지가 더는 자연을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의 집에서 일어난고양이 홀로코스트사건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완벽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영원히 너 같은 고양이는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던 그 고양이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 우리의 공주 고양이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아름답지만, 솔직히 말해 이기적이다. (p66)

그녀의 삶에 고양이가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무려 2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런던의 한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도리스에게 찾아온 예쁜 회색 고양이는 예쁘고 한 성깔 한다.  꽤 오랜 기간 고고한 여왕처럼 집주인 노릇을 한 회색 고양이에게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탐내는 다른 고양이들에게 절대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동물의 모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회색 고양이는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속이 타는 건 인간일 뿐. 결국 동네 수고양이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아 자꾸 새끼를 낳는 회색 고양이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중성화 수술에 죄책감을 느끼던 작가도 이것이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주인에게 배신당해 의기소침해진 회색 고양이의 히스테리가 온 집안을 감싼다. 이 책의 제목이회색 고양이를 위하여가 아닐까 싶을 만큼 책에서 회색 고양이는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회색 고양이의 하우스 메이트는 종종 바뀌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주인공처럼 도리스와 함께한다. 검은 고양이와의 신경전, 생존자의 지능을 체득한 루퍼스. 수많은 고양이들이 이 책에 등장하지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나 회색 고양이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충격적이고 놀라운 즐거움을 맛보고,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는 삶.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털, 추운 밤에 자다가 깼을 때 느껴지는 온기,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양이조차 갖고 있는 우아함과 매력. 고양이가 혼자 방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고독한 걸음에서 표범을 본다. (p264)

고양이를 살리기 위해 모진 선택도 감내하는 도리스의 결단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했던 부치킨의 다리 하나를 잘라내고 그의 의기소침함을 내내 봐야 했을 때 얼마나 슬펐을까? 그럼에도 고양이는 분명 그녀의 삶에 수많은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라면 누구나 도리스의 집을 고고하게 거니는 행복한 고양이들이 떠오를 테니 말이다. 나는 고양이가 없지만 고양이 집사라면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많은 공감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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