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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평점 :

TABULA RASA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화를 직접 보고도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그림을 잘 감상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했다. 혼자 미술관에서 한 작품을 오래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읽게 된 <혼자 보는 미술관>은 지금까지 내가 예술 작품 앞에서 한 고민들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TABULA RASA, 미술을 잘 감상할 수 있는 비법을 요약해 둔 이 문구는 결국 미술은 누군가에 의한 주입이 아닌 온 몸으로 몸소 느끼는 것임을 다시금 말해준다. 오랜 시간을 들여(T) 작품 속 모든 것들과 인사를 나누고(A) 그림의 배경에 몰두하기 보단 미술관에서 알려준 정보와 직관으로(B) 곰곰이 살피고 생각하며(U) 보고 또 보고(L) 작품을 평가하는 것(A)이 바로 1단계 감상법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선 작품 속 드러난 리듬감을 느끼며(R) 이 작품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생각해본다(A). 이때 꼭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림 내외의 배치를 통해 구도의 의미를 생각해보며(S) 그림의 분위기를 느껴본다면(A) 우리는 이제 미술 작품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거창하게 써뒀지만 결국 우리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을 애정을 가지고 찬찬히 살펴본다면 이 감상법에 가장 부합할 것이다. 나 같은 그림 초보자는 어떤 순서로 작품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니 그림 앞에서 길을 잃었을 때 TABULA RASA 라고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멀리 느껴졌던 그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림 감상법을 속성 코스로 배우고 나니 책에 수록된 그림 하나하나가 다 특별하게 다가왔다. <혼자 보는 미술관>의 장점은 책에 실린 그림의 해상도가 너무 좋아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미술관에서만큼의 감동을 느낄 순 없겠지만 그림의 디테일함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이 책의 표지 그림은 장 앙투안 바토의 ‘피에로’로 1700년대 그려진 작품이다. TABULA RASA 감상법을 배우고 가장 먼저 적용해 본 그림이기도 하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힘없고 세상사에 시달린 듯한 지친 남자가 보였다. 내 눈에는 넥카라 때문인지 펜싱복처럼 옷도 상당히 귀족스러워 보였는데 뒤늦게 이 작품의 인물이 광대라는 걸 알고 내 막눈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마 작품의 제목을 먼저 봤다면 생각의 방향이 조금 달랐을 텐데 하는 억울함도 들었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저 남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던 것 같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그림의 전체도 아닌 일부임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 수다를 떨 수 있는데 미술관에서 직접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 까, 이런 맛에 혼자 미술관 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한 그림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건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 책의 본문은 총 8가지 주제로 작품의 카테고리를 나눴는데 사실 제일 눈길이 가는 부분은 아름다움을 표현한 4장이었다. 보이에도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솔직히 내가 돈 많은 후원자라면 파괴적인 그림보다는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이 더 와 닿을 것 같았다. 로렌스 알마 테다마의 ‘로마 황제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는 내가 느끼기에는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다. 나도 저 축제에 초대되어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정작 현재의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 그림은 카스파 디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였다. 책 마지막에는 그림들의 출처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그림이 함부르크 미술관에 있다는 걸 알고는 함부르크에 갔을 적 이 그림을 알지 못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그림의 제목은 안개 바다지만 나한테는 안개가 아닌 거친 파도처럼 느껴졌다. 거친 파도를 고요히 응시하는 신사의 표정을 상상하자 문득 슬픔이 몰려왔다. 이 사람은 왜 혼자 고독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까. 왜 나는 이 그림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일까. 정답이 없는 질문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 이런 건가. 이렇게 그림을 보는 건가, 물론 이 책 이전에도 그림을 잘 보기위해 교양서를 찾아 읽었지만 이번처럼 마음으로 하나하나 바라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다만 내게 있어 그림을 보는 눈은 이 책을 보기 전과 본 후로 나뉠 것 같다.
그림을 감상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작품의 해석만 간략히 실려 있으며 앞서 말했듯 매우 뛰어난 화질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글이 아닌 그림을 감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 좋은 책이다. 내일이라도 당장 미술관에 가서 그림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게 만드는 <혼자 보는 미술관>, 혼자서 그림을 깊게 감상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